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공화국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을 닮았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8년여간 방송에 출연하지 못했던 탤런트 박용식씨(58).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닮았다는 똑같은 이유로 지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연기자로서 전성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 ‘TV 손자병법’으로 88년 방송에 복귀한 그는 이후 MBC 정치 드라마 ‘제 4공화국’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역할을 맡아 호연을 펼치며 95년 MBC 연기대상 인기상과 96년 백상예술대상 인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요즘 브라운관에서 그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싶었는데,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인 그는 요즘 본업인 연기자보다 사업가로서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동차 외형복원회사인 (주)세덴 회장으로 일하고 있는것. 사업 지분 외에 개인적으로 축적한 자산만 20억원에 이른다는 그의 성공 스토리는 많은 화제를 낳고 있다.
박씨가 처음 재테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지난 79년 겨울부터. 67년 TBC 4기로 입사해 연기생활을 시작한 그는 성격파 조연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당시 출연료로 받는 돈은 20만원에 불과했다. 지금으로 계산하면 월 2백만원 정도로 네 식구 생활비로는 빠듯한 수준이었다.
군에서 소령으로 예편해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던 선배의 조언으로 그도 살고 있는 단독주택 1층을 일부 개조해 13평 규모의 방앗간을 열었다. 당시 투자비용은 1백70만원 정도.
“연기생활을 한 10년쯤 했을 무렵인데 퇴직금도 없고 지금처럼 출연료가 높은 것도 아니고 애들은 커가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만 갔습니다. 연기자로서 안정감 있게 생활하려면 부업으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별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집사람과 함께 운영하면 되겠다 싶어 방앗간을 시작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위험 신호를 감지한 동물적인 본능이었던 것 같아요. 그 덕에 어려운 시절, 식구들과 먹고살 수 있었으니까요.”
부업으로 시작했던 방앗간은 80년 11월, 개업 1년 만에 박씨의 본업(?)으로 바뀌고 말았다. 어느날 TBC 방송국 국장이 조용히 그를 불러 “TV에 더는 출연할 수 없으니 성우로 전환하라”고 권유했던 것.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지 한달이 채 못 돼 전격적인 언론통폐합이 시작되면서 TBC가 국영방송인 KBS TV에 흡수됐고, 방송국 사장으로부터 ‘탤런트 박용식의 출연을 금지한다’는 엄명이 PD들에게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전해들었다. 훗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연희동 자택으로 초청, ‘그런 일이 있는지 몰랐다’며 사과했을 때야 그것이 측근들의 과잉 충성에서 비롯된 일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방앗간 운영하며 어렵게 생활하던 때도 수입의 50%는 항상 저축하며 살아
드라마 출연은 물론, 성우 섭외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지만 연극의 매력에 빠져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지 10년. 큰돈은 벌지 못해도 성격파 배우로 인정받는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온 그였다. 그러나 이제 연기자로서의 인생은 모두 접어야 할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는 한동안 술에 젖어 거리를 배회하다 공원에서 잠드는 방황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연기자이기에 앞서 네 식구의 가장인 박씨는 몸과 마음을 추스른 후 방앗간 일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아내 김전숙씨(54)와 함께 깨를 볶고 기름을 짜며 직접 배달을 맡았다. 방앗간이 생업이 되면서 오는 손님만 받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박씨는 도봉구 방학동 일대를 발로 직접 뛰며 적극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각종 기름과 보리차 신속 배달하는 강원 방앗간 박용식’이란 명함까지 만들어 시장통에 있는 작은 분식점이나 식당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적극적인 홍보를 한 것.
그는 현재도 은행 통장 20여개를 가지고 있는데, 예금총액이 4억원을 넘는다.
적극적인 홍보 덕분에 거래처가 늘어났다. 게다가 여의도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던 동기 탤런트 김종결씨의 소개로 여의도 곳곳의 음식점을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방학동에서 여의도까지 오토바이로 기름을 배달하다 동료 탤런트들을 음식점에서 마주칠 때는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연기자의 길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8년 동안 방앗간을 운영했지만 규모가 워낙 영세해 월 수입은 40만~50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려울 때일수록 돈을 모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 그는 수입의 40~50%는 저축했다. 그 결과 방앗간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4백만원의 목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 돈으로 집 바로 뒤에 붙은 50평 주택을 구입해 집 규모를 두배로 늘렸다.
박용식씨 인생에 햇볕이 들기 시작한 것은 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부터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박씨의 억울한 인생살이가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연기자로 컴백했다. 그 이후 몇년 동안 드라마, 영화는 물론 CF 출연, 야간 업소 출연까지 전천후로 활동하며 8년여 동안 쌓인 한을 모두 풀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생애 최고의 나날을 보냈다.
어려운 시기를 겪은 탓일까, 갑자기 소득이 많아지자 그는 더더욱 재테크에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그는 3년 동안 무려 5억5천만원을 모았다.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해 번 수입보다 야간 업소 출연료가 큰 몫을 했는데, 하루에만 12~13곳의 업소를 돌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수입이 늘자 그는 저축을 더 많이 했는데, 당시 소득의 약 70%는 바로바로 통장에 들어갔다.
이렇게 모은 5억5천만원으로 그는 부동산 투자를 시작했다. 포천 지역 2천평의 농장을 5천만원에 구입했다. 서울 근교라 개발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박씨에 따르면 부동산은 앞으로 개발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 어디인지 맥을 잘 짚는 것이 관건이라고 하는데 판교나 수원 영통지구에 비하면 수익이 적은 편이지만 장기 투자를 한 덕분에 14년이 지난 지금 현재 시세는 4억원으로 정확히 8배의 수익을 올렸다.그런가 하면 91년 초에는 자신의 단독주택을 헐고 1백평 대지에 60평 규모로 5층짜리 다세대 주택을 새로 짓기도 했다. 투자비용은 평당 1백70만원씩 5억원이 들었다. 그가 집을 새로 지은 이유는 두 가지. 일단 겨울에도 아파트처럼 따뜻한 집에 살고 싶다는 부인의 소망을 이뤄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집을 신축해 부동산 가치를 높이는 것이었다. 90년대 초는 주택가에 다세대 주택붐이 일던 시기였다. 주변에 쑥쑥 올라가는 고층 건물들 사이에 박씨의 단독주택이 묻히면서 집값이 나날이 떨어졌던 것. 부동산 중개업소에 집을 내놓기도 했지만 전혀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직접 새로 집을 짓는 방법을 선택했다. 현재 집의 시세는 12억원 정도인데, 5층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세로 임대를 놓은 상태다. 전세보증금 2억원을 제외하면 실제 자산가치는 10억원 정도라고.
방송에 복귀한 후 몇년 동안 엄청난 인기를 누리면서 큰 돈을 모은 후 91년부터는 본업인 연기에 충실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역할로 상도 탔고, 연기 경력이 쌓여 출연료 등급이 오른 덕분에 1년에 2~3편에만 출연해도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5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노후에 대한 불안감이 박씨를 엄습했다.
“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 힘이 들었습니다. 고정 프로그램이 끝나고 다음 섭외가 들어오지 않을 때 그 두려움은 더 커지죠. 더 늦기 전에 다른 인생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지난 2000년부터 2년여 동안 PC방, 노래방, 외식업 등 다양한 창업 아이템을 알아본 후 2002년 4월 자동차 외형복원 전문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그의 직함은 세계덴트칼라시스템 회장. 줄여서 (주)세덴 회장이다.
사업을 하기 위해 아이템을 고르던 그는 무궁무진한 시장성에 주목, 자동차외형복원 전문업체인 (주)세덴을 세웠다.
그가 이 업종을 선택한 것은 시장이 넓고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점 때문이었다. 자동차 2천만대 시대인 만큼 차 외장에 크고 작은 손상을 입는 일은 수 없이 일어나는 것. 이 황금어장에 뛰어들면 나름대로 사업 기반을 다질 수 있을 듯했다. 일단 신생 사업인지라 투자 위험이 있었고, 혼자 시작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지인 3명과 함께 각자 2억원씩 출연해 동업 형태로 창업했다. (주)세덴은 사업 시작 1년 9개월 만에 본사 직원수만 20명에서 70명으로, 가맹점포도 4백70개로 늘어나 월 매출액만 5억원에 이르는 중견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직은 투자 단계라 사업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월 3백만원에 불과하지만 매달 20~30%씩 성장하는 상황이라 지켜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고 한다. 그는 하루 12시간 이상 일에 매달리며 회사를 몇 년 안에 국내 최고의 중소기업으로 키워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가 부동산 투자나 사업 등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은 역시 저축이었다. 그런 만큼 요즘도 저축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통령상을 받을 만큼 저축하는 습관이 몸에 배인 박씨는 방앗간을 운영할 때부터 은행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는데 현재도 통장만 20여개를 가지고 있다. 상품 종류는 연금, 신탁이 중심이며 크게는 몇천만원에서 적게는 몇백만원까지 들어 있다. 저축액 총액만 4억원에 이른다.
성공 비결은 부동산, 창업, 저축의 안정적인 포트폴리오 구성 덕
박씨는 요즘처럼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일 때는 비과세상품이나 주식과 결합한 저축 등 수익성이 높은 틈새 상품을 찾아내 가입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은 나이가 있는지라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안락한 노후를 보내기 위해 연금형 상품 투자에 좀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의외의 자금 수요에 대비하기 위해 20여개의 통장 만기를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7년형까지 다양하게 만들었다.
우수 고객이라 은행 개인자산 전문가들이 친철하게 조언을 해주지만 어떤 상품에 가입할 지는 전적으로 박씨가 직접 결정한다. 가입할 때 은행별 상품 비교는 필수. 전화나 창구 방문을 통해 각 은행별 상품의 수익성과 안전성을 체크한 후 저축에 가입한다. 이는 20년 넘게 은행에 출입하면서 생긴 노하우다.
부동산 14억원, 저축 4억원, 창업지분 2억원 등으로 총 순자산이 20억원인 박씨지만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밥값과 담뱃값 정도가 전부로 한달 용돈이 30만~40만원에 불과하다. 지출을 할 때는 가능하면 신용카드 대신 현금을 사용한다. “현금을 내면 지폐나 동전으로 계산하면서 내가 얼마를 썼는지 한눈에 알 수 있어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드는 회사 업무와 관련해 사용할 때만 쓴다고 한다.
인터뷰 내내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박씨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자식들의 용돈은 얼마나 주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88년 이후 수입이 많아져 생활이 넉넉해졌지만 필요 이상의 용돈은 준 적이 없어요. 이제 큰아들과 딸아이는 직장에 다니면서 제 밥벌이를 하니까 용돈을 줄 필요없죠. 막내아들이야 아직 학생이고 공익근무를 하고 있으니까 얼마씩 주기는 하죠.”
박씨가 직접 밝힌 막내아들 재현씨(23)의 용돈은 대학생이 되고부터 주급 6만원씩 월 24만원. 한 통계에 의하면 대학생들의 평균 용돈은 30만~40만원으로 이와 비교한다면 좀 적은 것이 사실이다. 자식에게 물려줄 것은 돈이 아니라 생활력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넉넉지 않은 용돈은 아들에게 절약하는 법을 가르쳐줄 것이라고 한다.
박씨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재테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어떤 경우에도 수입의 절반 이상은 저축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종자돈을 모아놓아야 재테크 기회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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