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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느림의 미학

“빠른 시대일수록 정도(正道) 걸어야 성공” 주장하는 앵커 김은혜

글·강지남 기자 / 사진·홍중식 기자|| ■ 의상협찬·ATTITUDE ■ 메이크업·이상희 ■ 헤어·김정숙

2006. 01. 10

앵커 김은혜가 모든 게 빠르게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느려야 성공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을 펴냈다. MBC의 아침뉴스 앵커로 활약하면서도 “언제나 현장을 뛰는 기자이고 싶다”는 그를 만났다.

“빠른 시대일수록 정도(正道) 걸어야 성공” 주장하는 앵커 김은혜

김은혜 앵커는 새로 출간한 책에서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 LG전자 회장 등 CEO들의 아날로그 성공 전략을 소개했다.


지난 99년 MBC ‘뉴스데스크’ 진행을 맡아 ‘최초의 기자 출신 여성 앵커’란 수식어를 얻은 김은혜(35). 2001년 가을 미국 스탠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잠깐의 공백기를 가진 그는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와 경제부 기자, 마감뉴스 앵커로 활약하다 현재는 매일 오전 6시 방송되는 ‘뉴스투데이’ 앵커를 맡고 있다.
2년 가까이 새벽 2시30분에 일어나고 낮 시간을 쪼개 틈틈이 잠을 청하는 부엉이 생활하고 있는 그가 ‘디지털로 생각하고 아날로그로 행동하라’(가제)는 다소 ‘특이한’ 메시지를 전하는 책을 펴냈다.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일수록 느리더라도 정도(正道)를 걸어야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 미국에 머물며 만난 세계적인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과 우리나라 유수 기업의 CEO들을 인터뷰하면서 목격한 그들만의 ‘아날로그적 성공비법’이 풍부한 사례로 제시된다.
“몇몇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하루라도 빨리 남보다 앞서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하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CEO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경쟁력이 비록 느리더라도 정도를 걸어왔다는 데 있다는 걸 발견했죠. 수업에서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그게 학생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느껴졌나봐요. 그래서 책으로도 엮게 됐습니다.”
그는 스탠퍼드대 유학 시절 ‘포천’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여성기업인 50’에서 5년 연속 1위를 차지했던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팩커드(HP) CEO를 만났다. 그런데 피오리나의 전공은 중세철학. 피오리나는 “실제 사회를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는 많은 것을 읽고,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고, 모든 것의 역사적인 연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김은혜 앵커는 “실제로 만나본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 CEO들 상당수는 대학에서 철학, 역사학, 사회학 등 기초학문을 전공했다”고 말했다. 김은혜 앵커는 국내 기업 CEO들에게서도 ‘느림의 성공학’을 발견했다고 한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중세미술과 중세음악의 전문가라 할 정도예요. 그 분은 ‘첨단을 달리는 삼성전자의 미래는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시죠.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사무실에 망원경을 갖다두고 틈틈이 밤섬의 철새들을 관찰할 정도로 자연에 매료된 분이세요. 그분은 경영 아이디어를 찾고자 할 때는 자연 속에서 걷는다고 하시더군요.”

독신주의자는 아닌데 일하다 보니 결혼 늦어져
지난 2001년 미국 뉴욕에 9·11테러가 터졌을 때 시청자들은 방송현장에서 물러난 김은혜를 TV 화면으로 다시 만났다. 그는 당시 앵커가 아닌 워싱턴 특파원으로 카메라 앞에 섰었다. 9월9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다음 날 전화를 개설해 회사에 전화번호를 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 날 9·11테러가 터져 “당장 워싱턴으로 날아가라”는 지시를 전화로 받았다는 것. 미국 전역에서 항공기 운항이 전면 중단돼 일주일 뒤에야 워싱턴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항공기 운항이 재개된 첫날 새벽 6시5분에 출발하는 첫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승객이라고는 70대 할머니와 자신뿐이었다고 한다. 테러를 당한 비행기가 새벽 첫 비행기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탑승하기를 꺼려했던 것. 할머니는 그에게 “난 인생을 다 산 사람이라 상관없지만, 젊은 당신은 무슨 배짱이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그는 “제 직업이 좀 더러워요. 기자거든요”라고 말하며 할머니와 함께 웃었다고 한다.
어렵게 날아간 워싱턴은 황량했다. 그 많던 관광객도 보이지 않았다. 워싱턴에 주재하는 우리나라 정보기관 직원은 그에게 ‘폭탄을 실은 트럭이 추가 테러를 일으킬 것이란 첩보가 있는데 1순위가 국방부이고 2순위가 전 세계 특파원들이 모여 있는 프레스센터’라고 알려줬다. 그런데 다음 날 국방부가 화강암 바리케이드 설치를 완료하자 프레스센터가 1순위로 올라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다.

“빠른 시대일수록 정도(正道) 걸어야 성공” 주장하는 앵커 김은혜

“더 심각했던 건 탄저균 테러였어요. 한 번 호흡하면 한 달 내 사망할 수 있는 탄저균이 발견된 의회 건물로 달려가 카메라 앞에 서야 했거든요. 탄저균 초기 증세가 머리가 아프고 콧물이 나오는 감기 증세와 비슷한데 다음 날 정말 그런 거예요. 사람들이 병원에라도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해주었는데, 테러범들이 노리는 게 겁에 질린 모습이 아닐까 싶어 오기로 병원에 가지 않았어요. 결국 단순한 감기였고, 그래서 동료 기자들에게 축하(?)를 받았어요(웃음).”
앵커이기 이전에 기자로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위험한 현장에서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잦은 그에게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전혀 두렵지 않아요. 내가 현장을 찍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현장을 보지 못한다는 사명감이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 못하게 해요. 기자란 폭탄이 터지면 도망가기보다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이거든요.”
올해 서른다섯 살이 되는 그는 “독신주의자는 아닌데 결혼이 늦었다”고 말한다. 사귀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웃으며 “있어요”라고만 짧게 답했다.
“열심히 일하다 보니까 결혼이 늦었어요. 좋은 남자는 젊고 예쁜 여자들이 다 채간다고 하잖아요. 하하. 결국은 제로섬 게임인 거 같아요. 일에서 80을 얻었다면 사생활에서는 20을 얻을 수 있는 거죠.”
그는 울고 있는 아줌마의 사연이 뭘까 궁금해하고, 남자 기자들보다 두세 배 열심히 뛰어야 인정받고, 일에서의 승부를 위해 연애와 결혼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MBC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여주인공 이신영을 보며 많은 공감을 했다고 한다.
김은혜씨는 자신의 성공에 대해서도 느리더라도 정도를 걷는 길을 따르려고 애쓰고 있다. 종종 정치권에서 영입 제의를 받기도 하지만, 달콤한 제안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본연의 자리에 충실하고자 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다시 기자로서 취재현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스탠퍼드 대학 유학 시절 미국 ABC나 CBS 앵커들, 기자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들은 한결같이 제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앵커 말고 기자를 하라’고 충고했어요. 일단은 앵커를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젊고, 3년 동안 앵커를 했으면 현장 감각이 떨어질 수 있으니 재충전하라는 뜻이었죠.”
그는 그동안 만나온 성공한 CEO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한번 정한 원칙은 쉽게 양보하지 않는 근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한 근성은 그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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