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 1월말 뜻밖의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전화의 주인공은 영화배우 박신양(35)의 매니저였는데 “박신양씨가 <여성동아>와 독점으로 인터뷰를 하고 싶어한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뷰 조건은 단 한가지. 그가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들어주고 가감 없이 실어달라는 것뿐이었다.
몇달 전부터 정식으로 인터뷰 요청을 하고 답변을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가 인터뷰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이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워낙 인터뷰를 잘 안하는데다 프라이버시에 관한 인터뷰라면 질색을 하는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인터뷰를 하겠다고 결심을 했다니 내심 설렐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와의 인연은 아주 오래 전에 시작됐다. 그가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연기자로 첫발을 내디딜 무렵이었다. 첫 만남은 한 드라마의 제작발표회장에서 이뤄졌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한 영화관계자가 “앞으로 좋은 배우가 될 것 같은 사람이 있는데 미리 인사를 하지 않겠냐”며 그를 소개했다.
그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학생 같았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가방을 멘 그의 모습에서 화려한 배우의 이미지를 찾기란 조금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 영화관계자의 예언처럼 드라마 <사랑한다면> <내 마음을 뺏어봐> 영화 <편지> <약속>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 가운데 한명으로 성장했다.
그와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한 것은 영화 <편지>의 개봉을 앞두고 있던 97년 가을. 무려 6년 만의 만남이었다. 인터뷰가 성사됐다는 흥분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인터뷰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그가 가벼움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진중한 배우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만남
인터뷰는 그가 영화 <4인용 식탁>을 촬영하고 있는 부산에서 이뤄졌다. 복잡한 서울을 떠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공교롭게도 인터뷰 장소로 결정된 곳은 파라다이스 호텔. 그가 부인 백혜진씨(22)를 처음 만났다고 알려진 곳이다. 2월4일 오후 6시 약속 장소인 파라다이스 호텔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같은 시간 그는 엉뚱하게도 호텔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제안으로 그곳에서 먼저 사진 촬영이 이뤄졌다.
“지금도 그 날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요. 후배와 운동을 하려고 러닝머신 옆을 지나는데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왔어요. 진이(박신양은 부인 백혜진씨를 이렇게 불렀다)가 바로 저 러닝 머신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죠.”(그는 헬스클럽 내에 있는 러닝 머신 가운데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운동을 마치고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헬스클럽을 떠나는 백혜진씨를 따라나간 그가 백씨에게 처음 말을 건 곳은 헬스클럽 앞 복도. 그는 그곳을 자신이 처음 백씨에게 프러포즈를 한 곳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열세살 연하 아내와의 만남은 운명, 그녀를 만나고 인생이 분명해져
사진 촬영을 마친 후 그가 머무는 방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침대 위에 놓인 <아빠가 들려주는 태교동화> 책이었다. 기자가 그 책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는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는 아내에게 매일 밤 전화로 책을 읽어준다고 했다.
-전화로 책을 읽어줘도 태교에 도움이 되나요.
“그럼요. 진이 말로는 제가 책을 읽어주면 우리 별이(4월에 태어날 아이의 이름이다)가 뱃속에서 좋아하는 게 느껴진대요. 한창 신이 나면 발길질도 하고요. 원래는 1월초에 영화 촬영이 끝나면 진이와 함께 떠나기로 했는데 예정보다 늦어져서 이렇게 떨어져 있게 됐어요. 대신 하루에 4~5번씩 통화하고 전화로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죠.”
-두사람이 정말 우연히 헬스클럽에서 만났나요.
“왜요. 그것도 거짓말이라고 하던가요. 사실 전 결혼을 발표하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많이 놀랐어요. 그동안 제가 인터뷰를 잘 하지 않았던 건 저 스스로 배우가 아닌 (연기를 공부하는) 학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저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제 결혼에 대해 보인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까 저는 분명 배우가 맞더군요. 저는 결혼을 해서 기쁜데 남들은 욕을 하더군요. 제가 영국 황태자인가요? 아니면 마이클 잭슨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저를 괜찮은 신랑감 가운데 하나로 생각했던 걸까요? 제가 그때 마음고생을 했다면 사람들이 진이에 관해 떠든 말 때문이 아니라 저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어요.”
그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간 적지 않은 상처를 받은 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지난해 8월 백혜진씨와의 결혼 계획을 발표한 직후부터 각종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부인 백씨의 결혼 전력을 둘러싼 소문부터, 그가 백씨의 과거를 알고 충격을 받아 음독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문, 지난해 10월 결혼할 당시 부인 백씨가 이미 임신중이었다는 소문 등이다.
일단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듣는 게 순서일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4월5일. 그는 전날 부산에서 열린 한 모터쇼에 참석한 후배의 초청으로 부산을 찾았고 백혜진씨는 가족들과 함께 여행중이었다. 그나 백혜진씨 모두 파라다이스 호텔에 묵은 것은 처음. 더욱이 평소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백씨는 4월5일 오후 처음으로 호텔 헬스클럽에 들렀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운명 같아요. 사실 전 후배 전화를 받고도 부산에 내려가지 못할 뻔했어요. 마침 연휴라 비행기표가 없었거든요. 그랬더니 후배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통해 표를 구해줬어요. 저는 그 표로 부산에 왔고 진이를 만났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건너건너 표를 구해준 분이 바로 저희 장인이었어요. 그때는 장인도 제가 누군지 모르고 아는 사람이 부탁을 해서 표를 구해줬다고 해요.”
그는 운명의 그날 점심을 먹고 후배와 함께 운동을 하기 위해 헬스클럽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표현을 빌리면 러닝머신 옆을 지나다 ‘온몸이 전율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그가 운동을 하기 위해 기다리자 마침 백씨 곁에서 뛰고 있던 남동생이 내려왔고 그와 백씨는 나란히 러닝머신 위에서 15~20분 정도 달리기를 했다.
달리기를 끝내고 역기 운동을 하고 있던 후배 곁으로 간 그는 후배에게 먼저 백씨가 “예쁘냐”고 물었다. 후배의 대답은 한마디로 “예스”였다. 마침 안경을 쓰지 않아 백씨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없었던 그는 다시 백씨가 무척 앳되다는 생각을 하고 “고등학생 같냐, 대학생 같냐”는 질문을 했다. 이때 후배의 대답은 “중학생 같다”였다.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진이가 장모님, 처남과 운동을 끝내고 나가더라고요. 이대로 그녀를 보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무작정 복도로 나가 진이에게 말을 걸었어요. 딱 세가지를 물었던 것 같아요. 먼저 나이를 확인한 뒤 이름을 묻고 저녁식사를 함께할 수 있냐고요.”
두 사람이 함께한 저녁식사 자리에는 장모님, 처남도 같이 했다. 그리고 식사 자리에서 백씨가 이튿날 서울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다음날 아침도 함께 먹자는 제안을 했다. 아침 6시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아침식사를 한 뒤 우산을 쓰고 비가 내리는 해운대 바닷가를 산책했다.
-다음날도 첫날과 똑같은 느낌을 백혜진씨에게 받았나요.
“물론입니다. 전 첫날부터 진이를 내 여자라고 확신했어요. 청바지에 티셔츠, 스니커즈 차림의 진이는 화장을 별로 안했는데도 예쁘더라고요. 또 어찌나 착한지 한마디로 ‘아기’ 같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장모님과는 다르게 장인은 저와 만나는 걸 반대했다고 해요. 진이가 아직 어리니까 많이 염려를 하셨던 것 같더라고요. 어쨌든 저는 진이를 만난 이후 우리의 관계에 대해 어떤 의심이나 불신이 없었어요. 제 인생이 너무 분명해졌죠.”
그가 처음 백혜진씨에게 프러포즈한 곳을 알려주고 있다(위). 두 사람은 바로 이 러닝머신 앞에서 만났다.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됐을 무렵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그의 매니저가 휴대 전화를 들고 달려왔다. 누군지 묻지 않아도 상대를 알 수 있었다. 전화를 건네 받은 그는 “벌써 잘 시간이네. 그런데 오늘은 어쩌지. 우리 별이한테 책을 못 읽어줄 것 같아. 인터뷰중이거든. 나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난 헬스클럽이랑 복도에서 사진 찍었다. 나중에 너 보여주려고. 그래, 인터뷰 잘 할 테니까 너도 잘 자고 내일 통화하자”라고 말했다.
-굉장히 다정하시네요.
“(싱긋 웃으며) 그렇게 느껴지셨나요? 사실 제 꿈이 착하고 성실하고 큰소리 안 나는 가정을 일구는 거였는데 그 소원이 이뤄진 것 같아요.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양가 가족이 모여 파티를 했어요. 제가 직접 스테이크 10인분을 만들었죠. 그러다 장인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짐을 꾸려 3박4일 일정으로 강원도로 놀러 갔어요. 하루는 새벽에 장인과 스키를 타는데 장인이 ‘사위랑 새벽 스키 타는 기분도 좋은데’ 하셔서 기뻤습니다. 진이는 딸이 없는 저희집에 딸과 같은 존재고, 저는 처가에 큰아들 같은 존재예요.”
-경기도 일산 부모님댁 바로 옆에 사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장남이고 한번도 부모님과 떨어져 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일산에서 살겠다고 하니까 진이도 두말 않고 동의했어요. 밥은 부모님댁에서 먹고 잠만 저희집에서 잡니다. 한마디로 ‘따로 또 같이’죠. 저는 일산이 좋아요. 30분만 나가면 도처에 이름없는 산이 널려 있는 걸요. 강남은 복잡하고 지역이 좁다 보니까 사람들끼리 서로의 공간을 침범해서 싫어요. 원래는 원당에 살다 결혼하기 전에 현재의 집으로 이사를 했죠. 저희집에 있는 가구들은 모두 제가 직접 디자인했어요. 마침 그 무렵에 서울 강남에 있는 오피스텔도 이사를 해야 해서 정말 바빴어요.”
-자살을 시도했다고 알려진 것도 그 무렵 아닌가요.
“맞아요. 저는 원래 한번에 하나밖에 못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때는 결혼 준비하랴 가구 디자인하랴 오피스텔 옮기랴 정신이 없었어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죠. 자려고 해도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잠을 못 이뤘고 푹 자고 싶은 욕심에 수면제를 복용했다 탈이 났던 것 뿐이에요.”
-백혜진씨와 관련한 소문 때문이 아니군요.
“재밌더라고요. 그 일이 있고 나서 4천명이었던 팬카페 회원이 순식간에 4만명으로 늘어났더군요. 소문이 어떤 내용인지 알기 위해 회원 가입을 하신 거죠. 말이 좋아 사이버 테러지 그건 무자비한 폭력이었습니다. 한번만 생각했다면 한 개인에 대해 그렇게 무자비한 말들을 쏟아낼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생각보다 제 등이 튼튼하더라고요. 전혀 상처를 받지 않았어요. 진이를 이런 상황에서 피해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는 주변의 권유로 진이를 공개했지만 그때 더 이상 진이를 세상에 보여주지 않으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때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보다 백혜진씨가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는 일이 더 시급했다고 한다. 그는 “무섭다”고 호소하는 백씨에게 “우리가 죽을 때 남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라며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문득 그가 백혜진씨의 임신 사실을 언제 알았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결혼 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결혼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백혜진씨의 임신 사실을 언제 알았냐”고. 순간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르고 그는 “오래 전에 알았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지난해 12월 영화 <4인용 식탁>에서 부인의 임신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피한 채 “개인적인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고 했던 것일까.
“아내의 임신은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잖아요. 솔직히 그 문제로 사람들이 또 아내를 괴롭힐까 염려됐어요. 진이가 임신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너무 기뻤어요. 진이는 처음에 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오빠 나 어떡해’ 하더라고요. 그러다 제가 좋아하니까 ‘오빠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다’ 그러더군요. 혼전 임신이기는 했지만 어차피 결혼할 거니까 상관없었어요. 진이가 임신해서 서둘러 결혼한 건 아니에요. 영화 촬영을 끝내고 하면 너무 늦을 것 같았는데 마침 결혼 축가를 부탁하려던 친구가 일 때문에 미국에 가야 한다고 해서 서둘러 하게 됐죠.”
그는 결혼식을 올린 뒤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된장찌개를 끓여먹고 휴식을 취했다고.
4월에 세상에 태어날 별이는 그가 초음파 사진을 정밀히 분석한 결과 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부인 백혜진씨가 자동차로 달려드는 호랑이꿈을 꾼 게 태몽이었다. 결혼하고 이틀 뒤부터 영화 촬영이 시작돼 아내와 많은 시간을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는 그는 대신 쉬는 날은 온종일 아내와 함께 보내며 산책을 하거나 좋은 영화를 같이 보러 다녔다고 한다.
그런 아내가 친정어머니가 있는 미국으로 떠난 것은 지난 1월 중순. 그의 아내가 미국으로 원정 출산을 떠났다는 소문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저도 그 소문을 들었어요. 출산을 앞두고 미국에 갔으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다고 이해해요. 하지만 아직 어린 아내가 친정 어머니 옆에서 아기를 낳고 싶어하는 게 그렇게 잘못인가요? 저희 어머니도 진이를 딸처럼 여기시지만 아무래도 친정엄마만은 못하잖아요. 산모라면 누구나 자신이 마음 편한 곳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요. 장모님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처남 때문에 꼼짝 못하는 형편이시고요. 그래서 미국으로 갔을 뿐인데 이번에도 역시 색안경을 쓰고 보시더군요.”
-사람들에 대해서 화가 난 것 같아요.
“저희집과 부모님집 모두 60평이에요.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난 뒤 호화생활을 한다는 비난이 들려오더군요. 저희 어머니는 제가 결혼하기 한달 전까지도 직장생활을 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조금 보태기는 했지만 아버지와 평생 힘들게 버신 돈으로 그 집을 장만하셨죠. 진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진이가 간첩인가요? 세금 포탈을 했나요? 왜 그렇게 진이에 대해서 안 좋게 보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결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제 결혼이 스캔들이더라고요. 그게 좀 화가 났습니다. 아마 제게 그런 시련이 없었다면 저는 제가 한 여자를 지켜줄 수 있을 만큼 강한 남자라는 사실을 몰랐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 모든 시련들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결혼 전 백씨를 둘러싸고 떠돌던 소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한마디로 초등학생 수준의 이야기예요. 우리 진이가 우주에서 떨어졌습니까? 그 나이에 남자친구가 있었던 건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그때 그렇게 분노했던 사람들이 저만큼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부인한테 가시나요.
“영화 촬영이 끝나는 대로요. 2월10일에 끝날 예정이죠. 그곳에서 영화 때문에 미뤘던 신혼여행을 가게 될 거 같아요. 진이 배가 많이 불러서 멀리는 못 가겠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가서 쉬다 오려고요. 사실 전 진이를 만난 4월5일 전까지는 제 삶을 포기하고 있었어요. 러시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제가 원하던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저 자신은 무지하게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웠어요. 문득 전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벌을 받은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연기하는 능력 하나만 주신 건 아닌가 하고요. 사실 연기를 하다 보면 탈진해 매니저한테 업혀 들어갈 만큼 힘이 들어요. 누구를 만날 엄두를 내지 못했죠. 어쩌다 여자를 만나도 그들은 저를 인간 박신양이 아닌 영화배우 박신양으로 보더군요. 아마 전 진이를 만나지 못했으면 평생 외롭게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너무 기뻐하고 싶지는 않아요. 누군가 시기할 것 같아서요. 그저 침착하게 이 사랑을 지켜가고 싶어요.”
그는 누군가 시기할 것 같아 지금의 행복을 너무 기뻐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결혼하고 행복하다고 느낄 땐 언젠가요.
“아침에 그녀가 끓여준 커피를 마실 때. 또 이것저것 싸서 도시락이라며 내밀 때 너무 행복하죠. 말이 도시락이지 아직 요리를 못하니까 빵이나 과일을 주로 싸줘요. 어떤 날은 팝콘도 싸주고요. 우리 진이가 얼마나 귀엽냐면 아침에 촬영갈 때 ‘가지마’ 그래서 ‘이러면 안돼’ 하면 다음날은 ‘NG 내지 말고 빨리 와’라고 말해요. 그래서 ‘빨리 끝내는 거보다 잘 찍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오빠 집중해서 잘 하고 와’ 그러더군요(웃음). 결혼할 때 평생 싸우지 말고 살자고 약속했는데 지금처럼만 서로 노력하면 평생 그렇게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그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밤 10시를 향하고 있었다. 기자는 밤 11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기차를 타기 위해, 그는 다음날 있을 촬영을 위해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현재 촬영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질문을 하나쯤은 던져야 할 것 같아 어떤 영화인지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인터뷰를 잘 하지 않던 배우들도 영화 홍보를 위해서는 종종 인터뷰를 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오늘은 개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인터뷰인 만큼 영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결국 이날의 인터뷰는 그가 몇년 전부터 취미로 하고 있는 가구 디자인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마무리됐다. 결국 기자는 10시가 넘어 허겁지겁 그곳을 떠나 11시행 기차에 간신히 오를 수 있었고 시간에 쫓겨 인터뷰를 서둘러 마무리한 데 대한 아쉬움을 느꼈다.
#두번째 만남
두번째 만남은 그로부터 5일 뒤인 2월9일 서울 삼성동 그의 매니지먼트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이미 한번의 만남이 있었기에 전보다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문득 그가 자신을 인터뷰할 사람으로 기자를 지목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전 한 사람을 아는 데 최소한 3년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는 돼야 신뢰가 쌓이고 말이 필요없는 사이가 되죠. 이기자와는 아주 오래 전에 만났고 좋은 느낌을 갖고 있었어요. 매니저를 통해 꾸준히 소식을 듣고 있었고, 인터뷰를 하기로 결정하자 이기자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잘 모르는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제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면 스타가 뭐 저래 하더군요. 제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배우로서의 모습일 뿐 실제와는 다르잖아요. 오늘만 해도 제 모습이 평소와는 많이 다르고요.”
“B형에 곱슬머리, 장남에 장손인 나는 최악의 신랑감”
영화 촬영이 없어 늦잠을 잤다는 그는 청바지에 아이보리색 니트, 검정색 점퍼 차림이었다. 기자 역시 영화 속에서 늘 그가 보여주던 양복 차림에 익숙했기에 조금은 그 모습이 어색했다. 하지만 그는 촬영이 있을 때를 빼고는 양복을 입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낯가림이 심한 그에게도 친한 친구가 있기는 할까. 그는 영화배우 김승우와 신현준, 이성재, 정진영을 막역한 지인들로 꼽았다. 그는 그들을 가리켜 아무 때나 전화를 걸어 거두절미하고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당황하지 않을 사람들이라고 했다. 다만 서로 너무 바빠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고 했다. 이날의 인터뷰는 별이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별이라는 이름이 참 예뻐요.
“아주 오래 전에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그러다 산, 강, 별이라는 이름을 생각했죠. 자만하지 않을 것 같은 이름이고 매력적이지만 가볍지 않은 이름이잖아요. 대신 호적에는 승비라는 이름을 올리게 될 거 같아요. 잘 아는 스님 한분이 돌림자인 ‘승’자를 넣어 지어주신 이름이죠.”
-어떤 아빠가 되고 싶어요
“전 아이들이 너무 좋아요. 가능하면 많은 아이를 낳아 아이들 속에서 분주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음, 나중에 별이가 태어나면 모든 아빠들이 다 그렇겠지만 힘든 건 말고 좋은 것만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요.”
-속도위반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속도위반 맞아요. 그게 뭐 잘못됐나요? 우린 처음부터 결혼할 거였으니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지금이 조선시대인가요. 저는 룸살롱도 가지 않는 사람이에요. 술이 마시고 싶으면 차라리 록카페를 가죠. 저에게 ‘속도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술집에 가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짓을 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저는 사람들의 그런 위선이 싫습니다.”
민감한 이야기가 오고 가면서 또다시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기자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가 가장 싫어할 질문은 뭘까. 그처럼 진지한 연기자에게 뜬금없이 혈액형을 묻는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궁금했다.
-혈액형이 뭐예요.
“(황당한 듯 쳐다보며) B형요.”
그는 자신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원정 출산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도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밝혔다.
-어머, 그거 안 좋은 혈액형이라던데….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세서요? 음 저희 회사(싸이더스)에 있는 매니저 가운데 90%가 B형이에요. 연예계에 있는 친구들 중에서도 B형이 많고요. B형의 단점을 뒤집어 말하면 독립적이고 자기 일을 확실하게 한다는 뜻도 돼요. 그렇게 B형에 대해서 선입견을 갖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기자는 혈액형이 뭐죠?
-하하. 저도 B형이에요. B형과 B형의 만남은 최악이라는데 백혜진씨는 뭐예요.
“A형이요. 전 그렇게 보면 최악의 신랑감이에요. B형에 곱슬머리, 장남에 장손이거든요. 무슨 일이 있어서 일가가 모이면 기본이 40명이죠. 하지만 진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진이가 아직 요리는 못하는데 나중에 우리 아이한테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정도만 갖고 있어요. 저는 제 아내가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느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 앞으로 제가 더 잘할 거고요.”
그는 일단 영화 <4인용 식탁>이 개봉하는 5월까지는 휴식의 시간을 갖겠지만 좋은 작품만 있으면 촬영에 들어갈 생각이라고 한다. 가능하면 일년에 두편씩 찍고 싶다는 게 배우로서의 욕심. 한때는 매번 흥행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작품 선정에 신중에 신중을 기했지만 평생 1백편의 영화를 찍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는 조금 작품 선택이 쉬워졌다고 한다.
딸에게 최고 아빠 되고 싶어 아이 침대, 그네, 책상, 모두 직접 디자인할 계획
연극과 뮤지컬 무대에 서고 싶은 욕심도 있다는 그는 취미로 시작한 가구 디자인을 본격적으로 해볼 계획도 갖고 있다. 일단 얼마전 서울 강남에 문 연 한 가구 매장에 ‘Designed by 박신양’이라는 이름을 걸고 탁자 한점을 내놓았다. 그는 앞으로 소파, 의자, 침대, 수납장까지 디자인해볼 생각이라며 새로 태어날 아이가 쓸 침대며 그네, 책상까지 모두 만들어줄 생각이라고 한다.
“우리 별이한테 ‘아빠가 최고’라는 말을 듣도록 최선을 다할 거예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시간을 줄이더라도 우리 가족의 행복을 지켜 나가야죠. 장인, 장모에게는 든든한 아들이고 싶고 처제, 처남에게는 좋은 오빠, 형이고 싶어요. 물론 우리 부모님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앞으로 진이가 아이를 낳고 미국에서 공부까지 할 예정이라 일산 집을 자주 비울 수밖에 없지만 저의 진짜 집은 부모님 댁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곧 부인과 만나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어제 진이랑 통화했는데 ‘오빠 나 떨려’ 그러더라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웃음).”
-마지막으로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의 처우가 개선되었으면 좋겠어요. 그 사이 한국영화계는 놀랄 만큼 발전했는데 스태프들은 아직도 말도 안되는 박봉을 받으며 하루에 18~20시간씩 일을 하죠. 그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조합이 생긴다면 적극 지지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우리 영화가 해외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파이가 커지면 그만큼 자본이 많이 투입될 거고 스태프들에게 돌아가는 돈도 많아질 것 같아서요.”
조금은 엉뚱한 그의 대답을 듣고 “그런 이야기는 영화잡지와 인터뷰할 때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럼 너무 무거울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자신도 해외 진출을 위해 노력할 생각이며 만약 TV에 출연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런 이유에서라고 덧붙였다.
그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의외의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가 커피 마니아라는 사실이다. 그에게 왠지 “커피보다는 녹차가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라고 하자 그는 큰소리로 웃으며 “사람들은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너무나 진지하고 예의바른 모범생일 것 같은 남자’라고 했더니 “저를 잘 모르시는군요. 생각해보니 제 책임도 커요. 너무 인터뷰를 안해서 그런 모양이에요. 앞으로 1년에 한번씩은 할까 봐요. 다음에 인터뷰할 때도 이기자가 해주실 거죠”라고 재치있게 응수했다.
첫번째 만난 날 부인이 미국 어디에 있는지 밝히기를 꺼려했던 그는 이날 비보도를 전제로 현재 머물고 있는 곳, 출산 예정지 등을 소상하게 말해주었다. 자신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원정 출산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미국행을 택했다는 박신양 백혜진 부부. 그들이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소박한 행복을 가꿔나갔으면 한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