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김일성 동상 앞에서 리영희씨 지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에서 세, 네 번째 서 있는 사람이 리씨와 팜 옥 카잉씨.
첫만남에서 결혼까지 걸린 시간이 꼭 31년이다. 신랑의 나이는 53세, 신부는 신랑보다 한살 많은 54세. 남들 같았으면 며느리나 사위를 보았을 법한 나이다. 그러나 결혼식장에 들어선 베트남인 신랑 팜 옥 카잉(PHAM NGOC CANE)과 북한에서 건너온 신부 리영희씨는 수줍음에 어쩔 줄 모르는 영락없는 처녀, 총각이었다.
지난해 12월13일 베트남의 하노이체육관. 관중석 한쪽에 내걸린 붉은색 휘장에는 ‘결혼식’이라는 한글과 ‘레 탱 혼(LE THAN HON)’이라는, 결혼식을 의미하는 베트남어가 함께 나붙었다. 이윽고 천명이 넘는 하객들의 박수 속에 이날 결혼식의 두 주인공이 저쪽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신랑은 푸른색 양복에 빨간 줄무늬 넥타이로 한껏 멋을 냈고, 신부는 북한 여성들이 큰 행사가 있을 때 즐겨 입는 짙푸른 벨벳 한복에 왼쪽 가슴에는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 천여명이 몰려들 정도로 관심을 모은 것은 이들이 국경을 넘은 사랑을 싹틔워온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무려 31년을 이어온 두 사람의 애정전선에 너무나 많은 극적인 고비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71년 여름. 22세의 베트남 청년과 23세의 북한 처녀가 흥남의 비료공장 한 모퉁이에서 처음 만났다. 베트남 유학생팜 옥 카잉이 북한 함흥공업대학 유학중 1주일간의 실습 기간에 흥남 비료공장을 방문했을 때 실험실 분석공으로 근무하던 리씨와 우연히 처음 마주친 것이 이날 결혼식의 서곡이었던 셈.
“한마디로 첫눈에 맘에 들은 거죠. 훤칠한 키에 부리부리한 눈매….”
하지만 이제 결혼생활 두달을 갓 넘긴 50대 초반의 새 신부 리씨는 여전히 수줍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 응한 리씨는 “그 사람 이야기가 전부”라며 마냥 쑥스러워했다. ‘그 사람’이란 기자에게 이들 부부의 소식을 처음 귀띔해준 한국인 사업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섬유업을 하는 이 한국인 사업가는 리씨 부부의 이웃에 살고 있는데, 근황을 전하기를 “리씨가 신경통과 관절염으로 고생하면서도 얼굴에는 늘 새색시 같은 기쁨이 흘러 넘친다”고 했다. 이 사업가는 “리씨 부부가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식사할 때마다 서로 반찬을 얹어주는 걸 보면 20대 신혼부부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난해 12월13일 베트남 하노이 체육관에서 있었던 결혼식에는 천명이 넘는 하객들이 이들 부부를 축하해줬다.
국경도 뛰어넘고 세월마저 건너뛰어버린 두 사람의 사랑은 순탄하게 결실을 보게 된 것이 아니다. 일단 냉전이 기승을 부리던 70년대초 1년 반이라는 짧은 유학기간에 북한당국의 엄격한 감시를 피해 만나는 것부터가 난관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카잉이 한국어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당시만 해도 말이 통할 리 없는 두 사람은 한달에 두세 번 달빛 아래서 눈빛을 주고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만나는 장소 역시 리씨가 일하던 흥남 비료공장 한켠이 고작이었다.
카잉은 한살 연하이고 까무잡잡한 남방 계통의 자신을 향해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하는 리씨를 만날 때마다 마음 착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이 애정 표현의 전부였다. 리씨 역시 속마음을 드러내지는 못한 채 겸연쩍은 미소로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연스레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약 없는 결혼 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30년 가까이 이어진 이별의 기간을 생각하면 이 짧은 만남은 그나마 두 사람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72년말 카잉의 유학 일정이 끝나면서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오히려 그때부터 깊어졌다.
팜 옥 카잉은 1년반의 북한 유학을 마치고 베트남으로 돌아갔고, 리씨 역시 결혼 약속을 했다고는 해도 사실상 체념한 상태였다. 베트남으로 돌아간 카잉으로부터 편지가 오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몇달 지나면 끝나버리려니’ 했다. 그런데 한달 두달, 아니 1년, 2년이 지나도 베트남에서 날아오는 편지 행렬은 그칠 줄 몰랐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카잉은 당시 북한의 리씨에게 편지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노이 주재 북한 대사관을 찾아가 리씨의 근황을 확인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북한 대사관 직원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대사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그를 실성한 사람쯤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그의 태도가 너무나 진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대사관 직원들도 리씨의 근황을 확인해 그에게 전해주는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자임하게 됐다.
북한 대사관측이 처음에는 일부러 리씨의 근황에 을 묻는 카잉에게 ‘허위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시집갔다더라’면서 그를 주저앉히려 했고 그 뒤에는 아예 ‘리씨가 죽었으니 그만 포기하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베트남과 북한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 변화도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에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베트남과 북한의 관계가 악화되자 소식이 오가는 것도 쉽지가 않았고,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협상을 개시한 91년 이후에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런 설득과 만류,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카잉은 결혼도 하지 않고 30년간 가슴속에 사랑을 키워갔다. 70년대 중반에는 회사측을 설득해 겨우겨우 북한 출장을 허락받고 리씨와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때 “언젠가 정식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 날이 있을 것”이라고 리씨를 다독거리기도 했다.
결혼식 후 이들은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중국의 한 공항에서 찍은 사진.
북한에 있는 리씨 역시 카잉만을 기다리며 오랜 세월 결혼도 하지 않고 지냈다. 그의 아버지 리호진씨는 한국전쟁 당시 월남했고 어머니 김춘자씨는 그가 어릴 적 사망했다. 고아나 다름없었던 그였기에 특별히 결혼을 강요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카잉을 향한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오랜 세월 카잉만을 기다릴 수 있었다.
나이 쉰을 넘기면서 리씨와 결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힘들어진 카잉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북한 대사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소식을 전해듣는 것으로는 도저히 길이 열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지난해 5월 평양 방문길에 오른 트란 둑 루옹 베트남 주석에게 편지를 보내 사연을 설명하고 도움을 호소한 것. 편지를 받은 루옹 주석 역시 전무후무한 30년간의 순애보를 접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루옹 주석은 북한을 방문해 북측 당국자들을 적극 설득했다. 이로부터 석달 후인 8월, 북한은 결국 팜 옥 카잉에게 리씨가 줄곧 미혼이었음을 시인하고, ‘북한-베트남 부부 1호’의 탄생을 허용했다.
국가 원수를 포함한 ‘외교 채널’까지 동원해 결혼에 골인한 팜 옥 카잉과 리영희씨는 지난해 10월18일 북한에서 이미 한 차례 결혼식을 올린 후 그해 1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두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북한에서의 결혼식은 하노이 결혼식과는 달리 몇몇 가족들만 모인 자리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이제 막 결혼생활 1년차에 접어든 초보 신랑인 팜 옥 카잉은 익숙지 못한 한국어지만 “행복해요, 행복해요!”를 연발했다. 카잉은 베트남 사이클연맹 회장 자격으로 지금까지 한국을 9차례나 방문했다. 한국에 올 때마다 부인 리씨의 ‘또 다른 조국’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숙연한 마음에 젖곤 한다고. 카잉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좀 설명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서툰 한국어로 “아주 힘들었어요. 몇 마디로 다 말할 수 없어요. 설명하려면 시간 아주 많이 걸립니다”라고 대답했다. 도무지 기약할 수 없는 부인 리씨와의 결혼만을 생각하면서 견뎌온 31년의 세월을 국제전화를 통해 몇분 동안에 취재해보겠다는 기자의 욕심은 애당초 무리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부인 리영희씨는 통화가 끝나기 전 마지막 소망을 하나 전했다. 바로 50년 전에 헤어진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것.
“아버지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요. 하지만 91년 여동생이 죽고 난 뒤에 북한에는 조카들만 남아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무슨 바람이 있겠어요.”
아버지 리호진씨가 월남할 당시 주소는 함경남도 흥남시 류정리. “남한에 살고 있을지 모를 아버지와 남편과 함께 어머니의 산소를 찾는 것이 소원”이라며 한숨짓는 리씨.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는 그이지만 그는 다시 또 다른 그리움을 잉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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