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일들은 지난 여름에 시작됐다. 맨 처음 나에게 찾아온 일은 손목뼈 부러짐이었다. 길을 건너다 넘어졌는데, 누군가의 권유에 따라 별 생각 없이 사진을 찍어봤다. 그런데 그 결과는 상상도 하지 않은 일로 나타났다. 어이없이도 뼈가 부러졌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난 여름 그 일이 일어난 시점은 하필 여행을 떠나기로 한 며칠 전이었다. 비자 발급까지 다 끝난 상태였다. 몇 년 전부터 가려고 한 곳이었다. 이번에는 꼭 가야 하는데…. 하긴 그런 심정적 이유 말고도 현실적으로 내가 가야 할 이유가 여럿 있었다. 내가 안 가면 몇 사람이 나로 인해 못 갈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 또 긴히 약속한 일이 어그러지고 마는 묘한 상황이었다. 뼈에 핀을 넣는 수술을 하고 가면 갈 수 있다고 지인이 설득 작전에 나섰다. 여행을 포기했다, 말았다 하다가 결국 그렇게 해서라도 가기로 했다. 입원해 수술을 했다. 깁스를 단단히 하고 퇴원하는 길로 비행기를 탔다. 정말 불안한 여행길이었다.
“하필이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그러고는 부정이 버릇인 나는 또 얼른 그 부정을 당연히 긍정하듯이 “그 길만 안 갔더라면…” 하고 입원실에서 밤새도록 중얼거렸다. “정말 재수도 없지, 하필 방학 시작 때 그러다니…” 그러다 ‘옛날 뇌수술을 했을 때 중환자실 침대 위에 팔다리를 묶인 채 누워 중얼거리던 말을 지금도 중얼거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도 정말 ‘하필’이었다. “서른 살밖에 안 된 내가 하필 이런 중병에 걸리다니…. 뇌동맥정맥기형이라니, 핏줄이 터지다니…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니… 이제 마악 무언가 하려고 하는데….” 정말 억울하고 억울했다. 그때는 머리에 온통 붕대를 감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날은 팔에 깁스를 하고 그 비슷한 심정을 느껴야 했다.
어찌어찌 그 꿈같은 여행에서 돌아오게 됐다. 그러나 한여름 깁스의 현실은 나를 점점 더 아프게 일깨웠다. 병원에 가느라 아파트를 나서면 미화원 아줌마들이 아주 딱한 얼굴을 하며 “이사 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일이…, 이 더운 여름에 정말 고생하시네요” 하고,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도 “땀띠 안 났어요?” 하며 물건을 올려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방학이 끝날 때쯤엔 핀 뽑는 수술을 다시 한 번 하느라 입원을 또 하고, 이래저래 생각지 않은 돈도 꽤 들었다. 두 번째 입원했을 때는 밤에 울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하필 나에게….’
팔 깁스 푼 다음날 발가락 부러져 깁스
그러나 아무튼 팔 깁스를 풀었다. 추석 며칠 전이었다. 드디어 목욕도 마음대로 하게 됐다. 나는 선반장을 열어 빈 통 하나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선반이 밑으로 떨어지면서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리고 쏟아진 통들 가운데 강화 유리로 된 것 하나가 발가락을 세게 내리쳤다. 얼른 선반을 똑바로 하고 다시 물건들을 넣었다. 그런데 발가락이 몹시 아팠다. 그리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자주색으로 변하고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그 색깔이며 모양이 심상치 않았으나, ‘발가락 따위야’ 하는 생각으로 학교에 강의도 하러 갔다. 그런데 올 때는 너무 아파서 연구실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 올 수밖에 없었다. 마침 추석 연휴, 시집간 딸 식구들이 왔다. 현관을 들어서는 사위의 눈이 커다래지면서, “어머니, 그걸 그리 두다니요!?” 하고 놀랐다. 한밤중임에도 딸과 사위는 나를 끌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갔다. 병원에서 또 사진을 찍었다. 담당 레지던트는 “부러졌어요” 했다. “네?” “부러졌어요.” “아니 또?!”
나와 딸, 사위의 목소리는 동시에 천장으로 올라갔다.
“발가락에 깁스를 해야겠군요. 며칠 입원하고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이렇게 피가 고여 있으면 발가락의 세포들이 괴사할 수도 있어요.”
그러고는 마취를 하고, 발톱을 뺐다. 나는 도저히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위가 말했다.
“팔 깁스를 어제 푸셨는데요….”
우리는 모두 입원실로 올라갔다. 딸과 사위가 돌아간 다음, 혼자 입원실에 있으려니 또 눈물이 났다. 왜 이리 재수가 없을까. 아, 정말 이사를 잘못 간 걸까. 온통 부정적인 것, ‘하필’ 투성이었다. 발을 다치던 날 붕어 한 마리가 죽었지. 붕어의 죽음도 부정과 연결됐다.
어찌어찌 퇴원을 하고 슬리퍼를 끌고 학교에 가자 어느 선생님인가 말했다.
“거, 이사를 잘못 가신 것 아닙니까? 그 집 문제 있는 것 아니에요? 선반이 그럴 수가 있어요? 그거 보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의 부정적인 버릇은 곧 새로 이사 온 집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마침 집에 들른 관리기사가 온 발등을 붕대로 친친 감은 나의 모습을 봤고, 나는 선반 이야기를 했다. 그가 또 “얼마 전에 팔 깁스를 푸시지 않았어요?” 하는 바람에 신경질처럼 언성을 높여 말하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의 부실공사에 의한 선반사고로 제가 다쳤으니까 이것도 요즘은 소비자 보호법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그러던데요? 소송을 할 수도 있다는데요?!”
그러자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야단이 났다. 소송이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관리기사가 와서 사정을 한다, 어쩐다 집이 온통 시끄러워졌다. 누군가는 “삼재가 들어서 그렇습니다. 이제 이걸로 액땜하신 겁니다. 다행이에요, 이 정도로 끝내게 된 것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했다.
나는 ‘하필 하필’ 하다가 아니 ‘하마터면’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하긴 그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척추뼈라도 부러졌으면 어쩔 뻔했어. 그리고 이 집에 이사 올 수 없었어봐, 어쩔 뻔했어. 살던 집은 이미 팔려버렸는데….’
그러다 보니, 올해가 삼재가 들어오는 해인지, 나가는 해인지까지 걱정이 됐다. 올해가 만약 삼재가 ‘들어오는’ 거라면 앞으로 2년 동안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앞으로 더 나쁜 일이 있을지 어떨지 ‘애절하게’ 묻는 나에게 잘 아는 딸의 친구가 얼른 대답했다. “삼재는 띠를 갖고 말하는 것인데, 모든 닭띠가 다 나쁘다는 게 지금 시대에 말이 돼요? ‘넘어지셨으니’ 뼈가 부러졌고, 선반이 떨어졌으니 또 그랬죠. 부주의하신 탓도 있고요. 교수님이 ‘이상한’ 걱정을 다 하시네요” 하고 나무라듯 말했다.
긍정과 부정은 형제, 부정이 있는 긍정은 무한 생성의 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런데 그러자,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다행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또 ‘뇌동맥정맥 기형의 때’로까지 내 ‘하마터면’이 굴러갔다. ‘그때 식물인간이라도 됐어봐, 다 그렇게 된다고 했잖아. 그때 그랬으면 지금 어떻게 강의를 하겠어…?’
그날 이후 고요해진 마음으로 새벽이면 차를 들고 앉아 해 떠오르는 모습을 기다리면서 나는 ‘긍정의 힘’을 진하게 깨닫는다. 그러면서 긍정과 부정은 아래위 층 한집에 산다는 생각도 한다. 긍정과 부정은 실은 형제라고. ‘부정이 있는 긍정이야말로 무한 생성의 힘이며, 긍정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하는 내 시 한 구절처럼. “긍정의 힘은 참 세구나”라고 새삼 중얼거리면서.
나는 나의 ‘가을’이라는 시를 이렇게 패러디해본다. “부정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긍정과 둘이 살고 있었네/ 부정이 집을 비울 때는 긍정이 집을 지킨다고 했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들어오게, 그대의 집으로”.
“하필이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그러고는 부정이 버릇인 나는 또 얼른 그 부정을 당연히 긍정하듯이 “그 길만 안 갔더라면…” 하고 입원실에서 밤새도록 중얼거렸다. “정말 재수도 없지, 하필 방학 시작 때 그러다니…” 그러다 ‘옛날 뇌수술을 했을 때 중환자실 침대 위에 팔다리를 묶인 채 누워 중얼거리던 말을 지금도 중얼거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도 정말 ‘하필’이었다. “서른 살밖에 안 된 내가 하필 이런 중병에 걸리다니…. 뇌동맥정맥기형이라니, 핏줄이 터지다니…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니… 이제 마악 무언가 하려고 하는데….” 정말 억울하고 억울했다. 그때는 머리에 온통 붕대를 감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날은 팔에 깁스를 하고 그 비슷한 심정을 느껴야 했다.
어찌어찌 그 꿈같은 여행에서 돌아오게 됐다. 그러나 한여름 깁스의 현실은 나를 점점 더 아프게 일깨웠다. 병원에 가느라 아파트를 나서면 미화원 아줌마들이 아주 딱한 얼굴을 하며 “이사 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일이…, 이 더운 여름에 정말 고생하시네요” 하고,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도 “땀띠 안 났어요?” 하며 물건을 올려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방학이 끝날 때쯤엔 핀 뽑는 수술을 다시 한 번 하느라 입원을 또 하고, 이래저래 생각지 않은 돈도 꽤 들었다. 두 번째 입원했을 때는 밤에 울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하필 나에게….’
팔 깁스 푼 다음날 발가락 부러져 깁스
그러나 아무튼 팔 깁스를 풀었다. 추석 며칠 전이었다. 드디어 목욕도 마음대로 하게 됐다. 나는 선반장을 열어 빈 통 하나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선반이 밑으로 떨어지면서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리고 쏟아진 통들 가운데 강화 유리로 된 것 하나가 발가락을 세게 내리쳤다. 얼른 선반을 똑바로 하고 다시 물건들을 넣었다. 그런데 발가락이 몹시 아팠다. 그리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자주색으로 변하고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그 색깔이며 모양이 심상치 않았으나, ‘발가락 따위야’ 하는 생각으로 학교에 강의도 하러 갔다. 그런데 올 때는 너무 아파서 연구실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 올 수밖에 없었다. 마침 추석 연휴, 시집간 딸 식구들이 왔다. 현관을 들어서는 사위의 눈이 커다래지면서, “어머니, 그걸 그리 두다니요!?” 하고 놀랐다. 한밤중임에도 딸과 사위는 나를 끌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갔다. 병원에서 또 사진을 찍었다. 담당 레지던트는 “부러졌어요” 했다. “네?” “부러졌어요.” “아니 또?!”
나와 딸, 사위의 목소리는 동시에 천장으로 올라갔다.
“발가락에 깁스를 해야겠군요. 며칠 입원하고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이렇게 피가 고여 있으면 발가락의 세포들이 괴사할 수도 있어요.”
그러고는 마취를 하고, 발톱을 뺐다. 나는 도저히 사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위가 말했다.
“팔 깁스를 어제 푸셨는데요….”
우리는 모두 입원실로 올라갔다. 딸과 사위가 돌아간 다음, 혼자 입원실에 있으려니 또 눈물이 났다. 왜 이리 재수가 없을까. 아, 정말 이사를 잘못 간 걸까. 온통 부정적인 것, ‘하필’ 투성이었다. 발을 다치던 날 붕어 한 마리가 죽었지. 붕어의 죽음도 부정과 연결됐다.
어찌어찌 퇴원을 하고 슬리퍼를 끌고 학교에 가자 어느 선생님인가 말했다.
“거, 이사를 잘못 가신 것 아닙니까? 그 집 문제 있는 것 아니에요? 선반이 그럴 수가 있어요? 그거 보상이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의 부정적인 버릇은 곧 새로 이사 온 집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마침 집에 들른 관리기사가 온 발등을 붕대로 친친 감은 나의 모습을 봤고, 나는 선반 이야기를 했다. 그가 또 “얼마 전에 팔 깁스를 푸시지 않았어요?” 하는 바람에 신경질처럼 언성을 높여 말하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의 부실공사에 의한 선반사고로 제가 다쳤으니까 이것도 요즘은 소비자 보호법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그러던데요? 소송을 할 수도 있다는데요?!”
그러자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야단이 났다. 소송이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관리기사가 와서 사정을 한다, 어쩐다 집이 온통 시끄러워졌다. 누군가는 “삼재가 들어서 그렇습니다. 이제 이걸로 액땜하신 겁니다. 다행이에요, 이 정도로 끝내게 된 것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했다.
나는 ‘하필 하필’ 하다가 아니 ‘하마터면’이지, 하고 중얼거렸다. ‘하긴 그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척추뼈라도 부러졌으면 어쩔 뻔했어. 그리고 이 집에 이사 올 수 없었어봐, 어쩔 뻔했어. 살던 집은 이미 팔려버렸는데….’
그러다 보니, 올해가 삼재가 들어오는 해인지, 나가는 해인지까지 걱정이 됐다. 올해가 만약 삼재가 ‘들어오는’ 거라면 앞으로 2년 동안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때였다. 앞으로 더 나쁜 일이 있을지 어떨지 ‘애절하게’ 묻는 나에게 잘 아는 딸의 친구가 얼른 대답했다. “삼재는 띠를 갖고 말하는 것인데, 모든 닭띠가 다 나쁘다는 게 지금 시대에 말이 돼요? ‘넘어지셨으니’ 뼈가 부러졌고, 선반이 떨어졌으니 또 그랬죠. 부주의하신 탓도 있고요. 교수님이 ‘이상한’ 걱정을 다 하시네요” 하고 나무라듯 말했다.
긍정과 부정은 형제, 부정이 있는 긍정은 무한 생성의 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런데 그러자,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다행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또 ‘뇌동맥정맥 기형의 때’로까지 내 ‘하마터면’이 굴러갔다. ‘그때 식물인간이라도 됐어봐, 다 그렇게 된다고 했잖아. 그때 그랬으면 지금 어떻게 강의를 하겠어…?’
그날 이후 고요해진 마음으로 새벽이면 차를 들고 앉아 해 떠오르는 모습을 기다리면서 나는 ‘긍정의 힘’을 진하게 깨닫는다. 그러면서 긍정과 부정은 아래위 층 한집에 산다는 생각도 한다. 긍정과 부정은 실은 형제라고. ‘부정이 있는 긍정이야말로 무한 생성의 힘이며, 긍정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이다’라고.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하는 내 시 한 구절처럼. “긍정의 힘은 참 세구나”라고 새삼 중얼거리면서.
나는 나의 ‘가을’이라는 시를 이렇게 패러디해본다. “부정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긍정과 둘이 살고 있었네/ 부정이 집을 비울 때는 긍정이 집을 지킨다고 했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들어오게, 그대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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