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초여름 문턱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올 초 드라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를 끝으로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지성(28). 그는 지난 5월 초 개봉한 영화 ‘혈의 누’에서 새롭게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그동안 안방극장에서 보여주었던 깔끔하고 고급스런 이미지에서 벗어나 천민 화가로 열연한 것.
19세기 초 동화도라는 외딴 섬에서 닷새 동안 벌어지는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두호는 천민이지만 화가로 살인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신비스런 인물이다. 살인범을 추적하는 수사관 원규(차승원), 지역 유지 인권(박용우)과 막판까지 숨 막히는 심리전을 펼치는 주요 배역. 하지만 그가 조연급인 두호 역을 맡은 것은 다소 의외다.
“영화는 드라마와 또 다른 분야인 만큼 연기를 다시 배운다는 기분으로 다가가고 싶어 비중에 연연하지 않았어요. 내용이 좀 어렵긴 했지만 구성이 탄탄하고 두호라는 인물도 제가 해보지 못한 역할이라 욕심이 났고요. 사실 3년 전에 처음 출연한 영화 ‘휘파람 공주’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번 작품을 첫 영화라는 생각으로 찍었죠.”
지난해 여름 시작한 ‘혈의 누’ 촬영은 지난 2월에야 끝이 났다. 당초 6개월 안에 촬영을 마칠 계획이었으나 2개월 연장된 것. 그 바람에 그는 영화와 드라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촬영이 겹쳐 전남 여수와 서울을 오가야 했다.
“몸은 고달팠어도 더없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두 작품 모두 재미있게 찍었거든요. 개인적으로 연출에 관심이 많아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차승원이라는 배우로부터 어떻게 연기를 끄집어내는지 지켜보고 있으면 아무리 피곤해도 졸리지가 않았어요.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저만의 앵글을 잡아보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물론 촬영하면서 힘들 때도 있었어요. 한여름에 40℃를 웃도는 방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박용우 선배님과 격투신을 찍었더니 나중에는 탈진상태가 되더라고요. 더구나 벽에 수도 없이 부딪혀 등이 멍투성이가 됐고요. 사실 촬영을 하면서 그런 타박상은 수없이 입었어요.”
영화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마을 사람들에게 수없이 난도질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는 라스트 신. 처음에는 두호를 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이던 원규마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의 절규를 외면했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무척 슬펐어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것 같은 지독한 외로움과 서글픔이 한꺼번에 밀려왔죠. 그래서 그날 저녁 맥주를 마셨던 기억이 나요.”
올해 말 군입대 예정, 2년 후에는 연기도 더 깊어질 것 같아
전남 여수고등학교 재학시절부터 그의 꿈은 배우였다. 하지만 내성적인데다 말수도 거의 없던 그가 “연극영화과에 들어가 배우의 길을 가고 싶다”고 털어놓았을 때 진학 상담을 하던 선생님은 껄껄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아차린 뒤에도 선생님은 “연극영화과에는 보낼 수 없다. 네 아버지에게 혼난다”며 만류했다고.
“아버지가 여수에 있는 다른 학교 교장선생님이셨거든요. 선생님도 아버지가 저를 호락호락 연극영화과에 들어가도록 내버려둘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어요. 가정선생님이던 어머니는 제가 진로 문제로 고민하니까 나중에도 연기자가 되겠다는 뜻이 변하지 않으면 그때 꿈을 펼치라고 말씀해주셨어요.”
대전 한남대에 진학한 후 연기자가 되겠다는 결심이 더욱 굳어지자 그는 연기자가 될 수 있는 길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그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의 아버지는 심지어 그가 연기에 한눈팔지 못하도록 용돈까지 끊어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신문과 우유 배달을 해가며 용돈을 벌었다.
“힘들었지만 꿈이 있어서 즐거웠어요. 다른 연기자들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다들 고생을 많이 했던데 사실 저는 그전까지 고생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용돈을 끊은 것이 오히려 저한테는 좋은 경험이 됐죠.”
그는 지난 2000년 SBS 청춘드라마 ‘카이스트’ 1회 방송을 보고 무작정 제작사로 전화를 걸어 “‘카이스트’에 출연하고 싶다”고 출연의사를 밝혔는데 마침 제작사 측에서 “한 사람을 더 뽑을 계획이었다”며 사진을 보내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다들 TV에서 본 적이 있는 낯익은 얼굴이었어요. 결국 그 배역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지만 송지나 작가님이 저를 위해 다른 배역을 하나 더 만들어주셔서 꿈을 이룰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연기자가 된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그의 아버지도 지금은 흡족해하신다고 한다. 영화가 개봉되기 직전 전남 여수시에서 열린 시사회에도 참석해 영화 개봉을 축하해주셨다고.
그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 현역으로 군에 입대한다. 고교 졸업 후 공익근무요원 판정을 받았지만 얼마 전 다시 현역을 지원했다.
“이왕 군대에 갈 거면 현역 입대해 사회와 완전히 차단된 생활을 하고 싶어요. 단체생활을 통해 연기에 필요한 경험도 쌓을 수 있고, 앞으로 제 인생에서 지성이라는 이름을 잊고 자연인 곽태근으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일 테니까요. 1~2년 전까지만 해도 군대 문제로 걱정도 많이 하고, 입대 전에 뭔가 해놓고 가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는데 그 사이 생각이 바뀌었어요. 2년간 재충전을 하고 돌아오면 제 삶도, 연기도 한층 깊어질 것 같아요.”
그는 2년 넘게 교제해온 연인 박솔미에 대해 “외모도 예쁘지만 마음은 더 예쁜 친구”라고 말했다.
“제 이상형이 마음 씀씀이가 예쁜 여자인데 솔미가 그런 여자예요. 생각이 깊고 상대를 많이 배려하거든요. 솔미는 배우로서 갖춰야 할 자질도 두루 갖추고 있어요. ‘올인’에 함께 출연하는 동안 저에게 참 많은 걸 느끼게 해주었고 친구이자 연인이 되었죠. 얼마 전 한가인·연정훈씨 결혼식에도 같이 갔는데 많은 분들이 저희 결혼 계획을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아직 결혼 생각은 없어요. 군대도 다녀와야 하고 좀 더 저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때 결혼하고 싶어서요.”
그가 ‘혈의 누’를 촬영하는 동안에는 너무 바빠 얼굴조차 볼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박솔미에게 많이 미안했던 그는 지난 3월14일 화이트데이에 깜짝 선물을 주었다고.
“솔미는 편지를 좋아해요. 제가 직접 쓴 편지요. 그래서 이틀간 고심해서 쓴 편지를 선물했더니 무척 기뻐하더라고요. 사랑만큼은 배우가 아니라 자연인으로 하고 싶어요. 저희끼리는 농구장, 영화관 같은 데도 스스럼없이 다닐 정도로 편하게 데이트를 즐기고 있지만 굳이 방송에 나가서까지 ‘올인’ 커플로 주목받고 싶진 않아요. 저희가 그동안 소중하게 가꿔온 사랑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지켜봐주시면 좋겠어요.”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