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의환향’이라는 표현은 그의 귀국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가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이번 사무총장 선거에 무심했던 정치인들까지 그와 손 한번 잡아보려고 줄을 서기까지 했다.이종욱 당선자(58)는 이번 방한길에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당선 축하연에 참석한 후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를 차례로 예방했다. 김대통령은 “WHO가 북한을 잘 도와달라”고 했고 이 당선자는 “퇴임하면 WHO가 주최하는 국제 규모의 회의에 초대할 테니 좋은 말씀 많이 해달라”고 답했다.
노당선자는 다소 당혹스런 질문을 던졌다.
“더블유에이치오가 뭐하는 뎁니까?”
이 당선자는 WHO에 대해 설명한 뒤 “북한의 말라리아와 결핵 퇴치 사업을 돕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을 지원하고 싶다면 WHO가 하나의 채널이 될 수 있으며 WHO를 통하면 투명하게 사업을 시행할 수 있고 사후 확인 작업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WHO의 사무총장이 됐다며 예방하는 자리에서 “WHO가 뭐하는 곳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선자는 “오히려 솔직한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만큼 한국인들은 평균적으로 국제기구에 대한 인식이 없는 편이다.
서울대 의대 졸업 후 편안한 삶 버리고 나병환자 돌보러 오지로 떠나
사실 WHO는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밀접한 일을 하는 곳이다. 소아마비 환자가 사라진 것이나 결핵 환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은 WHO의 질병 퇴치 사업 덕분이다. 다이옥신의 일일 섭취 허용치 등 각종 기준치를 정하는 것도 WHO이며 비만이 질병으로 분류된 것도 WHO의 유권 해석에서 비롯됐다. 최근에는 담배를 규제하기 위한 국제 조약안 의결을 추진중이다.
이 당선자는 해방둥이로 서울에서 태어나 경복고와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그 연배에 이만한 학연이라면 국내에서 편안한 삶은 보장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당선자는 쉬운 길을 놔두고 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를 WHO와 인연을 맺게 해준 것은 나병이었다. 이 당선자는 대학 재학 시절 경기도 안양시 나자로마을에서 나병 환자를 돌보는 봉사활동을 했다. 졸업 후에는 하와이대에서 나병을 연구할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달려가 나병 전문의 자격을 땄다.
나병 전문의가 된 이 당선자에게는 세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연구활동을 계속해 대학 교수가 되는 것, 또 하나는 미국 의사 면허로 돈 버는 것, 나머지는 WHO에 취직해 오지를 돌며 ‘사서 고생’을 하는 것.
그는 연구실에 앉아 있는 체질은 아니었다. 또 한국 국적으로 미국에서 일류 의사가 되기는 어려워 보였다. 83년 피지섬에 있는 WHO 남태평양 사무처에서는 나병 전문가를 찾고 있었고, 이 당선자는 이 길을 택했다.
그는 20년간의 WHO 생활 가운데 절반 가량을 스위스 제네바의 본부에서 멀리 떨어진 남태평양과 서태평양의 오지에서 고생해가며 진료활동을 했다.
이같은 경력을 두고 사람들은 그에게 ‘나환자 고름 닦던 의대생’ ‘가난한 자를 돕는 박애주의자’라는 수사를 붙인다. 그러나 그는 “내가 좋아서 한 일일 뿐”이라고 했다.
“희생과 봉사정신만 있었다면 1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다. 남들은 힘들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그 일이 무척 즐거웠다”는 것.
이 당선자가 나병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희생이나 봉사정신이 아닌 호기심 때문이었다. 나병이 대체 어떤 병이기에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하고 무서워하는지 알고 싶었다. 마치 귀신이 나온다며 사람들이 발길을 끊은 집에 기어코 찾아들어가 소문을 확인해보고 싶은 오기라고나 할까.
그는 낙도에서의 험난한 생활도 즐겼다.
“고교시절 미국문화원에서 제임스 미치너의 ‘남태평양 이야기’를 빌려 읽고 ‘여기 나오는 섬들을 다 가봐야지’ 하는 꿈을 꾸었죠.”
그는 책에서 본 타히티 뉴칼레도니아 솔로몬군도 등 남태평양 구석구석을 다 돌아다녔다. 덥고 물 것 많은 섬생활은 고단했다. 환자가 제 발로 찾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 나병퇴치 팀장을 맡고 있던 그는 현지 사정에 밝은 원주민들과 탐험대를 조직해 이섬 저섬 나병 환자를 찾아 다니며 약을 공급했다.
사무총장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WHO의 그로 할렘 브룬틀란 사무총장이 이종욱씨의 손을 맞잡고 차기 사무총장의 당선을 축하해 주고 있다.
섬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까지 차로 달려봐야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좁은 곳에서 생활하다 보면 ‘섬 열병(rock fever)’에 걸리기 쉽다. 이를 극복하려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마약을 하거나 동성연애자가 됐다. 미국인 간호사가 영국 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는 일도 있었을 정도로 제 정신으로 살긴 힘든 곳이었다.
그래도 그는 재미가 있었다. 책에서 보던 섬들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책과 실상을 비교해보는 일도 즐거웠고, 원시림에서 고생고생하다 호텔로 돌아와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는 차가운 음료수 맛도 좋았다. 어디를 가든 의사는 꼭 필요한 존재로 대접받았다. 예쁜 원주민 아가씨들은 그런 그에게 소박하지만 정성스럽게 차린 밥상을 내밀기도 했다. 이 당선자는 자신의 일을 두고 “수지맞는 일은 아니지만 낭만적인 일임에는 분명했다”고 말한다.
이 당선자는 94년 백신국장이 돼 제네바 본부로 ‘입성’한다. 이는 섬마을 선생님이 서울 교육부의 국장 자리로 옮긴 것과 같은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 당선자는 백신국장 재직시 소아마비 유병률을 1만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려 박멸에 가까운 성과를 올렸다. 2000년 12월 결핵국장으로 옮겨와서는 북한에 6만명분의 결핵약을 공급하는 등 19개 국가의 결핵 퇴치 사업을 벌였다.
WHO의 사무총장이 되면 직원 5천명에 연간 11억달러의 예산을 쓰는 유엔 최대 최고(最古)의 전문 조직의 CEO로 역할이 바뀐다. 밖으로는 국가 원수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으며 인류의 건강과 관련된 주요 이슈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외교적 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그의 최근 관심사는 에이즈다. 이라크 전쟁이 임박하면서 난민들의 보건문제도 대책을 세워야 한다. 천연두 박멸 후 미국과 러시아에 연구용으로 맡겨둔 천연두 세균이 생화학 무기로 활용될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대만의 WHO 옵서버 참여를 둘러싼 대만과 중국간 신경전에서도 그는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국제기구도 돈으로 굴러가는 조직이다. 사업가들이 투자자를 찾듯 WHO도 기금을 모은다. 기금의 공여자는 각국 정부나 시민단체, 기업, 재단 등이다. 그는 기금 모금에도 수완을 발휘해 백신국장 재직 시절 백신 연구기금을 1천5백만달러에서 7천만달러로 늘려놓았다. 이중에는 테니스 선수 마르티나 힝기스로부터 받은 7만5천달러도 포함돼 있다.
“돈을 쫓아가면 절대 돈이 안 들어온다. 세상에는 돈을 잘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색을 내가며 돈을 쓸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놓으면 돈은 절로 들어온다.”
이 당선자는 직원들에게 프로그램 개발을 맡긴 뒤에는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직한 실수라면 거듭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기금을 모은다는 것은 유전을 파는 것과 같아서 99번 실패하더라도 마지막 100번째 유전에서 기름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밥이 다 될 때까지는 뚜껑을 자주 열어보면 안된다”는 것이 곧 그의 신조다.
더 많은 책 읽기 위해 각 나라 언어 공부한 사람
인류의 건강을 책임지는 WHO 사무총장 후보의 자격조건 중 하나가 후보자 자신의 건강이다. 일년에 4~5개월은 비행기를 타고 현지 답사를 하거나 기금 기부자나 정치적인 인물들을 만나러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당선자는 적게 먹고 운동을 많이 한다. 섬에 살 때는 해양 스포츠를 즐겼다. 제네바에서는 프랑스 샤모니의 몽블랑에 올라 스키를 탄다. 동네 산에 자주 오르고 레만호의 산책 코스도 자주 찾는다. 골프는 시간이 오래 걸려 치지 않는다.
아침은 거른다. 사무실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정도다. 점심은 작은 샌드위치 조각으로 대충 때운다. 하루 세끼 중 제대로 챙겨먹는 것은 저녁 정도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지만 각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에게 마늘 냄새를 풍기기 싫어 강한 양념은 피한다.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아버지가 후두암으로 돌아가신 이유가 담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술은 와인을 즐겨 마신다.
몸무게는 늘 63㎏을 유지했는데 선거를 치르는 동안 운동을 쉬었더니 65㎏으로 불었다. 이 당선자는 비만은 만병의 근원이라며 현재 다이어트중이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느냐는 질문에 “독서를 한다”고 했다. 최근에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오디오 테이프로 들으며 책과 비교해 읽는 취미를 붙였다. 밤에 오디오 테이프를 듣고 있으면 잠도 잘 오고 매주 2~3차례 하는 연설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는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외국어를 하나하나 배워 나갔다. 고교 시절 원서로 토머스 하디의 ‘귀향’ ‘비운의 주드’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등을 읽었다. “카뮈의 ‘페스트’를 불어로 읽으면 어떨까” 궁금해 프랑스어를 공부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을 원어로 읽고 싶어 일본어를 독학했다.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시작한 어학 공부는 국제기구에 근무하면서 요긴한 도구가 됐다. 영어와 일본어권에 방문할 때면 통역이 필요없다. 프랑스어는 필요할 경우 연설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사무총장 선거 운동차 들른 영국에서는 이렇게 우스갯소리를 했다.
“예전에는 자신이 섬기던 왕을 죽이고 왕이 되는 맥베드를 즐겨 읽었는데 요즘엔 햄릿을 읽는다. 선거에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영국 사람들도 못 외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줄줄 외어대는 그를 ‘무식한 동양놈’이라고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어로 고전 읽기가 코쟁이들과의 기싸움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고전에 현대인들이 고민하는 문제의 해답이 숱하게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5년전 노르웨이에서 최초의 여성 총리를 지낸 그로 할렘 브룬틀란 총장이 취임하자 그는 여성 상관을 잘 보필하기 위해 14세기 영국 작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초서는 그 책에서 6백년 후의 독자에게 이렇게 귀띔했다.
“여자란 상대가 남편이든 애인이 됐든 매사에 컨트롤하고 싶어하는 존재다.”
이제 조직의 보스가 됐으니 성공하는 CEO가 되는 법이나 리더십에 관한 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상투적인 의견에 그는 대번 “그렇게 건조한 책을 읽어서는 좋은 리더가 될 수 없다. 경영에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려면 고전을 읽어야 한다”며 반론을 제기한다.
그의 국적은 한국이다. 지갑 속에는 서울시 동작구청장의 직인이 찍힌 주민등록증을 넣어 다닌다. 하지만 국내외 어디에도 그의 집은 없다. 현재 그는 제네바 인근에서 아내 레이코 여사와 월세 아파트에 산다. WHO 국장의 연봉은 12만달러(약 1억5천만원)이며 자녀 1명당 연간 1만4천달러의 교육비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나온다. 그는 코넬대 전기공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아들 충호씨(26)의 학비(연간 5만달러)를 대느라 집을 사지 못했다고 했다.
충호씨를 미국에서 낳았으면 미국 시민권이 있어 학비가 덜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당선자도 그의 아내도 그런 궁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어려서부터 아들에게 책을 많이 읽히고 지능 발달에 좋다는 레고 블록을 사주고 종이와 연필을 방안 가득 넣어줘 마음껏 그리고 놀도록 했을 뿐이다.
이 당선자는 조직에서도 그렇듯 집에서도 가장으로서 권위를 세우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나자로마을에서 봉사하며 만난 동갑내기 영문학도인 레이코 여사는 결혼 당시 일본 국적을 유지하겠다고 했고 이 당선자는 말리지 않았다. 요즘에는 바쁜 남편의 내조에만 매달리지 않고 일년의 절반은 페루에 가서 산다. 그곳의 극빈촌 사람들을 도와 미국 수출용 수공예품을 만드는 봉사활동을 한다. 영어, 프랑스어에 유창한 레이코 여사는 이를 위해 요즘 스페인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아들 충호씨도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정서는 미국인에 가깝다. 이 당선자 내외는 파란 눈의 며느리를 맞을 각오도 돼 있다. 미국 대학으로 유학 갈 때도 “마약하지 말고 콘돔은 꼭 써라”고 당부했을 뿐이다.
이 당선자는 5년간의 사무총장 임기가 끝나면 프랑스 남부의 휴양지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집도 없고 모아둔 돈도 많지 않아 걱정은 되지만 사무총장이 되면 연봉이 수당을 빼고 22만달러로 오르고 퇴직 후에는 월 7천달러의 연금을 받는다.
서울에는 누나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국민참여본부장을 지낸 남동생 이종오 계명대 교수, 이종구 성공회대 교수가 있다.
“나이 들면 누이와 형제가 있는 고향에 오고 싶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서울은 답답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매년 한두 차례 한국에 들른다. 그때마다 빠짐없이 서점에 들러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만한 책들을 골라 간다. 다음에 한국에 오면 “무진에 꼭 가고 싶다”고 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그려진 가공의 도시 ‘무진’의 명물인 안개를 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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