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7월 ‘아름다운 혼·상례를 위한 사회지도층 100인 선언’이 있었다. 우리의 혼·상례가 너무 체면치레에 젖어 사회적 병폐가 되고 있다는 인식에 공감한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청첩장 남발하지 않기, 화환 축의금 사절, 호화 혼례 주례 맡지 않기, 인쇄물에 의한 부고 보내지 않기, 조화 조의금 사절, 화장 납골시설 이용하기 등 구체적인 실천사례들을 결의한 것.
그리고 3년 여간 이 선언에 동참했던 한 인물이 실제 이를 실천해 화제를 낳고 있다.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강지원입니다’를 진행하고 있는 강지원 변호사(55)가 바로 그 주인공. 그는 지난 3월4일 오전 10시경 성매매 방지기획단 민간단장으로 국무총리실 회의에 참석하던 중 어머니 이효임 여사(91)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강 변호사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이후 각 언론사로부터 전화도 받았으나 “부고 기사를 내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대표로 있는 법률사무소 직원들에게도 “나를 찾으면 외근 나갔다고 둘러대라”며 입단속까지 시켰다고.
강 변호사는 다른 병원과 달리 음식이나 술을 대접하지 않도록 돼있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빈소를 마련했고 지난 3월6일 어머니의 시신을 벽제승화원에서 화장했다. 모친의 빈소에는 조문객들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빈소에 놓인 조화 10여개도 대부분 동생 강창원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의 학교와 학회에서 보낸 것이었다.
부인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 역시 남편의 뜻에 따라 시어머니의 죽음을 거의 알리지 않았고 조화도 받지 않았다. 강 변호사는 또 상을 치르면서도 3월5일과 6일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강지원입니다’를 변함없이 진행했다. 이때문에 그의 친구들조차 그가 모친상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뒤늦게 이런 소식을 접한 후, 그를 만났다. 지난 3월1일부터 진행해온 EBS ‘선택! 화제의 인물’이란 시사 프로그램의 녹화가 끝난 뒤 마주한 그에게 “힘든 실천을 하셨다”고 인사를 건네자 “고심이 많았다”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모친상은 조용히 치렀는데 그게 알려지면서 요즘은 아주 홍역을 치르고 있어요. 주변에서 다들 섭섭하다고 난리예요. ‘너하고 나하고 그런 사이였냐’ ‘너는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와놓고 날 안부르면 어떡하냐’고 섭섭해하더라고요. 사실 이건 가족의 문제이기 때문에 저 혼자 결정할 일도 아니었고 고민이 많았던 게 사실이에요. 빈소가 너무 썰렁하면 좀 그렇지 않겠나 싶기도 했고. 하지만 장례식이란 고인을 아는 사람이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본래의 의미를 살리자는 취지에서 참여했던 선언이었기에 결국 저희 어머니를 아는 사람 외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장례 문화의 폐해에 대해선 문제제기가 많았다. 그중 가장 많은 지적 대상이 된 게 바로 우리의 매장 문화다. 산이란 산은 모두 묘지로 뒤덮이는 현실에 많은 지각있는 사람들은 개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100인 선언’의 취지대로 모친상을 화장으로 치렀는데, 사실 부친의 산소가 있던 터라 어머니를 합장으로 모셔도 됐던 터였다.
강지원 변호사는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내는 등 청소년 보호 운동에 앞장서‘청소년 지킴이’로 잘 알려져 있다.
“굳이 선언을 지켜야겠다는 강박관념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아버님 모실 때는 그런 인식 자체가 없던 때여서 고민이 없었는데, 이번은 달랐죠. 근데 그래요. 아버님을 산에 모시고 내려오는데 ‘저렇게 추운데 누워있으면 얼마나 추우실까’ 하고 걱정이 되더라고. 이번에 화장을 해보니 훌훌 털고 가신 것 같아 나도 좋더라고요. 이 세상에 와서 몇십년 살다 가는 인생, 최선을 다해 살고 떠날 때는 미련없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는 것도 아름답지 않겠어요? 나도 그렇게 미련없이 떠나는 방법을 찾고 있어요.”
사실 강 변호사는 법조계에서 유명한 효자다. 그는 검사 재임기간중에 누구나 한번쯤은 가는 해외 연수도 가지 않았다. 부모님을 모시는 처지에서 1~2년씩 집을 비우고 외국에서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부모님은 두분 다 돌아가시기 전 치매로 고생하셨는데 퇴근 후엔 그가 직접 두분의 수발을 들었다고.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 사대인 경성사범을 졸업한 신여성이셨어요. 저희를 키울 때도 굉장히 개방적으로 키우셨죠. 제가 서른넷에 우리 집사람과 결혼했던 것도 어머니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당시만 해도 직장을 가진 여성과 결혼한다는 게 파격적인 일이었어요. 지난 3년간 안방에 어머니를 모시고 제가 그 옆에서 잤는데, 밤에 기저귀를 갈아드리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머니가 이렇게 내 기저귀를 갈아주며 키우셨는데…. 부모 앞에 효자 없다는 말이 참 실감나더라고요.”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행정고시를 거쳐 사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당시 최고의 신랑감으로 손꼽혔던 인물. 장안의 한다하는 ‘마담 뚜’ 수첩엔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서른넷의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다가 김영란 판사와 연애 결혼했다. 당시 그는 서울지검 검사로 재임중이었는데, 이곳에 김 판사가 시보로 왔던 것. 일 때문에 마주치는 일이 많았던 두 사람은 사랑이 싹터 국내 최초의 판검사 부부가 됐다.
이들은 두 딸을 두었는데, 모두 대안학교에 보냈다. 큰 딸 민형양(20)은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미국에서 공부 중이고, 둘째 딸 선형양(18)은 대안학교에 재학 중이다. 두 딸을 대안학교에 보낸 것은 청소년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면서 느낀 점 때문이었다고 한다.
검사 시절부터 청소년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청소년 보호운동을 펴왔던 그는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위원장을 지내기도 한 인물. 그는 스스로 변호사가 아닌 ‘청소년 운동가’라고 부를 정도로 청소년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데, 올초에는 성매매 업주들의 비인간적 행태에 분노, 성매매 피해여성의 집단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담당해 주목받았다.
“검사였지만 검사가 제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늘 타인의 죄를 의심하고 심판하고…. 솔직히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 시절, 전 이런 의문을 던졌습니다. 인간은 왜 비행에 빠질까? 왜 그릇된 길을 가는 걸까? 죄를 심판하는 것은 사람들이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인데,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거듭하다 문득 ‘청소년기에 바로잡으면 범죄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죠.”
그는 청소년들이 어떻게 범죄에 빠져드는지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의 고민의 범위는 점점 확대되어 갔다. 청소년 비행문제를 연구하다보니 가족 문제를 살펴야했고, 또 사회환경을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최근엔 교육과 여성 문제까지 관심이 커져갔던 것.
그는 서른넷의 늦은 나이에 당시 서울지검 시보였던 김영란 판사와 연애 결혼했다.
“너무 많은 일들을 벌인 느낌인데, 멈출 수가 없었어요. 가출 청소년 문제를 살피다보니 미성년자를 유인해 성매매를 강요해온 악덕포주들을 심판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고, 다시 꼭 이런 문제가 미성년자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구나 하는 식으로 발전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이런저런 일에 관여해온 거죠. 그런데 청소년에 대해 연구한다는 게 뭡니까? 결국 인간의 성장기에 대한 성찰인 거고, 이건 결국 인간에 대한 성찰인 겁니다. 이런 고민들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요. 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대한민국의 최고 학교를 나왔고 최고의 출세라는 사법고시를 패스해서 이렇게 살아왔다. 너는 행복하냐?”
그는 자신이 받은 교육은 전형적인 엘리트 육성 교육이었으며 그 핵심은 획일적인 주입식교육이었다고 말했다. 교육기간 내내 적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고 목표는 너무 명확했으며 그는 그 길을 가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성공의 표상이라는 이른바 ‘사(士)자 직업군’이 됐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인 지금도 내 적성이 뭔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어요. 요즘 매일 새벽 4시30분에 일어납니다. 매일 하는 방송을 두개나 진행해요. 전문 방송인이라도 힘든 일인데 재미있어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내가 요즘 농담처럼 이젠 완전히 방송인이 된 것 같다고 말하는데 그게 빈 말이 아니에요. 제 본업인 변호사 일을 하루에 1시간도 채 못봅니다. 변호사 사무실로 와보세요. 저 못만납니다(웃음).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스무살 때 내가 방송을 시작했으면 행시, 사시 안봐도 됐을 텐데, 그럼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는데…. 물론 방송이 내 적성인지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나는 알겠더라고요. 내가 받은 교육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줘서는 안된다는 거였죠. 그래서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냈습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그 일을 하라고.”
높은 청렴성과 인지도 때문인지 정치권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그는 “정치는 절대 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이다. 자신같은 사람이 정치판에 뛰어들면 바로 정치판 ‘왕따’가 될 것 같아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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