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마케나의 한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20층짜리 5동으로 이뤄진 단지 중앙에 주차장 대신 커다란 수영장이 펼쳐져 있다. 맑은 하늘, 피부에 와 닿는 기분 좋은 열기, 쭉 뻗은 야자수와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푸른 수영장. ‘아! 이런 곳이라면 정말 살 만하겠다!’라는 감탄이 절로 토해진다.
싱가포르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부럽기 그지없는 주거 환경을 가지고 있다. 일단 거리가 놀랍도록 깨끗하고, 수목이 도심 곳곳을 덮고 있는데도 모기가 거의 없다. 공기도 맑아 하루 종일 시내를 활보해도 땀에만 젖을 뿐 옷에 때가 타지 않는다. 게다가 고층 사무 공간과 주거 공간을 제외하곤 모두 숲으로 뒤덮여 있다.
“이곳은 1년 3백65일 덥기 때문에 수영장은 필수예요. 아파트에 스포츠센터나 놀이터, 수영장, 테니스 코트 등은 꼭 갖춰놓아요. 이런 곳에 안 살더라도 주택가 근처에 공용 수영장이 있어서 수영은 원없이 할 수 있어요(웃음).”
지난 94년 상사 주재원으로 싱가포르에 온 정영석(42)·김재란(37) 부부는 2년 전 영주권까지 받았다.
“이곳 사람들은 여러 가지 부담이나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요. 일단 집 문제 같은 게 그렇죠. 돈 많은 부유층들은 개인 아파트나 저택을 소유할 수 있지만,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가 아파트에서 살아요.”
아파트 단지 안에 수영장, 놀이터 등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김재란씨는 하루에 1∼2시간 정도 아이들을 밖에서 뛰어놀도록 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국가가 주택을 배분한다. 국가가 집을 지어 개인에게 집 전체 값의 10%만 먼저 받고 판매하는 것. 나머지 값은 직장을 다니면서 연금 형태로 저축해 갚게 된다.
모든 식재료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아침부터 외식으로 해결할 정도로 외식문화 발달
“이곳에선 술값, 담뱃값이 비싸서 사람들이 술, 담배를 잘 안해요. 접대 문화도 없어서 대부분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죠. 이렇게 가족 중심적인 생활문화가 정착돼 있는 게 싱가포르의 좋은 점이에요.”
김재란씨는 처음엔 싱가포르에서 사는 게 싫었지만 지금은 싱가포르 예찬론자가 됐다고 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2차, 3차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때문에 새벽에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던 남편이 지금은 일몰 시간만 되면 칼같이 귀가하는 것도 좋고, 새벽 3시에 여자 혼자 산책을 해도 안전한 치안 상태, 쾌적한 주거 환경 모두 만족스럽다는 것. 금기하는 것이 많기로 유명한 나라지만 법률만 잘 지키면 편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라고 한다.
또한 김씨는 한국 식료품점이 있어 100% 한국식으로 살아도 될 만큼 불편함이 없다고 한다. 한국보다 더 비싸거나 맛이 다르지 않겠냐고 묻자 “싱가포르는 모든 식재료를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어차피 마찬가지다”라고 답했다.
1_ 한국에서도 유행중인 중국산 앤티크 수납장을 거실 한켠에 놓아 오리엔탈 분위기를 한껏 드러냈다.2_ 왼쪽 스툴은 중국에서 수입한 것. 부인 김씨는 마음에 드는 제품을 발견할 때마다 하나씩 구입해 그만의 다국적 인테리어를 완성했다.3_ 왼쪽의 스툴은 파키스탄 제품, 오른쪽의 서랍장은 대만 제품으로 가구박람회에서 단돈 50달러(3만5천원)에 건져낸 보물이라고.4_ 스페인산 의자와 인도네시아산 콘솔을 매치해 이국적인 분위기를 냈다. 위쪽의 액자는 렌트하우스라 못질을 할 수 없어 아크릴로 특수 제작해 붙여놓았다고.
정영석 김재란 부부는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적응이 되고 나니 사업 여건이나 치안, 문화생활 등을 감안할 때 싱가포르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싱가포르에서는 몇십 년 전부터 먹을거리를 전혀 재배하지 않는다고 한다. 국민들이 살 집을 짓기에도 땅이 부족해 모든 식량을 인접 국가에서 사온다는 것. 그래서 싱가포르에서 구할 수 없는 식재료는 없다고 한다.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음식 재료들이 수입되고 한국 음식 재료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국 교포들은 집에서 보통 한국 음식을 직접 해 먹어요. 남편들이 밖에서 음식을 사 먹으니까 집에서는 한국 음식 먹기를 바라거든요.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집에서 한끼도 안 해 먹는 경우가 많아요. 외식문화가 발달해 있어서 아침부터 음식을 사 먹죠. 그러다 보니 여기에서는 사 먹을 수 없는 요리란 없다고 할 수 있어요.”
이들 부부는 이곳에 와서 혜인(7), 준형(5) 남매를 낳았다. 처음엔 몇 년간 근무하고 돌아갈 것이라 여겨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싱가포르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이들 교육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공교육이 비교적 잘 되어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만 하면 알아서 교육을 시켜주고 교육비 부담 역시 적은 것. 하지만 이것은 현지 학교(로컬 학교)에 보낼 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한다.
“여긴 초등학교도 여러 가지 형태가 있어요. 영어와 중국어로 가르치는 현지 학교가 있고, 영어로만 수업하는 국제학교, 또 민족별로 각각의 학교가 있어요. 현지 학교에 보내면 학비걱정이나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중국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입학이 가능해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 역시 사교육 열풍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싱가포르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시험을 보고 학교를 선택한다. 성적이 떨어지면 상급학교 진학의 기회를 박탈해 한국보다 이른 나이에 사회에 진출시킨다. 그러다 보니 교육열이 강한 부모들은 치열한 경쟁에 대비해 갖가지 사교육을 시키는데, 우리 식의 학원들도 있지만 보통은 개인교습 형태라고 한다.
다양한 레저활동 가능해 주부들에게 더없이 좋은 곳
외식문화가 발달해 싱가포르 주부들은 집안에서 음식을 하는 일이 드물지만 김재란씨는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시간을 즐긴다고.
싱가포르는 무엇보다 주부들에게 좋은 곳이라는 것이 김씨의 얘기. 우선 주부들이 레저 활동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아파트 내에 있는 수영장과 헬스클럽, 테니스 코트에서 운동을 할 수 있고 조깅을 할 수 있는 공원도 많다는 것. 싱가포르 주부 대부분이 한두 가지 이상의 스포츠를 즐긴다고 한다. 특히 골프나 스킨스쿠버, 스노클링 등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스포츠도 즐겨 하는데, 골프의 경우 차로 30분 정도만 가면 도착하는 저렴한 말레이시아 클럽을 이용한다.
또 원하면 큰 부담 없이 집에 가정부를 둘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건너온 여성들을 고용하는데 한달에 우리 돈 50만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이들 부부의 집안을 둘러보면 독특한 점이 눈에 띈다. 가구가 모두 제각각인 것. 모두 구입한 곳도 다르고 원산지도 다르기 때문. 대신 동남아시아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가구들로 구입해 통일감을 주었기 때문에 산만해 보이지 않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모든 것을 수입하는 나라다보니 싱가포르에서는 원하는 스타일의 가구를 다 살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시아 스타일로 꾸미고 싶으면 태국, 인도네시아, 중국, 베트남 등에서 수입한 가구를 사면 되고, 유럽풍으로 꾸미고 싶으면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지에서 수입한 가구를 구입하면 되죠. 대신 선택의 폭이 넓으니까 고민도 그만큼 많아지는 게 문제예요.”
요리는 새우를 김이 오른 대나무 찜기에 넣고 살짝 쪄낸 ‘스팀 프라운’으로 아이들이 좋아해 별식으로 자주 해먹는다고.
실제 싱가포르 주부들은 맞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고 집에서 요리도 거의 하지 않는데다 운동이나 취미활동으로 바쁘다 보니 한국 주부들처럼 집안 인테리어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또 한국과 달리 가구가 이미 마련돼 있는 임대주택이 많아 집 꾸미기보다는 아이들 교육이나 레저, 외식 등 다른 곳에 투자를 많이 하는 편이라고 한다.
싱가포르 예찬론자인 부인 김씨와 싱가포르에 더 오래 머물고 싶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최근 사업을 시작했다는 남편 정씨는 다인종, 다문화 국가지만 알려진 것만큼 금지된 것이 많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나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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