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영화평론가 유지나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똑 부러지게 생긴 여자가 방송에 나와 ‘영화에 관한 한 내가 최고다’라는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놓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저 여자는 누굴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좋다’ ‘싫다’를 밝히는 그의 당당함은 사람들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의 당당함은 영화평론에 한정되지 않는다. 어쩌면 영화평론은 그가 여성운동을 펼치는 매개체일 뿐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끊임없이 직설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한국사회에 대해 시비를 걸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펼친다. 그가 프랑스에서 돌아와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게 91년이니 벌써 10년도 훨씬 넘었건만 그의 칼날은 여전히 날카롭기만 하다. 도대체 ‘그의 도발적일 정도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하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를 만났다.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실을 찾았을 때, 그는 며칠 후에 있을 세미나에서 쓸 영상자료를 편집하기 위해 제자와 함께 비디오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에 강렬한 붉은색 스페인풍 셔츠를 입은 그는 온몸으로 제스처를 써가며 빠르지만 딱 부러지게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당당함과 직설적인 화법이 인상적이었다.
유지나를 이야기하려면 아무래도 아버지에 대한 부분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 고(故) 유두연 선생은 일본에서 불문학과 영상미학을 전공한 엘리트로 50∼6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인의 한 사람이다. 유지나 역시 불문학을 전공한 후 영화계에 뛰어들었으니 아버지의 길을 뒤따라간 셈이다. 직·간접적으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제자와 함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유지나 교수.
유두연 선생은 굴곡진 삶을 살았다. 영화평론가로,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던 그는 전재산을 투자해 영화 ‘파멸’을 제작했지만 제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영화는 검열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공륜에서는 제목을 바꾸라고 했지만 지식인 감독으로서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영화는 개봉되지 못했다. 그로 인해 가세가 급격히 기운 것은 물론 유두연 선생은 충격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서라벌예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쓰러지신 후 집에서 요양을 했는데, 주로 제가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때 아버지로부터 영화와 관련해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어요. 함께 장기를 두거나 화투를 치는 게 고작이었죠(웃음). 오히려 초등학생 때라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아버지는 몸도 제대로 못 쓰는 웃기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몸도 제대로 못 쓰는 아버지에게 사람들이 끝없이 찾아왔고, 그들은 한결같이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그에게 일깨워주었다. 그래서 그는 ‘훌륭한 사람인 아버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영화’라며 영화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유지나 교수의 연구실엔 영화관련 서적과 비디오가 빼곡이 꽂혀 있다.
학창시절에도 그에게 영화는 관심 밖이었다. 오히려 어린 시절부터 언니 오빠가 읽던 프랑스 소설에 매력을 느꼈던 터라 자연스럽게 이대 불문학과에 진학하였다. 프랑스문학을 좋아하다 보니 고등학교 때 불어를 열심히 공부하였고, 대학도 불문과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영화를 하게 된 과정이 아주 복잡해요. 대학에 들어가 철학도 함께 공부를 했는데, 매우 심취를 했건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공허함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러다 만난 게 인류학이었어요. 특히 영상인류학에 심취하면서 자연스럽게 다큐멘터리에 매력을 느꼈죠. 그래서 영상인류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프랑스 유학을 꿈꾸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유학자금을 모으던 그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 생겼다. 영화진흥공사에서 영화아카데미 1기를 모집하는데, 학비 전액 면제에 학업 우수자는 유학을 보내준다는 매력적인 제안이 붙어 있었다. 그는 오로지 프랑스로 가서 영상인류학을 공부하기 위해 그곳에 지원을 했고, 수석으로 합격을 했다.
프랑스 유학중 한국영화 보며 페미니즘에 눈떠
비록 유학에 대한 영화아카데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그곳에서의 1년은 그가 영화로 전공을 바꿀 수 있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 7백만원을 들고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이란 게 다 고생스럽지만 당시 가장 힘들었던 것이 책을 살 돈이 없다는 거였어요. 돈이 없어 값비싼 책은 못 사고 복사를 했는데, 제가 약시라서 그게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프랑스나 외국에 가면 복수를 하는 심정으로 꼭 서점에 들러 책을 한아름씩 사요. 시간이 없을 땐 가장 큰 서점에 가서 제목과 목차만 주르륵 보고 골라 1시간 만에 몇백달러어치를 살 때도 있었어요. 한달 월급을 다 쓴 적도 있으니까요.”
그는 6년여의 공부 끝에 91년 프랑스 파리 7대학 영화기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단순한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시네페미니스트가 되어 있었다.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 있을 때에는 깊이 느끼지 못했던 우리 사회 여성관의 문제점을 프랑스에서 한국영화를 보며 절실하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유학 당시 그는 프랑스 영화를 한국에 소개하는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반대로 낭트 영화제에서 임권택 회고전의 기획과 진행을 담당하는 등 한국영화를 프랑스에 소개하는 일도 했다. 그런데 한국 영화감독을 초청해 기자회견을 하면 프랑스 기자들이 한결같이 묻는 질문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의 경우 ‘한국여자들은 저렇게 두들겨 맞습니까’ 하고 물어요. 영화 ‘씨받이’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끼리 저렇게 강간적으로 섹스를 합니까’ 하고 물어요. 그러면 한국 남자들은 그 대답을 못하죠. 사실이 그렇다고 말할 순 없잖아요. 거기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사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크게 피해를 본 경험은 많지 않았다. 가부장적이지 않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모두 여학교를 나와 남녀차별을 겪을 일도, 가부장적 사고관을 세뇌받을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영화아카데미에서 남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차별을 느끼긴 했지만 바로 프랑스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큰 갈등을 겪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 페미니즘은 싸워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모든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다 페미니스트예요.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살아가면서 가부장제에 조금씩 길들여지다가 죽기 직전에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되죠. 페미니즘운동은 그걸 빨리 깨닫도록 하는 것인데, 저는 그게 빨랐을 뿐이죠.”
그는 한국에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프랑스에서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돌아오자마자 한국영화에 대해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왜 영화는 한국여성의 리얼리티와 접속하려 하지 않는가’ ‘유치한 남성 판타지 속에 갇혀 그들만의 리그를 하는데 언제까지 그 게임을 계속할 것인가’ 하고. 그의 한국영화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지난해엔 ‘남성 판타지로부터의 탈주’ ‘여성의 주체성을 찾기 위한 영화평론가 유지나의 매혹적인 글쓰기’라는 부제를 단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따금 숨이 막혀요. 도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논쟁을 해야 하나 싶어 공허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아직 이 일을 그만둘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10여년 전, 그가 처음 페미니즘으로 무장한 채 목소리를 높였을 때 뒤에서 수군거리며 그를 힐난하는 남성들의 목소리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비난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법도 하건만 역시 ‘유지나’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제2차 CCD파리총회에서 우리나라 스크린쿼터제도에 대해 발제하고 있는 유지나 교수.
“전 비겁하게 뒤에서 몰래 비난하는 건 완전히 무시해요. 자신 있으면 얼굴과 이름을 내놓고 당당하게 하자는 거죠. 누구든지 상대하겠다는 입장이에요. 하지만 누구 하나 당당히 나서서 그렇게 한 사람이 없었어요.”
굳이 페미니스트라는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한국사회에서는 여성이기에 겪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벌어진다. 그 역시 한국에 돌아와 사는 이상 예외는 아니어서, 성희롱을 당한 적도 여러 번 있다고 한다.
“후배들이 저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면 저는 이렇게 충고해요. 절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차분하게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해 같은 남자들이 보기에도 문제라고 생각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정리를 해놓으라고. 그런 일은 반드시 또 일어나거든요. 그러면 그때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사람들이 다 있는 데서 왜 그 일이 잘못되었는지를 설명하라고 해요. 그럼 그 남자는 다시는 같은 행동을 못해요. 제가 그렇게 했거든요. 물론 그렇게 해도 해결이 안되면 법정소송까지 가야겠죠.”
한국사회에서 여성이기에 겪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
그는 영화평론을 통해 페미니즘을 전파할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계간지 ‘이프’ 편집인으로, ‘여성 관객 영화상’ 준비위원장으로, ‘안티미스코리아’ 격려(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여성해방 게릴라 프로젝트에 헌신하고 있다. 최근엔 여성계의 화두가 된 호주제 폐지운동에도 적극 가담하고 있다.
“저는 가장 보람있는 게 ‘안티미스코리아’가 이젠 소수인권운동가들을 위한 페스티벌로 정착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미스코리아선발대회가 최소한 공중파방송에서 방영되지 않게 된 데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사실 미인대회는 시대에 뒤떨어진 거잖아요.”
그는 “페미니즘은 저에게 종교이고, 열정이고, 존재의 근거”라고 했다. 그의 지난한 싸움들이 그걸 증명하는 듯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성운동을 하면서 “버리면 얻는 게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여성운동을 통해 생각이 같은 동료를 만났고, 그들과 서로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용기를 주고 격려를 하며 끈끈한 사상적 네트워크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영화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고 할 때가 있다. 등장인물의 작은 습관 하나, 말투 하나, 감정 묘사에서도 닮은꼴을 찾음으로써 지리한 일상 속에서 영화 같은 삶을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지나가 꿈꾸는 영화 같은 삶은 무엇일까. 그에게 영화들 속에서 자신의 캐릭터와 가장 맞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영화 ‘피아노’의 여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감수성과 ‘리타의 전설’의 리타처럼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테러리스트 같은 인물을 동경한다고 했다. 그다운 대답이었다.
“전 분열적인 모습이 있는 것 같아요. 마더 데레사 수녀처럼 헌신적인 삶을 살며 세상을 구원하려 하고 주위 사람을 돌보는 삶을 존경하는 한편으로는 마돈나의 파워풀한 여성성을 동경해요. 그래서 만약 지금 영화평론가가 안되었더라면 ‘사랑의 집짓기 해비타트 운동’으로 유명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나 마더 테레사 수녀 같은 삶을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마더 데레사 수녀와 같은 삶을 살기엔 지금 해야 할 일이 많아 보였다. ‘평소엔 여자 연예인들의 선정적 이미지만 탐닉하다가 몰래카메라 사건만 터지면 전통적인 요조숙녀론을 들이대는 남자 중심의 이중적 메커니즘’도, ‘연기 못하는 스타에게 수억원을 지불하는 한국영화의 짜증스런 공허함’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장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영화배우 문성근의 뒤를 이어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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