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 ‘레옹’의 남자주인공 레옹 같았지. 너는 꼭 마틸다 같았고. 네가 연예계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시기에 처음 만났기에 너는 내가 보호해줘야 하는 아이였고, 또 보호해주고 싶은 아이였지. 그래서 괜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아 둘만의 자리를 피했던 거야.
4년 전 내 콘서트에 찾아온 너를 처음 봤을 때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어느 날 내가 큰 문화행사에 갔을 때 살며시 다가와 나를 빤히 쳐다본 사람이 있었지. 그게 너였는데 그때 네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아니? 엄청 반가워하며 콘서트 티켓을 달라고 했었지. 티켓을 건네주면서 너와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그때 네 나이가 스물한두 살쯤 됐을 거야. 그때부터 서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지… 메시지가 오면 나도 답장을 써야 했는데 처음에는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몰랐어. 그래서 딸 인영이에게 배웠지. 결국 너 덕분에 문자메시지를 배운 셈이네.
“너는 내게 ‘레옹’의 마틸다처럼 보호해주고 싶은 아이였어…”
그렇게 4년간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너나 나나 고집을 갖고 일하는 가수고, 배우라 얘기가 잘 통했던 것 같다. 사실 네가 같은 길을 가는 동반자 같은 기분이 든 건 다른 사람과 느낌이 아주 달랐기 때문이야. 가수 김민기 얘기를 하면서 내가 ‘김민기 만세, 이은주 만세’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면 ‘와 좋아요. 전인권 이은주 만세’ 하고 답장을 보내왔지. 또 내가 아프다고 하면 바로 전화해 어디가 아프냐고 걱정해주고, 내가 외로운 거 알고 많이 챙겨줬는데….
정말 네게 진실하게 끌린 건 4년 전 연예인 마약사건이 터졌을 때야. 그런 일이 터지면 다들 나를 떠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날 네게서 만나자고 전화가 왔지.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안다면서. 내가 혼자 고민할까봐 도와주려고 하는 네 마음을 느끼면서 얼마나 고맙고 기뻤는지 몰라.
미사리에서 만나자고 했지? 하지만 미사리로 달려가다 결국은 돌아섰어. 괜히 이상한 말이라도 나면 네가 상처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때 네가 고맙게 해줘서 나도 마음을 열 수 있지 않았나 싶어.
문자메시지를 참 많이 주고받았지. 물론 네가 바쁠 때는 내가 세 개 보내면 한 개 정도 올 때도 있었고. ‘주무세요’ ‘안 자’ 하는 식의 일상적인 얘기를 주로 나누었지만 어쩌다 네가 ‘너무 힘들어요’ 하고 토로할 때도 있었지. 그럴 때면 걱정스러운 마음에 문자메시지도 더 많이 보내고. 너 때문에 말도 무지하게 많이 늘었단다.
지난해 영화 ‘주홍글씨’와 드라마 ‘불새’에 출연할 때 참 많이 힘들어했지. ‘눈물 나요’라는 메시지를 하루에 10개, 20개씩 보냈으니까. 그래서 내가 그 무렵 ‘은주 너는 진짜 멋쟁이 배우다’ ‘CF 한다며. 예쁘게 잘해. 나는 오늘 연대 대학원에 강의하러 간다’ ‘잘자라 아름다운 은주. 살이 조금 붙었는지 궁금하네. 잘자’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냈지. 너를 기분 좋게 해주려고 예쁘다, 아름답다, 세계적이다 같은 말도 자주 해주고. 누구나 그런 말 들으면 좋아하니까.
네가 ‘주홍글씨’에 출연하면서 한참 힘들어할 때는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 세계 최고 예쁜 아가씨. 무조건 좋은 하루, 웃자웃자 너도 웃자 나도 웃자’ 하고 보냈지. 하지만 영화 촬영이 끝난 뒤에도 힘들어하는 게 보여 많이 걱정스러웠다.
기분이 울적한 날에는 감색 트렌치코트를 즐겨 입었던 이은주는 ‘주홍글씨’ 시사회 때도 이 옷을 입고 나왔다.
‘주홍글씨’ 시사회에 갔을 때 눈물 흘리는 너를 봤다. 힘들게 촬영한 만큼 보람을 느끼고 가슴 설레는 기쁨을 보여야 하는 날에 남모르게 눈물짓던 네 모습이 지금도 눈에 밟힌다. 넌 기분이 울적한 날에는 감색 트렌치 코트를 즐겨 입었지. 그래서 그날 기분이 좀 이상했다. 내 콘서트에는 꼭 오는 네가 자기 영화 시사회에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거든. 물론 나도 노출을 꺼려했던 네가 부담스러워할지 몰라 보러 가기가 조심스러웠고. 그런데 나의 일상을 스케치하던 MBC ‘사과나무’ 팀에서 너에게 느닷없이 전화를 한 거야. 주위의 만류에도 너는 기꺼이 오라고 했고.
그날도 난 너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지. ‘이 CD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거다’라는 글귀가 써 있는 마스터 CD 말이야. 네가 좋아해 나도 흐뭇했다.
넌 내게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을 가졌을 거야. 떨어져 사는 아버지 같은 푸근함도 느꼈을 거고, 팬으로서 좋아하는 마음도 있었을 거고, 친구 같은 편안함도 느꼈을 거야. 또 이성적인 감정도 아주 없진 않았던 것 같다. ‘사과나무’에서 네가 한 얘기를 들어보면 느껴져. 어쩌면 난 너에게 꼭 필요한 맑은 물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으로 통화하던 날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나 ‘연애소설’에 출연할 때는 우리 집 근처에서 자주 만났었지. 그때마다 고만고만한 친구들을 몰고 왔는데 너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 보이더구나. 꼭 해맑고 장난기 많은 아기 같았거든. “내 앞에서는 안경 벗어주세요” 하고 어리광도 부리고 말이야. 그런 네 모습이 좋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영화배우를 하면서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또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고 하면 “사주세요” 그랬지. 그렇게 단둘이 만날 일이 생겨도 항상 매니저와 함께 만났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오래전에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어 영화 얘기도 많이 하고, 재미있는 얘기도 하고, 또 그냥 보고만 있어도 느낌이 있었지. 내가 연장자로서 너를 많이 챙겨주면서 마틸다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처럼 너도 진실하게 아껴주는 나를 레옹처럼 생각했을 테니까.
만나면 곧잘 장난을 치던 네게서 우울증이 아닌가 싶을 만큼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진 것은 ‘주홍글씨’ 시사회에서 보고 열흘쯤 지나서였어. 열흘 만에 심하게 마른 너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주홍글씨’를 촬영할 때는 힘들다는 정도밖에 느끼지 못했는데 그때는 우울증 증세가 보였거든. 너에게 힘을 주기 위해 그때부터 문자메시지를 무지 많이 보냈는데…. ‘우리나라 꼭대기에 휭 하고 올라가면 보이는 게 너밖에 없을 거다’ 하고 보내거나 엉뚱하고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면 너도 좋아했고.
너와 마지막으로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게 2월20일이었다. 그날 넌 평소와 달리 이상한 구석이 많았어. 비쩍 마른 네 모습이 아른거려 ‘밥 안 먹고 그러는 거, 내가 나이만 젊었으면 죽었다’고 농담을 했더니 ‘죄송해요. 진짜. 오해가 있었어요. 죄송해요. 그러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하고 답장이 왔으니 이상할 수밖에. 다른 때 같으면 ‘고마워요. 앙’ 그랬을 네가 ‘오해’ ‘죄송’ 운운하니까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 바로 전화를 했지. 그런데 그때도 너는 내가 “오해는 무슨 오해야. 나 지금 전주 가는 거야” 하니까 군산(이은주의 고향) 들러갈 줄 뻔히 알면서 “군산 들러서 가세요” 하고 말해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어. 그래도 네가 이틀 뒤에 그렇게 떠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나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는데 몇 시간 전까지 너와 얘기를 나눴던 네 어머니는 어땠을까 싶다. 내 콘서트에 항상 엄마를 모시고 오던, 그렇게 효성이 지극하던 네가 이렇게 갈 줄이야.
지난해 11월이던가. 미국에서 교수 친구가 왔을 때 너와 같이 만난 적이 있었지. 실은 그 친구가 너를 보고나서 슬퍼 보인다고, 예민한 성격인 것 같다고 말하더구나. 그때 네 옆에 있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호주에 갈 일이 생기고 말았지. 그래서 호주에서 계속 전화한 거야. 그때도 내가 “금방 돌아갈 테니까 힘내” 하면 “빨리 오세요” 했을 아이가 “괜찮아요. 괜찮아요”라는 말만 되풀이했지. 엘리베이터에서 통화하다 소리가 지지직거려 재미있는 얘기도 못해주고 끊은 게 못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너와 통화하고 나면 나도 마음이 편해졌단다.
이은주가 힘들어할 때마다 따뜻하고 재미있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우정을 쌓은 전인권은 이은주의 명복을 빌며 ‘걱정 말아요’를 불렀다.
12월10일경 호주에 다녀와서 한 번 만나곤 한동안 못 봤는데 연말에 뭣도 모르고 내가 “친구들에게나 나에게 항상 ‘나 행복하게 해줘’ ‘나 즐겁게 해줘요’ 하던 아이가 생일을 그냥 지나치면 어떡하니?” 하고 야단을 쳤지. 그때 넌 ‘정말 죄송하다. 콘서트 못 가봐서 죄송하다’고 그랬고.(전인권의 콘서트가 12월21·22일 열렸고, 이은주의 생일은 12월22일이었다)
연말에 너도 일하느라 무척 바빴다는 거 알아. 촬영 때문에 이탈리아 갔다 해를 넘기고 1월1일경 들어왔지. 그날 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보냈고, 나도 굳이 어디 갔다 왔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기운을 북돋워주는 기분 좋은 얘기를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그동안 나눈 소중한 얘기들은 내 휴대전화에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네가 그리울 때는 그 메시지를 뒤져보며 좋았던 기억들을 곱씹어보곤 한단다.
우리가 서로를 막 알아갈 무렵 어떤 연예인의 마약 사건 났을 때 나한테 전화해서 빨리 나오라고, 혼자 있으면 절대 안 나간다는 나를 안심시키려고 감독도 같이 있는데 빨리 오시라고 했다며 나의 아픔을 위로해주려고 애쓰던 너. 그런 네게 달려가다 끝내 돌아왔다. 그냥 혼자 있고 싶다고 네게 말했지. 그때는 내가 우울증이었어. 사람들이 왠지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거든. 결국 가지 못한 나에게 그때도 넌 힘내라고 다시 한번 말해주었지.
은주 넌 남을 많이 배려해주는 사람, 나이답지 않게 성숙한 사람,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지. 물론 여느 여자들처럼 샘을 낼 때도 있었고. 그럴 땐 꼭 아이 같았지만. 배우로서는 두말 할 것도 없었지. 실은 너와 안면만 있고 잘 모를 때 ‘오! 수정’이라는 영화를 보고 참 대단한 배우라고 느꼈다. 너에게 관심이 가고 끌린 것도 영화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반했기 때문이야.
네가 이승과 영영 작별하던 날, 너의 명복을 빌며 ‘걱정말아요’를 불렀어. 살아생전 네가 그 노래를 정말 좋아했잖아. ‘그대여 걱정말아요’ 하는 가사가 꼭 너를 위해 쓴 것 같다면서…. 이제 와서 얘기지만 너의 영향도 있었지. 그때 네가 ‘불새’와 ‘주홍글씨’를 촬영하면서 무지 힘들어했으니까. 그 노래를 만드는 동안 마음 언저리에 남아 있던 아내와 헤어진 아픔과 이런저런 번민들을 탁탁 털어버리면서 네 생각도 많이 했다.
너에게서는 동지 같은 느낌이 있었어. 그래서 문자에다 ‘독립군’이라는 표현도 곧잘 쓰고, “연예계에 정말 청량음료 같은 존재가 되자” 하는 얘기도 나누었지. 그런 동지를 떠나보내고 나니 슬픔을 견디기가 무척 힘들구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어서 바쁘게 일하며 정신없이 보내는데도 밤이 되면 어느새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 밤마다 잠을 이루기가 힘들어 내내 술로 살다 어제는 마시지 않았다. 잘했지?
나름대로는 챙겨준다고 챙겨줬지만 더 잘해줄 걸 하는 생각이 들어 많이 아쉽다. 다행히 너를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구나. 휴대전화에 남아 있는 문자메시지들도 그렇고, 팬클럽 아주머니들이 집안 청소해주시면서 치워 어디에 있는지는 다 모르지만 네가 준 소중한 선물들도 있고 말이야.
넌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 주는 것을 좋아했지. 그것도 너의 성의를 담아서. 한번은 예쁜 종이상자를 정성스럽게 만들어주었는데 그 안에 든 하얀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 ‘전인권 만세’ 하고. 넌 항상 선물할 때면 ‘전인권 만세’라고 써서 주었는데….
꿈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내용의 시가 담긴 십자수 액자도 주고, 하트 모양의 달도 주었지.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선물은 음악이 나오는 로봇이야. 태엽을 감으면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는 알 파치노가 탱고를 출 때 흘러나오는 ‘포르 우나 카베자(Por Una Cabeza)’라는 탱고음악이 나오잖아. 너도 외로울 때 그 노래를 들었다고 했지. 나도 요즘 그러고 있단다. 정말 효과가 있더라고(ㅠㅠ).
너를 생각하면 그리움, 아쉬움만 커질 것 같아 이제는 훌훌 떠나보내련다. 진정 네가 꿈꾸던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나도 시를 썼다.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너는 가버렸지만 내 마음의 메시지가 네게 전해지기를 기원하면서….
‘날아라 날아가라멀리 네가 원하는 곳으로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미련 갖지 말고네 이름이 들리지 않는 곳까지커다란 새가 되어높이, 높이 솟구쳐 높이 날아너의 미소에우리가 황홀할 수 있도록찬란한 노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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