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머릿속을 쫙 갈라서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타인의 일기를 훔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겠지? 일기를 보면 인간이라는 게 과연 얼마나 악마한테 사로잡힌 존재인지 알 수 있어. 그래서 일기는 재미있는 거야.”
일본의 대표적 문예지 ‘신초45’ 편집자 사이토 주이치의 말처럼 남의 일기를 읽는 것은 짜릿한 체험이다. 더욱이 빼어난 기억력으로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정밀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작가의 일기라면 흥미가 더욱 배가된다.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카와상을 받은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씨(37)의 일기라면 어떨까. 최근 번역 출간된 ‘그 남자에게 보내는 일기’는 저자의 은밀한 사적 영역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기이면서도 한 편의 정제된 문학작품처럼 큰 감동을 안겨준다. 이 일기는 2001년 11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1년2개월 동안의 기록으로 작가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한 여성으로서 유씨의 삶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일기를 쓰기 전 유씨는 많은 아픔을 겪었다. 99년 5월 어느 날,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상대는 35세의 유부남인 한 방송국의 보도국 기자. 7월엔 일기 속의 ‘그 남자’이자 스승이며 연인이었던 히가시 유타카가 식도암 판정을 받는다. 2002년 9월엔 처녀작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의 출판금지 판결…. 너무나 가혹해서 손쓸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
유타카가 죽고 아들 다케하루가 태어났다. 원치 않은 임신이었고 아이 아버지는 자기 부인에게 돌아갔지만 유타카가 낳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아기다. 아빠 없는 아들을 기르는 생활은 때로는 귀엽고 예쁘고 때로는 안타깝고 시큰하다.
‘“지붕 위에 높이 뜬 장대잉어 커다란 잉어는―.”
다음 가사는 아빠, 였는데 그만 말문이 막혀서 다시 한 번 처음부터 부른다. “지붕 위에 높이 뜬 장대잉어 커다란 잉어는 엄마.”
“엄마!” 아들이 기쁜 듯이 내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2002. 5. 5)’
육아일기 외에 유미리가 마라톤에 빠지게 된 사연, 재일동포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이 담담하게 펼쳐지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유씨 자신이 작가가 된 결정적 계기가 일기였다고 밝히는 부분이다. 작가가 되기 전 연극배우였던 그는 연출가로 있던 유타카에게 일기를 보여주었는데 “당신은 연기보다는 글을 쓰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작가보다는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었던 그는 글을 쓰는 재능이 있다는 말보다 연기에 재능이 없다는 말 자체에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일 이후 유미리는 정말 작가가 되었다. 16세에 집을 나와 18세에 첫 희곡 ‘물 속의 친구에게’를 쓰고 19세에 그 작품을 무대에 올린 날부터 지금까지 유미리는 ‘쓰는 이외의 직업을 가진 일도 없고 아르바이트를 경험해보지도 않았다’.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막상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다. 쓰는 일에 어떤 아픔이 수반된다고 해도 아프기 때문에 쓰지 않고 그냥 두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쓴다는 것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2002. 3. 18)’
이번 일기 서두에서 그는 아들의 은인이 된 유타카에게 “감상을 적어주세요”라고 적고 있지만 저 세상 사람이 된 유타카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이 1년 동안 ‘교환일기’를 썼습니다. 당신의 언어는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써본들 당신에게 닿지 않는 건 아닐까, 나 자신을 향해서 당신이 없음을 애도하는 장례식의 종소리처럼 울리고 있지만은 않을까, 언어 자체를 의심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유미리의 은밀한 일기는 아무것도 거르지 않은 고해성사이며, 생명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찬가이며, 지친 영혼의 어깨를 다독이는 위로의 말이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삶에 긍정적인 여성의 발랄한 단면을 보여줬다면 유미리의 일기는 어둡고 덮어버리고 싶은 사적인 일들마저 모두 드러내고 그것을 긍정하려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어 더욱 울림이 크다. (동아일보사, 480쪽, 1만1천5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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