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 냄새! 엄마, 얘 똥 쌌어!” 세 살 배기 막내 호연이는 아직 기저귀를 못 뗐다. 셋째 승리(12)와 넷째 진리(9)가 기저귀 치우는 일을 서로에게 떠밀기 시작한다. 승리의 입에서 또 불만이 터진다.
“엄마! 나 얘 싫어! 귀찮아 죽겠어!”
호연이가 이 집 막내로 합류한 것은 두 달 전. 승리·진리 형제와 마찬가지로 호연이도 엄마 김신혜씨(51)가 수양부모협회를 통해 위탁부모(공식적으로 부모가 바뀌는 입양과 달리 19세까지만 아이를 맡아 길러주는 일을 한다. 친부모가 원하면 아이를 되돌려 보내야 한다) 자격으로 데려온 아이다. 다 알아듣는 것 같긴 한데 아직 말을 잘하진 못한다.
“여기 오기 전에 여든 되신 할머니 손에서 컸거든요. 그 때문인지 나이에 비해 언어발달이 좀 더딘 것 같아요.”
올 봄 중학교 3학년이 되는 둘째 하연이(16)도 그랬었다. 보육원에서 자라 여섯 살에 김씨에게 입양되었을 때 하연이는 또래에 비해 사회성이 많이 뒤떨어지는 아이였다.
“여섯 살짜리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는데 네 살짜리와도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이 안 끼워주면, 하연이는 욕하고 때리면서 접근했죠. 아이들의 따돌림은 더 심해졌고요.”
하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큰아들 상연이(21)를 낳고 남편 유영선씨(52)와 “둘째부터는 입양해서 키우자”고 약속했지만 하연이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 더 이상 아이를 입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학년이 올라가도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둘째 아이를 보면서 김씨는 결단을 내렸다. 지난 2002년 운영하던 피아노 학원을 정리하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횡성의 산골 마을로 둘째 하연이만 데리고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당시 고3이던 큰아들을 생각해서 좀 기다리라고 충고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역시 농사의 ‘농’자도 모르면서 무슨 시골 생활이냐고 마땅찮아했다. 하지만 김씨로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갈수록 심각하게 비뚤어지는 둘째 아들 걱정에 한시가 급했다. 학교에서 따돌림당하고 놀림받으며 폭력을 휘둘러대던 아이는 어느새 도벽까지 생겼고 식구들 사이의 불화도 커갔다.
“하연이가 잘못되면 가족 모두가 계속 힘들어진다면서, 하연이를 잘 키우는 게 최선이라고 식구들을 설득했어요.”
아이를 데리고 도시를 떠나야겠다고 결심을 한 데는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가 큰 힘이 됐다. 가족들로부터 냉대와 멸시, 심한 매질을 받으며 자라지만 오렌지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며 우정을 쌓고, 행복을 느끼는 소설의 주인공 ‘제제’처럼 하연이도 자연 속에서 다정한 친구를 만날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면서 이삿짐을 쌌다.
그는 월드컵 열기가 한창 무르익던 2002년 봄 횡성으로 이사와 방 하나, 부엌 하나 딸린 작은 집에 세 들었다. 작고 초라한 집이었지만 사방으로 논밭과 푸른 숲이 넉넉하게 펼쳐진 곳이었다.
학습부진, 왕따로 시달리던 둘째 아들 자연 속에서 희망 찾아
아이가 다니게 된 덕고초등학교는 전교생이 딱 13명. 동화 속에서 봤음직한 예쁘고 자그마한 학교에서 교사라기보다 부모 같은 선생님들이 아이들 하나하나에 맞는 수준별 교육을 하고 있었다. 전교생이 골프 레슨을 비롯해 다양한 특별활동을 할 수 있어 운동을 좋아하는 하연이에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여기는 돈이 있어도 쓸 데가 없는 곳이에요. 이제는 하연이도 주변에 굴러다니는 돈조차 보는 둥 마는 둥 하지요.”
김신혜씨는 보통 아이들보다 어렵게 출발한 아이들이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왼쪽부터 진리, 하연, 김신혜씨, 효연, 승리.
이듬해 2003년 봄, 온 천지가 연초록빛으로 변할 즈음 산자락에 예쁘고 널찍한 집을 지었다. 이때 승리와 진리 형제를 데려와 식구 수도 늘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해보는 농사일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궁리 끝에 시작한 게 감자떡 만드는 일. 의외로 재미가 쏠쏠했다. 서울 사는 지인들에게 택배를 통해 판매했는데 제법 잘 팔렸다. 아이들 돌보는 것도 뒷전으로 돌리고 정신없이 감자떡 사업에 몰두한 지 1년.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앞이 안 보였다.
3개월간 서울에 있는 병원을 다니며 녹내장 치료를 받았지만 안압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무것도 안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겨우 희뿌옇게 형체를 알아볼 정도였다. 아이들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감싸안은 채 “하나님, 우리 엄마 눈뜨게 해 주세요” 하고 울며 기도하는 아이들을 끌어안고는 ‘이 아이들을 진정한 사랑으로 품었는지’ 가슴 깊이 반성했다.
“하연이 때문에 상담을 많이 다녔는데 그때 ‘아이라는 그릇에 물이 차서 넘칠 때까지 한없이 애정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데 제 인내심이 ‘넘치는 정도’까진 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사랑을 나누기 위해 아이들을 입양했지만 사랑은 쉼없는 훈련과 연습을 통해 열심히 쌓아가야 한다는 걸 잊은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
비록 눈이 안 보여 불편했지만 아이들과는 뜨거운 사랑으로 맺어지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엄마가 감자떡 만들기에 여념이 없을 동안 컴퓨터 게임에만 달라붙어 있던 아이들이 엄마와 노래하고 춤추며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춤추고 노래할 때 이게 바로 천국이라고 느낄 만큼 행복했습니다.”
그해 성탄절 처음으로 아이들은 교회 무대에서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다음 해인 2005년 1월에는 홍천에 있는 군부대로 위문 공연을 가기도 했다. 성악과에 진학한 큰아들 상연이와 남편까지 합세하니 무대가 열기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열다섯 살에 키가 175cm나 되는 둘째 하연이는 수화로 노래를 불렀고 넷째 진리의 독창 ‘어메이징 그레이스’에 이어 네 아들과 부부가 돌림노래를 합창하며 공연을 마무리했다.
추운 겨울이 지나갈 무렵 수술이 무사히 이루어졌다. 안압은 높았지만 다행히 시신경은 손상되지 않았고, 전보다 조금 나빠지긴 했지만 시력도 회복할 수 있었다.
김씨 가족은 한 달에 한두 차례씩 고아원, 양로원 등지를 돌며 춤과 노래를 통해 소외된 이웃들을 만난다.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핏줄이 아니라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당당하게 밝힌다.
“자존감이 낮았던 아이들이 의욕적으로 변했습니다. 세상에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으로 위축돼 있었는데 자신들도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거죠.”
지난해에는 또 네 아들과 함께 소록도 애양원 나환자촌에 공연을 다녀왔다. 하연이가 말썽을 부려 가슴앓이가 심하던 6년 전, 막막한 심정에 단둘이서 일주일 동안 봉사 갔던 곳이다. 처음에는 무섭다고 피하다가 나중에는 환자들 손톱까지 깎아주며 어울렸던 아이는 이제 중학 체육특기생으로 장학금을 받는 횡성군 대표 장거리 육상선수로 컸다.
산골 마을에 해가 지고 산자락이 어둠에 잠길 때면 하연이, 승리, 진리, 그리고 얼마 전 가족합창단의 새 일원이 된 막내 호연이는 노래와 춤 연습으로 호흡을 맞추며 하루를 마감한다. 자신들의 손으로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길 꿈꾸면서.
“물이 한 길로만 흐를 때는 힘이 없지만 절벽을 만나면 폭포수가 돼 모터를 돌릴 수도 있습니다. 보통의 다른 아이들보다 어렵게 출발한 우리 아이들이 더 많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그렇게 될 거라 믿고, 항상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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