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빌딩 지하에 있는 청작화랑을 찾았을 때 손성례(59)·신일수씨(32) 모자는 지난 10월7일부터 18일까지 11일간 열렸던 첫 개인전을 마치고 철수작업을 위한 상의를 하고 있었다.
“20점을 전시했는데 8점이 팔렸어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좋은 성과를 거뒀죠.”
생애 처음으로 작품 전시회를 열고 결과도 좋아 기쁘다는 신일수씨. 그런 아들을 대견한 듯 바라보는 어머니 손성례씨는 지난 87년 언젠가 전시회를 가질 아들을 위해 청작화랑을 열었는데 18년 만에 소원이 이뤄져 감개무량하다며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에는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감회에 젖어 있을 틈이 없었어요. 그런데 전시회를 끝낸 어젯밤에는 잠자리에 들면서 힘들었던 지난날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헬렌 켈러처럼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들이 이렇게 개인전을 열고 좋은 반응까지 얻으니 기분이 너무 좋아요.”
손성례씨는 아들 신일수씨가 ‘청각장애아로 태어난 이유’에 대해 묻자 출산할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들려주었다. 배 안에서 태아가 거꾸로 위치해 겸자 분만(엷은 금속제의 주걱을 사용해 주걱 끝의 열린 부분으로 태아의 머리를 집어 태아를 끌어내는 분만방법)을 했는데 겸자의 압력 탓인지 아이의 머리가 길쭉해져서 나왔다고 한다. 손씨는 “겸자를 사용할 때 과도한 압력에 의해 뇌손상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학계의 보고가 있다”며 아마도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엉덩이를 때려도 울지 않던 청각장애인 아들 위해 헌신적인 뒷바라지
“엉덩이를 때리면 아이가 울어야 하는데 울지 않았어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첫아이라서 경험이 없고 산부인과에서도 정상 분만이라고 하니까 그런 줄 알았지요.”
그런데 아이는 옹알이를 하고 엄마, 아빠를 말해야 하는 시기가 돼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상해서 주변에 물었더니 5, 6세가 돼서야 말하는 아이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1년 8개월이 지났고 아이가 듣고 말하는 게 나아지지 않자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청력검사를 받은 결과 ‘청각장애아’라는 판정을 받았다.
“아이의 상태를 호전시키고 싶어 치료비를 물었더니 한 달에 10만원 정도 든다고 했어요. 그때 남편 월급이 7만원이었거든요. 도저히 비싼 병원치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 저렴한 곳을 수소문하던 끝에 한국구화학교를 찾아가게 됐지요.”
손씨는 두 살배기 아이를 등에 업고 놀다만 와도 좋으니 받아만 달라고 간청을 해 한국구화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청각장애아들이 말을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해서다. 첫돌이 지나서 말을 안 하면 구각이 굳어서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손씨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매일 놀이 삼아 호각불기, 촛불 켜놓고 불기, 알사탕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혀로 굴리기 등을 수없이 반복했다고 한다.
“듣지를 못하니까 사과를 봐도 그게 사과인지 모르는 거예요. 사물을 직접 앞에 놓고 입 모양을 구분해서 가르칠 수밖에 없었어요. 일수를 위해서라면 창피한 것쯤은 잊기로 했어요. 학교 갔다 오는 길엔 무조건 신촌 시장에 들어가서 ‘우리 아이가 말을 못하니 잠깐만 실례하겠다’며 사과, 배, 오이, 호박 등의 과일이나 야채 앞에서 해당 품목을 집어들고 이건 사과, 저건 배를 수차례 반복했지요.”
주말엔 생물도감과 낱말카드를 옆에 끼고 온 가족이 동물원을 찾았다. 호랑이, 원숭이, 사슴 등의 우리를 돌며 생물도감과 낱말카드를 꺼내 일일이 책장을 넘겨가며 아이 앞에서 호랑이, 원숭이, 사슴 등을 수십 번 반복해 말을 익히게 했다. 화분 하나를 사와도 생물도감을 펼쳐들고 식물이름에서 산소, 질소, 박테리아 등으로 범위를 넓혀 가르쳤다. 아들에게 태권도도 가르쳤다. 체력단련과 함께 자신을 방어할 호신술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들 신씨는 2단까지 태권도 실력을 갖추었는데 중학교 때 짓궂은 친구들의 놀림을 당했을 때 그 실력을 발휘한 적이 있다고.
지난 10월7일부터 11일간 열린 첫 조각전시회에 선보인 작품들. 제목은 ‘유영’, ‘정’, ‘둥지’(위에서부터).
손씨는 아들이 듣지 못하지만 음감을 길러주기 위해 피아노도 가르쳤다고 한다. 처음엔 멜로디언으로 ‘도레미파…’를 가르친 후 엄마의 목젖에 아들의 손을 갖다대고 자신의 손을 발등에서부터 몸 위로 차츰 손을 올려가며(음이 점점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도레미…’ 소리를 내 진동으로 음을 구별하도록 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정상 아이들에 비해 진도는 느렸으나 일수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체르니 40번을 치게 됐다고 한다.
“여섯 살 무렵이었어요. 일수가 잡채밥이 먹고 싶대요. 중국집에 가서 사 먹으라고 했더니 ‘내가 말하면 못 알아들을 거야’ 하고 자신 없어했어요. ‘아니야, 네가 ‘잡채밥’하면 잘했다고 칭찬할 거야’ 하고는 돈을 줘서 보냈어요. 그리고는 얼른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우리 아이가 가서 ‘답테밥’ 하면 말 잘한다고 칭찬해주며 잡채밥을 주라고 했지요.”
그날 아이는 “정말 엄마 말대로 내 말을 다 알아들었어요” 하며 신이 나서 돌아와 우쭐했다고 한다.
손씨는 아들이 어느 정도 말문이 트이자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하지만 첫날부터 학부모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짝으로 앉히는 것도 꺼려할 정도였다고.
“아들이 걱정돼 일주일 이상을 복도에서 서성거렸어요.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이 들어오라고 하데요. 그때부터 반을 도맡다시피 하며 도왔어요. 청소, 채점, 환경미화… 교과서를 보고 괘도를 만들어 수업시간에 쓰라고 담임교사에게 드리기도 했지요.”
손씨는 서울 송파구 잠실의 13평 아파트에서 10년간을 살았다. 비좁은 아파트지만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집이 좁으니까 아이들이 집안에서보다 밖에 나와서 놀았고 주위 엄마들도 늘 문을 열고 살아서 장애아인 아들이 일반 아이들 속에 섞여 지내기가 쉬운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장애아라고 고립돼 지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우리 집은 항상 동네 아이들로 넘쳐났어요. 아이들이 놀다가 배고프면 들어와서 먹으라고 고구마튀김 등의 간식을 준비해서 상에 수북이 쌓아두곤 했지요. 야구 방망이가 9개, 글로브가 6개 있었어요. 칠판과 분필도 있어서 동네 누나들이 와서 우리 아이랑 학교놀이도 했고요.”
손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에 힘입어 일수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부반장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아들은 신문에서 운보 김기창 화백의 기사를 오려와 “그림을 배우겠다”고 했다. 당시 청각장애를 앓고 있던 운보는 장애인에겐 희망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운보 김기창 화백의 신문기사를 읽고 화가의 꿈 키워
1년 전부터 조각전시회를 준비했다는 신일수씨와 그의 어머니 손성례씨가 ‘유영’이라는 작품을 보며 흐뭇해하고 있다.
이때부터 일수씨의 그림 공부가 시작됐다. 언제나 아들을 데리고 다니던 손씨는 아들이 데생 공부를 하는 동안 무료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 같은 화실에서 동양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손성례씨는 아이를 위해서만 살아오다가 그림을 그리면서 비로소 자신의 생활이 생겼다고 한다. 그동안 아들로 인해 받았던 슬픔, 원망, 서러움 등을 녹여내며 온전히 집중한 결과 손씨는 85년엔 현대미술공모전에서 최연장자로 입선을 하기도 했다.
손씨는 청작화랑을 문 열던 87년 아들을 이끌고 운보 화백을 찾아갔다. 운보 화백은 일수씨의 손을 잡아주며 “나처럼 할 수 있다. 작가로 꼭 성공하라”며 격려를 해주었다고 한다.
“아들을 미술로 온전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저 자신이 먼저 미술인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87년 그동안 저축했던 돈을 털고 시누이의 도움을 받아 청작화랑을 열었어요. 그러면서 홍익대 미술교육원에 입학해서 97년 1기로 졸업을 했지요.”
신일수씨는 신천중학교, 현대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실상 공부는 독학이나 다름없었다. 학교의 수업내용을 알아듣지 못해 정상적인 학과 공부가 이뤄지지 않자 손씨는 저녁이면 아들의 공부를 위해 항상 얼음물을 준비했다고 한다. 아들은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졸린 눈을 부비며 공부를 했고 그녀는 옆에서 그림을 그리며 지켰다고. 물론 신씨도 내면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다.
남들처럼 속 시원히 말을 할 수 없는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뜯고 뒹굴고 울며 몸부림을 친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손씨는 아들을 데리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돌아다니며 부모나 가족이 없어 불쌍한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마음을 달래고 긍정적인 생각을 품게 했다고 한다.
신일수씨는 장애인의 입학을 허락하는 대학이 없어 대입시험을 네 번이나 보고 나서야 경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미술을 포기할 수 없어 5수 끝에 상명대 조소과에 들어갔다. 이어 서울시립대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했고 2003년부터는 환경조소과 강사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2003년 10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귀 수술을 받은 신일수씨는 29년 만에 처음으로 바깥 세상의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 전화벨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시계바늘 소리… 세상의 소리를 듣게 된 그는 현재 어눌하긴 하나 귀 기울여 들으면 간단한 대화는 가능한 상태. 지난해 12월에는 서울시립대 대학원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1년 전부터 이번 전시회를 준비했다는 신씨는 망치에 손톱이 뭉개지는 고통 속에서도 돌 조각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작품 하나하나 다 귀하지만 그중에서도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유영(游泳)’. 영어로 하면 ‘swimming’이다. 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으로 이제 막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어머니가 마련해준 공간에서 첫 개인전을 연 그는 “어머니의 사랑은 그 어떤 장애도 이겨낼 수 있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