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66)의 부인 강지연씨(64)는 인터뷰를 위해 서울 강남구 일원동 자택을 방문한 기자에게 비닐 삼각팩에 들어 있는 커피우유를 내놓았다. 집에 손님이 올 때마다 내놓는 단골 메뉴라며 커피우유를 유리잔에 따르는 모습에서 소탈함이 느껴졌다. 그의 자택 역시 강남구에 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서민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한 동짜리 주상복합 아파트다.
“저희 집을 찾는 분들은 격식을 따지지 않는 분들이에요. 그래서 커피 대신 빈속에 마셔도 좋은 커피우유를 내놓고, 세련되지는 않아도 정성을 담은 밥상을 준비하죠.”
강씨는 권 후보를 찾아 집을 드나드는 이들을 위해 언제든 상을 차릴 수 있도록 재료를 준비해 두는데, 냉장고를 주로 채우는 것은 권 후보가 좋아하는 생선·나물 등과 된장찌개 거리들이라고 한다.
“남편이 대선에 출마한 뒤에도 이런 면에서는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지금껏 살아온 모습 그대로, 서민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대선후보 아내가 된 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끔 인터뷰를 위해 화장을 하거나 옷에 조금 신경을 쓰는 정도랄까요?(웃음)”
수수한 블라우스와 바지 차림의 강씨는 이렇게 설명하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실제 그는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창업주인 고 강의수씨의 무남독녀.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화여중·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한 그가 좌익 경력의 아버지를 둔 농촌 출신 가난한 고학생 권 후보와 결혼한 스토리는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 사이에서 드라마틱한 연애담으로 화제를 뿌리고 있다.
“노동운동 하는 남편 때문에 마음 아픈 적도 있지만, 더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한 그의 활동을 존경하고 지지합니다”
강씨가 처음 권 후보를 만난 건 이화여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지난 65년. 권 후보가 강씨의 집에서 함께 살던 외사촌 오빠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당시 권 후보는 막 제대하고 서울대 농대 복학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외사촌 오빠의 집이 지방이라 대학시절 우리 집에 같이 살았어요. 그런데 권 후보가 오빠와 친하게 지내면서 우리 집에 드나들었고, 저와 보게 된 거죠. 젊었을 때 그 사람, 키가 헌칠한 게 아주 멋있었어요. 지금도 멋있지만요(웃음).”
두 사람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사랑이 싹텄다고 한다. 하지만 강씨의 어머니는 둘의 만남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서로의 환경이 너무 다르다는 이유였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남편이 홀어머니에 시누이만 둘 있는 집의 외아들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리셨을 거예요. 그 무렵 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시고 회사마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어머니는 제 앞날을 무척 걱정하셨거든요. 딸이 행복하게 살기 바라신 어머니에게 권 후보는 마음에 드는 사윗감이 아니었던 거죠.”
하지만 갑자기 몰아닥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심적으로 힘든 상태였던 강씨는 듬직하고 한결같은 권 후보가 최고의 반려자로 여겨졌다고 한다. 강씨는 그를 향한 마음을 꺾지 않았고, 두 사람은 68년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되돌아 생각하면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제 삶은 평탄하고 부유했어요. 그런데 그를 만나면서 비로소 그렇지 않은 세상을 보게 됐죠. 저는 남편이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모든 사람을 아우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참 좋았어요. 그와 만나기 전까지 세상의 절반밖에 몰랐다면, 남편을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세상의 전부를 볼 수 있게 된 거죠. 그런 점에서 저는 지금도 남편에게 참 감사해요.”
권 후보는 결혼 뒤인 69년 기자생활을 시작해 79년부터 서울신문 파리 특파원을 지냈다. 그가 노동운동에 투신한 것은 프랑스에서 귀국한 88년 언론노동조합연맹(이하 언노련)을 만들고 초대 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 그때부터 그는 기자가 아닌 노동운동가로 새로운 길을 걸어왔다.
“남편은 파리 특파원을 하면서 우리 언론이 바로 서야 우리 사회가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귀국 뒤 바로 언노련 활동을 시작했죠. 오랫동안 조용하게 기자생활하던 사람이 갑자기 변했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남편은 어릴 때부터 우리 사회의 낮은 곳, 소외된 곳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강씨는 경남 산청 출신인 권 후보가 고등학교 시절부터 농민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7~8명의 친구들과 함께 야학활동을 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그런 남편을 통해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강씨는 지난 91년부터 7년 동안 미아리 성가복지병원에서 행려병자나 생활보호대상자 가운데 말기암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활동을 하는 등 각종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왔다고 한다. 권 후보가 국회의원이 된 뒤 의정활동을 돕느라 바빠지면서 호스피스 봉사는 그만두게 됐지만,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된 뒤에는 당원 자격으로 여성위원회 등에서 봉사활동을 계속했다고. 특히 여성과 소외 계층 가정의 어린이를 위해 다양한 봉사를 하며 권 후보와 ‘동지’의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남편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고 저 또한 최선을 다해 함께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음 아픈 일을 겪은 적도 있어요. 지난 96년 12월 국회에서 노동법이 ‘날치기’로 통과됐을 때죠. 큰딸 혜원이가 바로 그 무렵 결혼을 하게 돼 있었는데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이던 남편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느라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거든요. 바깥사돈 되실 분이 병석에 계셔서 결혼을 미룰 수도 없었고요. 결국 강원도 춘천에서 열린 결혼식에 저 혼자 참석했고, 딸은 사위와 손을 잡고 나란히 입장했어요.”
딸 부부는 결혼식을 마친 다음 권 후보가 농성 중이던 명동성당을 방문하고, 병원에 입원 중인 시아버지에게 문안인사를 하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했다고 한다. 그때 결혼한 딸 혜원씨(38)는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코넬대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며 장남 호근씨(37)는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파리에서 건축학을 공부해 현지 회사에 다니고 있다. 차남 성근씨(35)는 서강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조인스닷컴에 근무 중이라고 한다.
“저는 남편과 함께 살아온 지난 39년이 늘 자랑스러워요. 남편은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한결같은 사람이고,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를 겪으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일관되게 추구해온 사람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권 후보가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희망의 증거’라고들 합니다. 노동자, 농민, 서민이 행복해지는 날까지 저도 남편과 함께 노력해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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