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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참된 스승

어린이들의 영원한 벗, 전 명지초등학교 교장 류맹수씨의 제자사랑

■ 기획·이한경 기자 ■ 글·이주영 ■ 사진·김형우 기자

2003. 05. 07

고등학교 시절 한창 방황하는 사춘기의 아이들과 상담을 하면 그의 ‘말발’이 먹히고 팬레터가 쏟아질 만큼 제자들과 친하다는 교장선생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전 명지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인 류맹수씨를 만나러 가는 동안 내내 궁금했는데 실제 만나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하루도 빠짐 없이 매일 아침 아이들의 등교길을 지키는 등 30여년 동안 아이들을 향한 한결같았던 그 사랑 때문이 아닐까.

어린이들의 영원한 벗, 전 명지초등학교 교장 류맹수씨의 제자사랑

“저에게 가장 큰 재산은 바로 이 수첩에 적힌 아이들이에요. 남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돈이나 부동산 같은 건 제게 의미가 없어요. 제가 믿은 만큼, 아니 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멋지게 자라준 제자들이 바로 저의 귀한 재산이죠.”
온화한 얼굴에 밝은 미소를 띠고 기자를 맞은 류맹수 선생(77) 곁에는 그가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들도 함께 있었다. 98년 퇴임 후 지하철과 버스만 고집하는 그의 외출에 도움을 주고자 잠시 생업도 접고 기꺼이 달려나온 제자들이다. 인터뷰 내내 선생님 곁을 지키며 필요한 자료와 사진을 찾아오기도 하는 제자들을 보니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졌다. 조곤조곤 들려주는 그의 50년 제자 사랑 이야기는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요즘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인연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산세가 수려한 소군산 자락에 위치한 강원도 원주, 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평생의 스승인 전준덕 교장의 가르침을 잊지 못한다.
“그 당시는 지금과 많이 달랐어요. 일제 강점기라 우리말도 우리글도 없었을 뿐 아니라 제가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 산골마을은 몹시 가난해서 정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암울했지요.”
공부 대신 산으로 들로 다니며 부모를 도와 일을 해야 하는 가난한 살림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던 그는 그의 종아리를 때리며 꾸짖던 교장 덕분에 춘천사범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평생 교육자로 살면서 그때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라는 그 선생님의 음성과 종아리에 감기던 회초리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요. 저 역시 그런 스승이 되고자 평생 노력했지요.”
그 교장선생님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월급에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모교에 송덕비를 세우곤 매년 찾아보곤 한다고.
그는 사범학교 졸업 후 회성초등학교와 이대부고에서 교편을 잡다가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명지초등학교 설립에 참여한다.
“학교 인가를 받는 일에서부터 벽돌 한장 쌓는 일까지 제가 참여하지 않은 일이 없어요. 콩나물 교실에서 획일적인 수업을 하는 대신 아이들의 꿈을 하나하나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학교로 만들고 싶었지요.”
67년 명지초등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교장실에 앉아 있었던 시간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매일 아침 7시50분에 학교 앞 횡단보도에 나가 교통당번 교사가 오기 전까지 교통 안전지도를 하다가 바로 운동장으로 간다. 깨진 유리조각이나 종이를 말끔히 줍는 것도 그의 주요 일과 중 하나다. 거기에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다가 스쿨버스를 놓친 아이들을 자신의 차로 손수 데려다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 학부모로부터 ‘무쇠’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

어린이들의 영원한 벗, 전 명지초등학교 교장 류맹수씨의 제자사랑

류맹수 선생은 올해 2월 명예교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아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를 반긴다.


“스쿨버스를 운행하던 중 다른 초등학교 학생이 사고를 당한 일이 있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스쿨버스의 안전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모든 노선의 버스를 제가 직접 타서 학생이 어디에서 내려, 어떤 골목으로 들어가는지 일일이 체크했지요.”
류맹수 선생의 교육관은 한마디로 ‘칭찬과 격려’다. 인터뷰 내내 자리를 같이했던 제자들도 그가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착하고, 훨씬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어른들은 그걸 모르고 매번 아이들을 꾸짖고 다그치죠. 어느 학생이나 다 칭찬거리를 가지고 있어요. 자세히 살펴보고 그 아이가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어떤 장점이 있는지를 이야기해주어야 합니다. 아이는 어른이 믿는 만큼 멋지게 자라주기 때문이지요.”
그와 한번 맺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졸업 후에도 모든 학생들에게 수시로 전화해서 생활지도를 해주고 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진로 상담까지 해준다는 것.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그. 은퇴 후의 삶도 그다지 변화는 없다. 단지 학교 학생들에게 주었던 사랑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겼을 뿐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이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을 돌보는 호스피스나 재활원을 후원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사실 남편으로서는 아내에게 미안한 점이 많았어요. 평생 학교밖에 모르고 집안일은 거의 아내에게 맡겨두다시피 했거든요. 퇴직 후에는 여행이나 다니면서 못다한 남편 노릇을 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병을 얻어서 그만….”
명지초등학교 설립 당시 선뜻 집을 담보로 활동비를 대출해줄 정도로 남편이 하는 일에 무조건 믿고 따라준 아내였기에 그 빈자리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내를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그를 웃게 만드는 것은 역시 아이들이다.
“신이 저에게 다시 인생을 살 기회를 준다고 해도 교직을 택할 겁니다. 지난 50년 동안 매년 수많은 아이들을 새로 만나고 또 그들과 사랑에 빠졌어요. 정말 엄청난 수의 사람을 사랑한 거죠. 백지와 같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갈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 되는 일은 세상에서 제일 보람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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