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유니폼을 입고 체육관 안을 누비는 아이들 중에서 인동기군(13)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동기의 키가 여느 아이들 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기 때문이다. 3월에 6학년이 되는 그의 키는 190cm. 제 또래 아이들 키보다 40cm 가량 더 크고, 아시아 지역 초등학생 중에서도 가장 큰 키다.
“전에는 키가 너무 크고 덩치도 커서 속이 많이 상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세계 제일의 농구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꾸준히 실력을 쌓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키가 큰 것도 유리하잖아요.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내 모습이 그냥 멀대처럼 보였을 텐데, 유니폼을 입고 뛰니까 정말 실력 있는 운동선수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열두살 되던 해에 이미 190cm가 된 인군은 지금도 한달에 1cm씩 꾸준히 자라고 있어 앞으로도 30~40cm는 거뜬히 자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등번호 33번의 유니폼을 입고 농구 연습을 하는 인군에게 “33번 번호가 참 좋다.”고 하자, 그는 얼굴을 붉힌 채 “원래 내 번호는 33번이 아니라 13번인데, 초등학생 기준에 맞춘 유니폼중 맞는 게 없어서 고등학교 선배들 유니폼을 얻어 입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임군은 신발 사이즈도 330mm로 “신발을 맞춰 신는 것도 쉽지 않다”며 걱정을 늘어놓는다.
인헌초등학교 농구부는 전국 초등학교 농구팀 중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팀이다. 창단된 지 6년밖에 안되었지만 그동안 전국대회 준우승을 비롯, 서울시 대회 우승 등 굵직굵직한 상을 여러 번 휩쓸었다.
방학중인데도 이곳 농구부 아이들은 매일 체육관에 모여 4시간씩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힘든 훈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의 표정은 매우 밝아 보였다.
“농구를 하기 전에는 아이들에게 키가 크다고 놀림을 받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데, 농구를 하고 나서부터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농구선수는 으레 키가 커야 한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좋아해주는 편이거든요.”
인군의 아버지인 인교선씨(44)는 “동기가 농구를 하고 나서 성격이 매우 명랑해지고 인생의 목표가 뚜렷해졌다”고 말한다.
지하철 탈 때 ‘어린이표’ 끊으면 늘 ‘검문’받는 초등학생
아버지보다 키가 큰 동기지만 얼굴은 아직도 앳된 소년 티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얼굴이 금세 발그스름하게 물드는 모습에서나, 상대방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얘기할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탄다. 하지만 농구코트 안에서는 악바리로 통한다. 공에 대한 집착력과 승부근성이 강해 한번 잡은 공은 절대로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한 취미생활도 없이 여느 학생들처럼 학교나 학원에 오가면서 컴퓨터 오락을 하는 게 생활의 전부였던 동기가 농구를 접한 것은 지난해 9월. 현재 인헌초등학교 농구부 코치로 활동하는 김영식 코치의 끈질긴 ‘구애작전’ 때문이다.
“주변에서 ‘초등학교 학생이 웬만한 어른보다 훨씬 크다’는 소리를 듣고 동기가 다니는 학교로 달려갔어요. 마침 운동회를 하는 날이었는데,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눈에 확 띄는 거예요. 키도 월등히 큰데다 운동신경도 매우 좋아 보였어요.”
그때부터 김코치는 일년 반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동기가 사는 시흥으로 찾아갔다. 동기군의 아버지를 만나 아들에게 농구를 시킬 것을 권유했지만 아버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동기군이 아무리 제 또래보다 키가 크고 운동신경이 좋다 해도 운동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로 키우려면 우선 돈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사실, 경제적인 부담도 됐고요. 또 앞으로 동기가 지금처럼 계속 클지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았어요. 괜히 어정쩡하게 운동을 하느니 아예 공부하는 게 낫다 싶었죠.”
하지만 이렇듯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완강히 버티던 동기군의 아버지도 매일같이 찾아와 간절하게 권유하는 김코치를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동기군을 농구부에 가입시켰다.
한때 큰 키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받아 의기소침해졌던 동기는 농구를 하면서부터 명랑해졌다고 한다. 인헌초등학교 농구팀학생들
“동기에게 농구를 시킬 것을 결심하고 아이한테 말하니 싫다고 하는 거예요. 매일 뛰어야 하고 연습하다 보면 자기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하면서요. 그래서 아이를 슬슬 달랬어요. 매일 집에서 컴퓨터만 하고 있으면 눈도 나빠지고 뚱뚱해지니까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키우라고요.”
처음에 농구하는 것을 꺼리던 동기였지만 한달쯤 지나자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코트를 이리저리 맘껏 누비며 자신의 큰 키 값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동기군의 태어날 때 몸무게는 4.3kg. 신생아의 평균치 몸무게를 웃도는 우량아인 셈이다. 동기군은 큰 키를 예감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먹성이 아주 좋았다. 우유도 하루에 5000cc 정도나 먹었을 정도.
동기군은 해를 거듭할수록 몸무게가 늘어나고 키도 쑥쑥 자라, 늘 제 또래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컸다.
그러나 잘 먹고 잘 자란다고 무작정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또래보다 키가 큰 것까진 좋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라야지 눈에 띄게 큰 키는 동기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아이들은 동기의 키가 크다며 ‘키다리 아저씨’라고 놀려댔고, 어린 마음에 그런 아이들의 놀림에 상처를 입은 동기는 주눅이 들어 아이들과 어울려 놀려고도 하지 않았고 학교 갔다 오면 그저 집안에서 홀로 있기 일쑤였다.
“아이가 잘 먹고 잘 자라니까 좋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슨 병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은근히 겁도 나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 가서 각종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거인증은 아니고 남들보다 성장판이 발달되었다고 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한시름 놓았지만 그래도 이젠 제발 그만 좀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동기의 가족도 각각 그 나이 또래보다 모두 큰 편이다. 40대 중반인 아버지의 키가 185cm이고, 엄마도 165cm이다. 고등학생, 중학생인 누나들은 170cm, 165cm인데 누나들도 앞으로 5~10cm 는 더 자랄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 가족들이 대체로 큰 것은 무척 잘 먹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남들은 자식들 보고 ‘제발 많이 좀 먹어라’ 하는데, 우리는 정반대로 ‘이제 그만 좀 먹어라’ 할 정도로 다들 참 잘 먹어요. 다행인 것은 그렇게 많이 먹으면서도 농구를 하고 또 인스턴트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먹는 만큼 살이 찌지 않고 비만도 아니라는 거지요.”
큰 키 때문에 동기군이 겪는 일도 재미있다. 특히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학교 도서관증 등 자신의 나이를 알릴 수 있는 것들을 꼭 지참해야 한다.
지하철 표를 끊을 때도 ‘어린이 표’를 달라고 하면 대부분 동기군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다고. 그러고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표를 주는데 영 개운치 않은 눈치를 보내 괜시리 뒤통수가 따가웠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라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지 며칠이 안 지났을 때, 담임 선생님이 동기군을 보고 “고학년이 왜 2학년 교실에 와서 앉아 있느냐?”고 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 적도 있다.
유난히 큰 키로 인해 불편한 게 어디 그뿐이랴. 무엇보다 또래 아이들처럼 초등학생답게(?) 옷을 입을 수도 없다. 동기 나이에 맞는 옷을 찾으면 치수가 맞지 않아 그는 늘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입는 옷을 입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키가 크고 덩치가 좋다 보니 각 학교 농구부나 축구부, 배구부 등 많은 운동팀 관계자들이 동기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수시로 동기네 집을 드나들었다. 그로 인해 동기 아버지는 지은 죄도 없이 오로지 키 큰 아들로 인해 밤낮 운동코치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하루에도 전화가 열두번은 더 와요. 동기를 운동선수 시키면 좋겠느니 어쩌니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달려드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더라고요.”
어떻든 동기군은 현재 농구선수가 되어 열심히 코트를 누비고 있다. 장래 희망도 한국 최고의 선수가 되어 국가 대표로 활동하는 것이다. 기회가 닿는다면 미국 프로농구(NBA)에도 진출하고 싶단다.
한때 또래아이들과 달리 자신의 큰 키, 큰 덩치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던 동기군.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신체적 조건을 십분 살려 당당하고 묵묵히 자신의 꿈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 그가 코트 위에 뿌리는 땀방울이 훗날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루기 위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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