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거짓말’‘바보같은 사랑’‘꽃보다 아름다워’등에서 배종옥(40)과 함께 작업했던 노희경 작가는 배종옥에 대해 “끼는 없지만 성실성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는 배우”라고 평했다. 백 번 양보해 생각해도 배우에게 끼가 없다는 이야기는 좋은 말이 아니다. 노력하는 음악가 살리에르가 결코 모차르트에 다다를 수 없는 것처럼, 예술 분야에서는 타고난 재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팬들은 노희경 작가의 시각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 듯하다. 지난해 한 영화잡지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배종옥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된 배우’ 1위에 랭크됐다. 배종옥에 대한 이런 시각 차이는 그의 캐릭터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한다.
“연기자에게 있어 끼가 넘친다는 건 좋은 거지만, 전 타고난 배우는 아니에요. 그래서 끼가 넘치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부러웠어요. 하지만 연기란 게 꼭 타고난 재능으로만 채워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부족한 걸 채워가며 배워가는 과정인 거죠.”
그가 탤런트로 데뷔한 건 지난 85년, 선배 추천에 의해서였다. 햇수로만 무려 19년, 연기자로서 그만큼 오래 사랑받아온 사람도 드물지만 데뷔 당시 그를 유망 신인으로 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금속성의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당돌한 눈빛, 똑부러지는 말투 등 부드럽고 연약한 여인상을 최고로 치던 당시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성의 사회활동에 있어 가장 큰 적은 사랑하는 남자일지 몰라요”
“드라마 ‘노다지’ 등에서 주연급 배역을 맡기도 했지만 스물다섯 살 무렵까지는 저 스스로도 개성 있는 배우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왕룽일가’‘젊은 날의 초상’ 등을 거쳐 MBC 미니시리즈 ‘행복어 사전’을 통해 제가 가진 캐릭터가 완성됐다고 봐요. ‘행복어 사전’에서 기자 역을 했는데 당시만 해도 커리어우먼 캐릭터는 주연급이 될 수 없었거든요. 외모나 목소리 모두 부드러움이 중요시되던 시기였으니까요. 저나 주변에서나 조연 정도에 머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어요. 그때 완성된 도시 여성 캐릭터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변화를 줄 생각은 없냐고 묻자 그는 “굳이 유지하고 싶지도, 부인하고 싶지도 않다. 내재된 개성이 틀이 잡히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는 다른 배우들처럼 타고난 ‘끼’는 없지만 오랜 연기 생활을 통해 조금씩 배워간다며 겸손해 한다.
그가 과소평가된 것은 어찌보면 전통적인 한국 여인상, 한국 여배우상과 동떨어진 배우였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의 이지적이고 당돌한 캐릭터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배우로서의 지명도에 비해 대중적인 인기가 떨어졌던 것도 그런 이유일 터.
“제가 맡아왔던 배역 때문인지, 제 성격 때문인지는 잘 몰라도 페미니스트란 오해를 많이 받아요. 그런데 사실 전 그런 문제에 큰 관심이 없어요(웃음). 오히려 페미니즘을 외치는 몇몇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느낄 때도 있어요. 자매애로 페미니즘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성들을 무시해서 그러는 건 아닌가 하고요. 저는 어떤 이념보다 그냥 각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지난 해 10년 만에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 출연하며 다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던 그는 오는 8월14일부터 두 달간 연극 무대에도 오를 예정이다. 99년 공연된 연극 ‘아름다운 사인’ 이후 5년 만의 무대 나들이가 되는 셈인데, 그가 이번에 선택한 작품은 소극장 산울림 개관 19주년 기념공연작으로 선정된 ‘데드 피쉬’다. ‘데드 피쉬’는 영국의 유명한 페미니스트 극작가 팸 젬슨이 80년대 중반 무대에 올렸던 작품으로 그는 페미니스트 사회운동가 ‘피쉬’역을 맡아 추귀정, 정세라, 소희정 등과 호흡을 맞춘다.
“5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니까 나름대로 부담이 컸어요. 그래서 혼자 이끌어가야 하는 모노극보다 여럿이 짐을 나눠들 수 있는 연극이 좋다고 생각했죠. ‘데드 피쉬’는 네 명이 같이 하니까 그런 면에서 좋았고, 작품 내용도 맘에 들었어요. 제가 맡은 피쉬 역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페미니즘 사회운동을 하는 여성이에요. 사회적으로 상처받은 여성들을 자신의 집에 불러들여 같이 살면서 자매애에 의한 페미니즘 운동을 실천하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자매애로 구원받지 못하고 개인적인 문제로 자살을 선택해요.”
우리나라 여배우의 퇴출 연령은 35세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운이 좋아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고 말한다.
정세라, 소희정, 추귀정이 연기하는 스타스, 바이올릿, 두자 역은 각각 성의 상품화, 결혼 제도에 의한 희생, 성 폭력 등 여성들이 당하는 사회적 피해를 상징한다. 스타스는 낮에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밤엔 매춘을 하는 여성이고, 바이올릿은 이혼으로 인해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진 여성, 그리고 두자는 강간으로 고통 받는 여성이다. 연극은 이들 셋이 피쉬의 집에 같이 모여 살면서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나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피쉬는 이들과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사회주의 운동, 페미니즘 운동을 하던 피쉬는 한 남자와 동료로서, 또 연인으로서 지내는데 이 남자가 한 술집 여자와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아요. 피쉬는 진정한 페미니스트로 살기 위해선 여성성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해 진주 목걸이, 꽃무늬 잠옷 같은 것들을 철저히 배격하는데 자기 애인과 사랑에 빠진 술집 여자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고 가치관의 혼돈을 일으키다 자살을 선택하는 거죠.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많이 보여주는데 공감되는 면이 커요.”
그는 여성의 사회 진출 기회가 많아졌지만 실제로 여성이 일하면서 힘든 건 사회의 배타적 분위기보다 자신의 애인 또는 남편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여성이 사회에서 일하는 걸 남자가 받아주지 않아 고통을 받고 좌절한다는 것.
“물론 제가 배우로서 부당하게 느끼는 부분은 없어요. 주변을 보면 그런 경우가 많다는 거죠. 그런 일 때문에 여자 스스로가 흔들리는 모습을 자주 봤거든요. 어쩌면 여성의 사회 진출에 있어 가장 큰 적은 사회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일지도 몰라요. 사랑과 자기실현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면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은 항상 이율배반적이죠.”
93년 그는 결혼 1년여 만에 이혼, 혼자 딸을 키우고 있다. 그런 자신의 개인사가 혹 그리 해석될 것을 우려한 터인지, 그는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말이 나온 김에 딸 이야기를 묻자 그는 “이제 열한 살인데 저보다 더 바빠서 엄마 노릇할 기회가 없다”고 했다. 그는 연기자로서 꾸준히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을 뿐,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
올해 열한 살인 딸이 더 바빠 엄마 노릇할 기회 별로 없어
그렇다면 여자로서 그가 느끼는 한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나이다. 그는 우리나라 여배우의 퇴출 연령은 35세라고 말한다. 서른을 넘기면서 점차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줄어들고, 그렇게 조금씩 주변으로 물러나면서 하나둘 사라져간다고. 그의 곁에서 수많은 여배우들이 그렇게 명멸하는 동안, 그는 용케도 살아남았다.
“서른을 넘긴 후 한 발만 잘못 내딛으면 끝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이 자리까지 온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죠(웃음). 사실 그 문제로 고민도 많이 했어요. 일부러 여기저기 여러 작품에 출연하는 걸 피했죠. 하지만 여배우의 수명 문제는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고요. 중요한 건 자기 연기력을 키워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연기력만 받쳐준다면 언제까지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 면에서 많이 노력할 거고….”
그는 나이가 있는지라 두 달간의 장기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체력적인 면에서 걱정이 많이 된다고 했다.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나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지난해부터 모교 연극학과 객원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학생들이 나를 많이 어려워하더라(웃음)”며 나름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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