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잡지 기자로 일하던 구완회씨(37)는 4년 전인 2003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휴가를 보내며 일출사진을 찍던 중 미친개 세 마리로부터 사정없이 허벅지를 물어뜯겼다.
“광견병은 발병하면 72시간 내에 사망한대요. 예방 백신을 맞으러 병원을 찾아 헤맸어요. 영어가 잘 안 통하는 나라라 엄청나게 고생했죠. 백신을 다섯 번 맞아야 되는데, 세 번 맞고 나니까 그 병원에서 ‘No Problem’이라며 더 이상 주사를 놓아주지 않더라고요.”
개에 물리고 열흘 뒤, 서울의 한 병원에서 그가 들은 말은 “발병할 경우 치사율이 100%”라는 것. 백신을 맞아도 잠복기간이 길어서 6개월 이내에 발병할 확률이 높고 20년 후에 발병한 기록도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스탄불에서 맞던 백신이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것. 서로 다른 백신을 맞으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고 항체가 형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에 그는 “생전 처음으로 기사 마감이 걱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6개월 뒤의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 그는 머릿속으로 “이 순간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자문한 끝에 세계여행과 결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여행다운 여행을 하지 못해 늘 아쉬웠고, 마침 그전에 세계일주 특집기사를 진행하면서 더욱 소망하던 터였다. 그는 6년간 사귀던 여자친구한테 청혼했다고 한다. “6개월 뒤에도 내가 살아 있다면 결혼하자. 그리고 신혼여행으로 1년 반쯤 세계일주를 하자.”
간호사인 박진영씨(37)는 구씨의 청혼을 “참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혹시 죽을지도 모르는데 망설여지지 않냐’고 물어보는 친구도 있었지만 보균자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또 우리는 모두가 많은 균을 가지고 살잖아요(웃음). 여행 가자니까 좋아서 결혼했어요.”
그렇게 둘은 2005년 5월 결혼하고, 6월14일 베이징행 비행기에 올랐다. 둘 다 ‘대책 없이’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떠난 신혼여행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황금 같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오직 그것에만 몰두한 채.
여행은 ‘이렇게 한 바퀴 돌고, 저렇게 한 바퀴 돌자’는 식으로 ‘헐렁하게’ 계획했다고 한다. 어차피 현지에서 직접 부딪치는 게 가장 중요하고 정보도 정확함을 아는 까닭이었다. 중국 태국 호주 영국 프랑스 스페인 멕시코 미국 이스라엘 등 세계 40여 개국을 얽매이지 않고 쉬엄쉬엄 다닐 요량이었다. 그 와중에 태국 푸껫에서의 스쿠버다이빙 강습과 과테말라 산페드로에서의 스페인어 개인교습만큼은 열정을 쏟아 몰두했던,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꼽는다. 여행이 심드렁해질 즈음, 두 사람은 거금 수십만원을 들여 초급 다이버 과정에 등록했다고 한다. 5일간의 밀착 교육을 끝내고 세계 각국에서 온 수십 명의 다이버들과 함께한 다이빙 첫날, 경력 수십 년의 선장도 딱 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는 고래상어를 이 초심자 부부가 목격하는 통에 선상에서는 온통 고래상어 이야기로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아내 박씨는 “영화 ‘니모를 찾아서’의 주인공 아네모네피시가 내 물안경을 입으로 콕콕 찍는 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이빙할 때는 항상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데, 남편과 손잡고 있는 게 좋았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또바 호수 앞에 나란히 앉은 구완회씨 부부.(좌) 태국 치앙마이에서 타잔처럼 줄을 잡고 강을 건너는 박진영씨.(우)
6년 동안 연애 하면서도 몰랐던 서로의 많은 면을 알게 해준 의미 있는 시간
부부가 스페인어를 배운 건 순전히 영어가 통하지 않는 중남미에서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한다. 과테말라 산페드로에서 일주일간 개인 교습을 받으며 때늦은 학업에 몰두한 결과 ‘물 주세요’ ‘깎아주세요’ ‘감사합니다’ ‘버스 언제 떠나요?’ 같은 표현이 가능했다고.
이렇듯 매순간이 재미있었다지만, 여행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결혼과 여행이라는 낯선 두 가지를 한꺼번에 겪으면서 한동안은 많이 싸웠어요. 처음에는 아내가 몸이 아픈데 내가 딴짓을 한다든지 하는 걸로 싸우다가 나중에는 치졸하게 주스를 사느냐 우유를 사느냐로 티격태격하기도 했죠. 그러다 서로 익숙해지면서 싸우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라고요.”
아내 박씨는 6년이나 연애를 했음에도 서로 모르는 게 참 많아서 놀랐다고 한다.
“24시간 내내 붙어 있잖아요. 그동안 서로한테 잘 안 보여주던 면도 다 알게 되니까 때론 실망도 했죠. 결혼한 지가 2년 3개월 됐는데, 한 10년은 산 부부 같아요.”
부부라서 남들 보기에 안전해 보이는지 많은 사람이 인사를 건네 왔다고 한다. 남미에서 만났던 오스트리아 친구는 이들이 오스트리아 갔을 때 연락을 해서 만났고, 프랑스에서 온 스테판 부부는 태국 치앙마이 고산마을 트레킹에서 보고 10개월 뒤 멕시코시티 거리에서 또 만났다고 한다.
“반가워서 넷이서 얼싸안고 난리도 아니었어요(웃음). 10년 동거 기념으로 결혼하고 결혼 1주년 기념으로 세계여행하는 재미있는 부부였어요.”
또 이집트에서는 로또에 당첨돼서 세계일주하는 부산 청년을 만났다고 한다. 구씨는 그 청년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만났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여행 다니다 보면 이런 희한한 일이 생겨요. 프랑스 친구를 멕시코시티에서 본다는 건 로또 당첨에 버금갈 확률이에요. 인구가 2천만인 그 대도시에서 만난다는 게…. 그러고 보면 로또도 꿈만은 아닐 듯해요(웃음).”
부부는 예정보다 2개월 늦은 지난 2월 집으로 돌아왔다. 남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줄 알지만 제대로 말하자면 어머니네 집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얹혀살고 있다. 1년 8개월 동안, 여행 경비로 4천3백만원을 썼지만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과 새로운 에너지를 얻었다는 게 이 부부의 설명이다.
“똑같은 일을 해도 행복을 느끼는 강도가 달라져요. 여행을 다녀오기 전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일상들이 즐겁고, 고맙고…. 날씨가 좋거나 길거리 음식 하나가 맛있거나 아내한테 칭찬받거나 하는 아주 작은 일 하나에도 큰 감동을 느끼죠.”
이 부부는 색다른 신혼여행의 경험을 엮어 최근 ‘크레이지 허니문 604’라는 책을 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둘 다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고 한다. 박씨는 한 구청의 노인치매지원센터에서, 구씨는 전에 일하던 곳에서 여행 관련 단행본 업무를 하고 있다. 구씨 말대로 “서울은 속도가 너무 빨라서” 마음과는 달리 다시 바빠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지만 이 부부는 “바쁘게 살지 않으려고” 한다.
“즐겁게 일하고 싶어요. 생각이 바뀌니까 모든 일이 어렵게 여겨지지 않아요. 한 10년쯤 후에는 아이들이랑 함께 다시 세계일주를 떠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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