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막혀서 늦었다며 서둘러 들어서는 이혜숙(41)은 청바지를 멋지게 입고 있었다. 나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는 사진 촬영을 할 때도 카메라 앞에서 애매한 자세를 취하질 않는다. 때로는 섹시하게, 때로는 청순하게, 주저 없이 포즈를 취하는 그의 모습에서 뭔지 모를 ‘힘’이 느껴졌다.
얼마 전 KBS 드라마 ‘새엄마‘에서 전형적인 한국여인의 모습으로 열연해 좋은 반응을 얻었던 그는 현재 KBS 드라마 ‘헬로! 발바리‘와 MBC 미니시리즈 ‘위풍당당 그녀‘에 출연중이다. 그러나 두 캐릭터가 달라도 너무 달라 ‘이혜숙의 연기 폭이 훨씬 넓어졌다’는 얘기가 덕담처럼 오고 갈 정도다.
‘헬로! 발바리‘에서 하숙집 주인으로 나오는 그는 두번의 결혼에 모두 실패한 후 어린 딸을 데리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강인한 이혼녀로, ‘위풍당당 그녀‘에서는 잘 나가는 기업 회장의 둘째며느리로 나온다. 겉은 화려하고 우아하며 고상을 떨지만 한편으론 “얘, 얘, 조심해, 실리콘 터져”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속물 그 자체인, 다소 코믹한 인물이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스타덤에 올라 주인공만 하다가 어느 날 그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때 좌절하기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연기인생을 펼쳐갈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죠. 그리고 이 역할, 저 역할 다양하게 하기 시작했어요. 주변 사람들이 ‘저런 역할을 왜 하지’ 하며 의아해할 정도로 푼수도 됐다가, 얄미운 여자도 됐다가 했죠. 지금은 그렇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연기 폭을 넓히기 위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던 그가 이번엔 연극무대를 향해 조심스럽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데뷔 이래 ‘생방송’ 프로에는 단 한번도 출연한 적이 없을 정도로 관객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두려워했던 그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 더구나 연극무대는 20여년 만에 처음 서는 것이기에 더욱 그랬다.
“연극은 평생 딱 한번 해봤어요. 85년에 노주현씨와 함께한 ‘미시시피의 결혼‘이었는데 당시 성량 부족이라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일부러 연극을 선택했죠. 그 뒤로 간간이 연극 출연 제의가 들어왔지만 무대가 무서워서 다 거절하다가 이번에 악극 ‘빈대떡 신사‘ 총 제작을 맡은 김성환 선배님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거절할 수가 없어서 하게 됐어요. 막상 시작하고 보니 잘했다 싶어요.”
관객과 가장 가까이에서 호흡할 수 있는 연극무대의 매력에 푹 빠진 그는 요즘 하루 5시간의 혹독한 연습에도 힘든 줄 모르고 지낸다. 백일섭, 사미자, 정승호 등 쟁쟁한 선후배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훨씬 부담이 적고 오히려 즐겁다고.
며느리에게 “이 미련 곰탱아! 시에미가 나갔는지, 들어오는지도 모르냐?”하며 이씨를 구박하는 못된 시어머니 역할은 사미자가 맡았다. 이혜숙과 연기호흡을 맞추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미자는 “새침떼기 같아 보였는데 같이 일해보니까 전혀 안 그래. 정도 많고 착해. 성격도 느긋해서 내가 매일 ‘젊은애가 왜 그렇게 느려, 빨리 해’하고 잔소리를 좀 하지” 하며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인다.
이혜숙은 이 무대에서 그동안 감춰왔던 노래 솜씨도 보여줄 예정이다. ‘동백 아가씨’와 ‘여자의 일생’ 2곡을 부른다. “노래를 잘한다기보다 마음을 담아서 부를 뿐”이라고 했지만 실제 그의 노래솜씨는 수준급이다.
“요즘 40, 50대 주부들이 즐길 만한 문화가 너무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악극은 의미 있는 공연이라고 생각해요. 무대에서 연기자와 관객들이 함께 울고 웃으며 호흡할 수 있으니까요.”
이혜숙은 '빈대떡 신사'에서 수준급의 노래 실력을 발휘할 예정이다.
악극 연습하랴, 드라마 출연하랴 바쁜 일정 속에서도 처음 출연하는 악극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동안 한번도 출연하지 않았던 퀴즈 프로와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토크쇼까지 요즘 그는 악극 덕분에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인터뷰 당일도 개그맨 신동엽이 진행하는 KBS ‘해피투게더‘의 ‘쟁반 노래방’에 출연한다며 걱정을 했다.
“제가 워낙 퀴즈에 약하거든요. 조금 느린 편이라서 그런 프로에 출연해달라고 하면 난감해요. 나 때문에 재미가 없어질까 싶어서요. ‘쟁반 노래방’은 노래 가사만 잘 기억해서 부르면 되는 거지요? 못하면 쟁반으로 머리를 맞는다면서요? 뭐, 정 안되면 많이 맞고 말지(웃음).”
쟁반으로 맞는 것도 두렵지 않다며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그의 진짜 성격은 그동안 보여졌던 드라마 캐릭터와는 사뭇 달랐다. 새침떼기 같은 외모에도 불구하고 털털한 면들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문득 그의 가방 속엔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 열어봐줄 것을 조심스럽게 얘기했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선뜻 가방 속 물건을 꺼내 보인다. 소위 ‘무전기’라고 불리는 아주 오래된 구형 휴대전화, 샤넬 립스틱, 초콜릿, 사탕 두개, 점심을 못 먹어 챙겼다는 샌드위치, 그리고 길이가 짧아 잡기에도 불편해 보이는 빨간 색연필, 수첩, ‘빈대떡 신사‘ 대본, 지갑 등이 줄줄이 나온다.
“후배들이 나만 보면 휴대전화를 바꾸라고 말해요, 하지만 통화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는데 왜 바꿔요? 빨간 색연필은 대본 연습할 때 줄을 치는 데 쓰려고 항상 가지고 다녀요. 전 새것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에요. 물건도 한번 사면 싫증내지 않고 오래 써요. 이 옷도 한 6년 됐나?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결혼하고 이사 한번 안가고 10년 넘게 살고 있고, 아이를 돌봐주고 살림을 맡아주는 할머니도 10년째 같이 살고 있어요.”
그의 이런 모습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보다 한번 사귄 친구와 진득하게 오랫동안 사귀는 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성격이었던 것은 아니다. 79년, 18세의 나이로 연예계에 데뷔,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평소 내성적이던 성격을 스스로 바꾸었다.
“고등학교 때, 반에서 활달한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자기는 전교생과 다 말해봤는데 나처럼 말 걸기 힘든 친구도 없다고요. 내가 무섭거나 새침해서가 아니고 너무 조용하니까 그런 거였죠. 하지만 사회생활을 해보니 이런 제 성격이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선배님들에게 말을 걸고, 웬만하면 회식 자리에 빠지지 않고 따라다니면서 성격을 확 바꿨어요. 소소하고 작은 일에 신경 쓰기보다는 대범하게 일을 처리하는 법도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배웠죠. 전 운전하다가 모르는 길이 나와도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고민하지 않아요. 단숨에 결정하죠(웃음).”
된장찌개와 청국장을 특히 좋아하는 그는 무엇이든 잘 먹는다. 시장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나가서 양말 한짝을 구경해도 즐겁다. 옷차림도 평소에는 편안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평범한 아줌마라고 한다.
이혜숙이 연기생활 24년 만에 처음으로 출연하는 악극 '빈대떡 신사' 제작발표회 현장.
흔히 중견 연기자에게 붙여지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부담스러워해 함께 일하는 코디네이터들은 그를 ‘혜숙언니’라고 부른다. 지난 1년2개월 동안 일해온 코디네이터는 “혜숙언니는 솔직하고 여장부 같을 때가 많아요. 언제나 크게 생각하고 자질구레한 일은 신경 안 쓰니까 같이 일하기에 참 편해요. 처음 대할 때부터 스타라는 것을 전혀 느끼게 하지 않아 깜짝 놀랐어요” 한다.
‘쟁반 노래방’ 녹화 때도 “교복에는 가운데 가르마가 어울린다”며 작은 손거울을 꺼내 들고 단번에 쓱싹쓱싹 머리모양을 고친다. 연예인이라면 대개 텔레비전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해 어떻게든 예쁘게 나가려고 하건만 그는 상황 설정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킨다.
웬만한 건 깐깐하게 따지지 않고 넘어가는 그도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 바로 예절과 자기 주관이다.
“전 쟁쟁거리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예절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죠. 어른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는 젊은이들한테 불만이 많아요. 그리고 그런 걸 서구화된 자유문화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개방적인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자기 주관을 가지고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유 속의 질서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문화를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래야 개방적인 사고를 하면서도 자기 주관이 있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죠.”
당당하면서도 털털한 그가 ‘엄마 이혜숙’일 때는 어떨까? ‘쟁반 노래방’ 촬영현장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초등학교 4학년인 딸 서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혜숙은 딸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며 오랫동안 통화를 했다. “응, 신동엽 아저씨 싸인 받아서 가져갈게” “목요일에 방송 나간데, 그때 같이 보자” 하며 딸과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아이와는 친구처럼 지내요. 아빠는 무서워하는데 난 만만한지 아이도 나를 친구처럼 대하죠. ‘엄마, 오늘은 뭐해?’ ‘엄마, 언제 들어와?’ 하며 하루에도 서너통씩 전화가 와요. 요즘은 남자친구 이야기를 자주 해요. 성격이 낙천적이고 활달해요. 다만 형제가 없어서 자기만 아는 아이가 될까봐 그것이 늘 걱정이에요. 그래서 공부보다는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 모나지 않고 둥근 사람이 되라고, 양보하고 나누면서 살라고 말해요.”
간간이 딸 서원이 이야기만 나오면 이혜숙은 싱글벙글이다. 아이의 말투까지 흉내내며 세세한 일까지 다 이야기하는 그. 어젯밤에는 온종일 촬영하고 밤늦게 들어왔더니 서원이가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고 물수건으로 손과 발을 닦아주었다는 이야기, ‘위풍당당 그녀‘에 나온 엄마만 보면 ‘까르르’ 웃는다는 이야기, 스쿨버스가 있는데도 버스와 지하철 타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이야기, 딸의 남자친구인 ‘유진이’ 이야기, 딸의 담임선생님 이야기…. 밑도 끝도 없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것을 보니 그도 영락없는 엄마다.
그러나 일하는 엄마이기에 사실 아이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 서원이가 열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아침 “엄마가 탤런트 안했으면 좋겠어요” 하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무척 필요했던 모양이다. 당시 그가 너무 바빠 딸이 엄마 얼굴을 못보고 자는 때가 많았던 것. 이혜숙은 아이를 불러 “엄마는 이 일이 너무 좋단다. 그런데 이 일은 한가할 때도 있고, 바쁠 때도 있어. 요즘처럼 바쁠 때는 너에게 정말 미안하구나, 하지만 좀 한가해지면 엄마가 서원이랑 많이 놀아줄게” 하며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아이 스스로 정리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의 교육법은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고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것에 있었다.
요즘은 아이의 재능을 어떻게 살려줄까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독립적이고 활달한 성격인 서원이는 바빠서 일일이 챙겨주지 못하는 엄마가 말하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하는 아이다. 그는 “조기유학은 절대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 인사가 ‘유학 어디로 보냈어?’예요. 그럴 정도로 조기유학이 많은 것 같은데 어린아이를 미국에 보내면 미국 사람 되는 것 아닌가요? 어차피 어른이 되면 한국에 돌아와서 사회생활을 할 텐데 어떻게 적응하겠어요? 한국사람은 한국인으로 자라야지, 유행처럼 너도나도 보내는 것은 좋다고 보지 않아요. 남편도 유학생활을 해봤던 터라 절대 조기유학은 안 보내겠다고 말해요.”
92년 당시 영화사를 운영하던 한기은씨와의 결혼생활도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겼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금껏 딸 하나만 두고 있는 그. 외며느리인 입장을 고려하면 선뜻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서원이 낳고 몇년 동안 둘째를 가지려고 노력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런 와중에 시댁에서 먼저 ‘아들이건 딸이건 아이는 하나면 충분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시부모님이 좀 개방적인 편이에요. 남편도 자식 위주보다 부부 중심의 생활을 더 지향하고요. 둘째를 낳았다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지만 사람은 결국 혼자 살아가는 거잖아요. 자식이 언제까지 내 품안에 있겠어요? 그래서 서원이 하나로 만족하기로 했죠.”
이씨의 휴대전화에 ‘서원 엄마’라고 입력해준 남편과 이해심 많은 시부모와 시누이. 다 모여봐야 어른 6명과 아이 2명뿐이라는 단출한 식구들은 그에게 없어서는 안될 든든한 후원자들이다.
“남편이 많이 이해를 해줘요. 저녁을 못 차려주거나, 촬영 때문에 밤 늦게 들어가도 그때마다 제 입장을 이해해주니까 너무 고맙죠. 밤에 대본 연습을 하고 있으면 남편은 ‘그 대사는 이렇게 해봐’ 하며 시청자 입장에서 조언을 해줘요. 이젠 얼마나 예리한지 저의 부족한 부분을 콕콕 집어내요. 시어머니께서도 ‘아가, 그 드라마 참 좋더라’ ‘그거 히트하겠더라’하시며 식구들 모두 제가 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밀어주세요. 둘째 낳지 말고 연기생활하라고 말한 것도 시누이였는걸요(웃음).”
그렇다고 그의 결혼생활에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30대 초반에 결혼한 그는 미혼시절처럼 살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시집의 가풍을 익히길 바라는 식구들, 그리고 아내 노릇을 원하는 남편에게 적응하느라 참 많이 힘들었다고.
“결혼하고 나서 많이 싸우고, 울고, 폭발도 시켜보고, 참아도 봤어요.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까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혼한 지 10년이 넘다 보니 결혼은 도를 닦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고,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를 버리고…. 결국 나를 버리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결혼은 그에게 인생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해주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연기는 새장 속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는 새의 모습이었다면 얼마 전부터 서서히 바깥으로 뻗어나간 느낌이 든다고 했다.
“제 나이는 오히려 더 많은 역할을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때예요. 그래도 대학생 딸을 둔 엄마는 좀 심하지 않은가요? 제가 팍 늙은 것 같아 보여요(웃음). 호호… 농담이에요. 앞으로 폭넓은 연기자로 거듭나고 싶어요. 한 역할, 한 역할에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져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요?(웃음)”
조용한 듯하면서도 뚜렷한 자기 생각을 갖고 사는 그를 보며 다시 한번 그가 맡았던 배역들을 떠올려보았다. 그의 성격과 일치하는 배역은 없었던 듯싶으면서도 모든 배역 안에 그의 한 부분, 한 부분이 녹아있음을 느꼈다. 한마디로 ‘위풍당당’한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나이가 들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여자의 모습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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