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내 본래의 인격으로는 불가능한 말들을 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내 본래의 인격이란 어떤 사람이나 일에 앞서 부정적으로 기운부터 꺾어놓는 일이다.
내가 별 걱정 없이 좋은 팔자로 운 좋게 살아갈 적에는 더욱 그랬다. 언제부턴가 내 힘으로 일어서야 하고 내가 아니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절망감으로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부터 나는 내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무기가 긍정의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깨쳤다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늘 현실이란 스승의 힘을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맵시 없게 ‘그래가지고 되겠니?’라든가 ‘그런 건 아예 생각지도 마!’라고 단정을 짓는다든가 ‘그걸 말이라고 하니?’라고 쏘아붙이는 것이 나였고, 그건 그냥 처음부터 뻔한 것으로 치부하는 말을 하지 않고는 못 참던 시절이 있었다. ‘너는 거의 틀렸다니까, 알아!’ 식으로 무식하고 천하기까지한 나의 부정적 냉담은 어느 순간에 노력의 한 가지 테마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했을 때 결과는 더 부정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왜 그런 쉬운 것을 사람들은 늦게야 깨닫는지…. 철학이나 명상 종교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는 인간의 무능함을 알면 알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무능한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인간은 긍정의 힘만 있으면 사실 어떤 일에도 두려움보다는 도전의식을 가지게 된다.
잘 보이지도 않는 긍정의 말은 쉽게 마음속을 메우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은 절망과 나락의 절벽뿐인데 긍정의 힘이 솟아나겠는가. 그러나 이를 악물고 밥 먹듯 해보면 저절로 부정의 비극은 긍정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을 나는 안다.
세끼 밥 먹듯 긍정, 긍정, 긍정하며 걸어가면 어느새 긍정의 배가 부를 것이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니?’ ‘우리 그렇게 해보도록 하자’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등의 긍정적인 생각과 말에 길들여지면 전에 없던 편안함과 여유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어려울수록 필요한 ‘그래, 그게 좋겠다’ 정신
사랑이란 한 사람의 본질에 대한 열정적인 긍정이며 적극적인 교섭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긍정과 부정은 늘 내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참담한 상처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은 결국 상대방의 평화와 행복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내 막내는 나의 부정적인 발언에 대해 치명적으로 생각한다. 가령 나는 식사준비를 하면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야단을 맞는다.
“이 생선 조금 남은 거 오늘 먹어치우자. 상하겠다.”
우리 어머니가 했던 말이고, 우리 언니도 했던 말이다. 내 입에서도 저절로 나오는 말이다. 근데 완전 신식인 내 막내는 ‘맛있게 먹자’고 하면 될텐데 ‘먹어치우자’는 건 무슨 말이며 ‘상할 거’라는 말은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맞다. 맞다. 맞다. 정말 잘났다. 듣고 보면 맞는 말이 아닌가. 나는 이런 막내의 훈시를 들을 때마다 돈 주고 공부시킨 것이 그다지 손해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말버릇. 이것은 어쩌면 내 숙명적 그늘인지 모른다. 막내는 나를 교수며 시인이라면서 말도 제대로 못한다고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부정적 말속에도 긍정의 따뜻함이 있다는 것을, 뜨거운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 아이가 알지 모르겠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시절 집에 늦게 돌아오면 나를 나무라면서 늘 ‘오늘 또 늦어라’ 하고 역설적인 당부를 하셨다. 부정 속에도 긍정이 있다
그러나 긍정은 길들여야 한다. 행복도 길들여야 하듯이. 그러므로 긍정은 새로운 종교이며 이 시대에 필요한 종교다.
내가 별 걱정 없이 좋은 팔자로 운 좋게 살아갈 적에는 더욱 그랬다. 언제부턴가 내 힘으로 일어서야 하고 내가 아니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절망감으로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부터 나는 내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무기가 긍정의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깨쳤다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늘 현실이란 스승의 힘을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맵시 없게 ‘그래가지고 되겠니?’라든가 ‘그런 건 아예 생각지도 마!’라고 단정을 짓는다든가 ‘그걸 말이라고 하니?’라고 쏘아붙이는 것이 나였고, 그건 그냥 처음부터 뻔한 것으로 치부하는 말을 하지 않고는 못 참던 시절이 있었다. ‘너는 거의 틀렸다니까, 알아!’ 식으로 무식하고 천하기까지한 나의 부정적 냉담은 어느 순간에 노력의 한 가지 테마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정적으로 말했을 때 결과는 더 부정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왜 그런 쉬운 것을 사람들은 늦게야 깨닫는지…. 철학이나 명상 종교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는 인간의 무능함을 알면 알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무능한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인간은 긍정의 힘만 있으면 사실 어떤 일에도 두려움보다는 도전의식을 가지게 된다.
잘 보이지도 않는 긍정의 말은 쉽게 마음속을 메우는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은 절망과 나락의 절벽뿐인데 긍정의 힘이 솟아나겠는가. 그러나 이를 악물고 밥 먹듯 해보면 저절로 부정의 비극은 긍정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을 나는 안다.
세끼 밥 먹듯 긍정, 긍정, 긍정하며 걸어가면 어느새 긍정의 배가 부를 것이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니?’ ‘우리 그렇게 해보도록 하자’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등의 긍정적인 생각과 말에 길들여지면 전에 없던 편안함과 여유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어려울수록 필요한 ‘그래, 그게 좋겠다’ 정신
사랑이란 한 사람의 본질에 대한 열정적인 긍정이며 적극적인 교섭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긍정과 부정은 늘 내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참담한 상처를 받기도 하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은 결국 상대방의 평화와 행복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내 막내는 나의 부정적인 발언에 대해 치명적으로 생각한다. 가령 나는 식사준비를 하면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야단을 맞는다.
“이 생선 조금 남은 거 오늘 먹어치우자. 상하겠다.”
우리 어머니가 했던 말이고, 우리 언니도 했던 말이다. 내 입에서도 저절로 나오는 말이다. 근데 완전 신식인 내 막내는 ‘맛있게 먹자’고 하면 될텐데 ‘먹어치우자’는 건 무슨 말이며 ‘상할 거’라는 말은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맞다. 맞다. 맞다. 정말 잘났다. 듣고 보면 맞는 말이 아닌가. 나는 이런 막내의 훈시를 들을 때마다 돈 주고 공부시킨 것이 그다지 손해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말버릇. 이것은 어쩌면 내 숙명적 그늘인지 모른다. 막내는 나를 교수며 시인이라면서 말도 제대로 못한다고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부정적 말속에도 긍정의 따뜻함이 있다는 것을, 뜨거운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 아이가 알지 모르겠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시절 집에 늦게 돌아오면 나를 나무라면서 늘 ‘오늘 또 늦어라’ 하고 역설적인 당부를 하셨다. 부정 속에도 긍정이 있다
그러나 긍정은 길들여야 한다. 행복도 길들여야 하듯이. 그러므로 긍정은 새로운 종교이며 이 시대에 필요한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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