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시 순천대학교 만화예술학과 카툰 실습실에서 만난 명랑만화 작가 윤승운 화백(59). 실습실에선 마침 ‘기초출판만화’라는 강의가 한창이었다. 40년 이상을 만화계에서 살아온 대선배 만화가의 열띤 강의를 학생들은 시종일관 진지한 모습으로 경청했다. 하지만 강의 도중 한마디씩 던지는 농담에 배를 잡고 웃는 학생들의 모습은 윤화백의 만화를 읽으며 킥킥대는 아이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고 연구실로 자리를 옮긴 윤화백은 가르치는 일이 너무 어렵다며 손사래부터 쳤다.
“강의 시작한 지 두달 됐는데 그동안 뭘 가르쳤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선배로서 경험담도 들려주고 만화가의 기본 자세를 제대로 심어주고자 노력하는데, 잘하고 있는지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종이, 필기구 등 무엇이든 풍족한 신세대 만화가 지망생들이 너무나 부럽다는 윤화백. 하지만 그런 후학들이 마냥 마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쟁이’ 근성을 갖춘 이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만화를 그려내는 손재주는 뛰어난 것 같아요. 하지만 만화라는 것이 단순히 그림만 그리면 되는 게 아닙니다. 한번 펜을 들면 놓지 않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찾아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필요해요. 99%의 노력과 1% 영감의 산물이 만화지요.”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웠던 무명 시절을 거쳐 40여년 동안 <꼴찌와 한심이> <요철발명왕> <두심이 표류기> <맹꽁이 서당> 등 무려 1백 60여권의 만화를 내놓으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온 그의 저력은 바로 ‘근성’이다.
윤화백은 1960년 서울 은광고등학교 2학년 때 열여덟의 어린 나이로 만화계에 데뷔했다. 공부는 제쳐놓고 만화책만 끼고 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위 친구들이 그가 만화를 그린다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평범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잡지사나 신문사에서 독자만화에 지면을 꽤 할애해주던 시절이어서 여기저기 투고를 하면 종종 제 만화가 실리곤 했지요. 그렇게 2년여를 지내다 당시 인기 잡지인 <아리랑>에서 2페이지 분량의 만화를 청탁받았어요. 며칠밤을 꼬박 새워 완성한 원고를 가져다주고 나오는데, 뒤통수가 간지러워서 혼났지요.”
그후 <명랑> <청춘>과 같은 잡지를 비롯해서, 그야말로 ‘그때 그 시절’의 어린이 잡지인 <어깨동무> <새소년> <만화왕국> 등에 만화를 연재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한때 한달에 20여건의 연재물을 그릴 정도로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요철발명왕> <꼴찌와 한심이> 등이 다 그 시절의 대표작들이다. 길창덕, 박수동, 신문수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만화가들이 그 시절을 같이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긴 했지만 만화 그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저는 끙끙대며 몇날 며칠씩 밤을 새워 작품을 그리는데, 일필휘지로 쭉쭉 내그어 뚝딱 작품을 만들어내는 천재형 만화가들을 보면 늘 부러웠죠.”
그래서 한때는 만화를 그만두고 농사꾼이 될 생각도 해보았다. 실제로 연세대 농업개발원 낙농과에 입학해 공부를 하기도 했다고. 그곳에서 만난 여자 동기생과 인연이 닿아 혼례를 올렸다. 70년대 후반에는 진짜 일을 저질러, 경기도 남양주에서 젖소 두마리를 사서 목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목장은 그럭저럭 잘 됐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만화가였던 모양이다. 3년 만에 목장을 정리하고 다시 만화 그리는 일로 돌아왔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좌충우돌 말썽만 부리던 윤화백의 캐릭터들이 유식해지기 시작했다. 역사에 통달하고 유창하게 한문을 읊어댔다. 이런 변화는 40대에 접어든 작가가 역사에 눈을 돌리면서부터 일어났다. 신인시절, 할아버지 서가에 꽂혀있던 역사책을 꺼내 읽으면서 뒷날 만화로 그려보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품었던 생각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소년>지에 처음으로 역사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하자 주위에서는 승산 없는 일이라며 다들 말렸지요. 책이 나오기도 전에 위로 부터 하는 이들이 있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맹꽁이 서당> <겨레의 인걸 100인> 시리즈 등 윤화백이 잇달아 내놓은 작품들마다 연간 1만∼2만 부씩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될 만큼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맹꽁이 서당> 은 조선시대 왕조별 연대기를 그린 내용이고, <겨레의 인걸 100인>시리즈는 삼국시대부터 근세의 역사인물들을 다룬 만화. 딱딱한 역사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내 요즈음도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 단골로 오르는 작품이다. 아이들도 좋아하지만 그 교육적 효과 때문에 부모들이 먼저 권하는 만화로도 소문이 났다.
윤화백의 역사만화가 이처럼 호응을 얻게 된 것은 오랜 세월 단련으로 쌓은 ‘내공’과 더불어 역사를 제대로 그리기 위해 그가 기울인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일화라도 얼렁뚱땅 그리는 법이 없다. 속속들이 자료를 찾아보고 발로 뛰어 유적지를 찾아가 직접 확인한 뒤에야 만화로 옮겨냈다.
처음엔 달랑 역사책 한권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남양주에 있는 작업실 서가 대부분을 2천권 이상의 역사서들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가 됐다.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참고할 만한 역사서들이 별로 없어 닥치는 대로 자료를 찾아 모았다. 헌 책방으로, 중국으로 자료를 구하러 다녔고 그것도 모자라 번역본이 없는 역사책을 읽기 위해 뒤늦게 성균관대 사회교육원에 입학해 7년 동안 하루 4시간씩 한문공부를 하기도 했다고. 그뿐인가. 만화에 등장하는 유적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 조광조나 김삿갓(김병연)의 무덤에는 대여섯번씩 찾아갔다고 한다.
그의 성공은 이런 노력에 힘입은 것이다. 역사만화의 교육적 가치를 인정받아 윤화백은 91년 문화부에서 제정한 만화문화상을 수상했다. 또 94년에는 서울 정도 6백주년 기념행사에서 그의 <겨레의 인걸 100인전>이 타임캡슐에 담겨 묻히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제가 만화에 매달린 게 40년 세월입니다. 그동안 만화에 대한 인식은 정말 많이 바뀌었지요. 독립된 장르로 인정받지 못하고 푸대접만 받던 시절에 비하면, 만화문화상이 생기고 대학에 만화예술학과들이 생기는 요즘은 정말 별천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윤화백은 평생 어린이들만을 대상으로 만화를 그려왔다. 80∼90년대 성인만화 붐이 한창일 때도 그는 ‘순수한 만화는 아동만화’라는 신념으로 한눈 팔지 않고 아동만화에만 전념했다. 요즘처럼 장인이 드문 시대, 한 우물만 파는 이런 줏대 있는 ‘고집’은 그의 ‘근성’과 더불어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윤화백은 팬들이 사인을 요청할 때면 <맹꽁이 서당>의 주인공들이 나와 있는 만화 한컷을 그리고 그 위에 ‘동심여선(童心如仙)’이라는 한문을 적어 사인을 대신한다. 방정환 선생의 동상에 새겨진 글로 ‘아이의 마음은 신선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그가 아동물에만 천착해온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명랑만화를 오래 그리다 보니 애들처럼 ‘주책스러워진’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는 윤화백. 평생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작은 것에 기뻐하며 살게 된 것은 ‘두심이’나 ‘맹꽁이’ 같은 만화주인공들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고 환하게 웃었다.
강의가 끝나고 연구실로 자리를 옮긴 윤화백은 가르치는 일이 너무 어렵다며 손사래부터 쳤다.
“강의 시작한 지 두달 됐는데 그동안 뭘 가르쳤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선배로서 경험담도 들려주고 만화가의 기본 자세를 제대로 심어주고자 노력하는데, 잘하고 있는지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종이, 필기구 등 무엇이든 풍족한 신세대 만화가 지망생들이 너무나 부럽다는 윤화백. 하지만 그런 후학들이 마냥 마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쟁이’ 근성을 갖춘 이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만화를 그려내는 손재주는 뛰어난 것 같아요. 하지만 만화라는 것이 단순히 그림만 그리면 되는 게 아닙니다. 한번 펜을 들면 놓지 않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찾아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필요해요. 99%의 노력과 1% 영감의 산물이 만화지요.”
끼니를 잇기조차 어려웠던 무명 시절을 거쳐 40여년 동안 <꼴찌와 한심이> <요철발명왕> <두심이 표류기> <맹꽁이 서당> 등 무려 1백 60여권의 만화를 내놓으며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온 그의 저력은 바로 ‘근성’이다.
윤화백은 1960년 서울 은광고등학교 2학년 때 열여덟의 어린 나이로 만화계에 데뷔했다. 공부는 제쳐놓고 만화책만 끼고 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위 친구들이 그가 만화를 그린다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평범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잡지사나 신문사에서 독자만화에 지면을 꽤 할애해주던 시절이어서 여기저기 투고를 하면 종종 제 만화가 실리곤 했지요. 그렇게 2년여를 지내다 당시 인기 잡지인 <아리랑>에서 2페이지 분량의 만화를 청탁받았어요. 며칠밤을 꼬박 새워 완성한 원고를 가져다주고 나오는데, 뒤통수가 간지러워서 혼났지요.”
그후 <명랑> <청춘>과 같은 잡지를 비롯해서, 그야말로 ‘그때 그 시절’의 어린이 잡지인 <어깨동무> <새소년> <만화왕국> 등에 만화를 연재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한때 한달에 20여건의 연재물을 그릴 정도로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요철발명왕> <꼴찌와 한심이> 등이 다 그 시절의 대표작들이다. 길창덕, 박수동, 신문수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만화가들이 그 시절을 같이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긴 했지만 만화 그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저는 끙끙대며 몇날 며칠씩 밤을 새워 작품을 그리는데, 일필휘지로 쭉쭉 내그어 뚝딱 작품을 만들어내는 천재형 만화가들을 보면 늘 부러웠죠.”
그래서 한때는 만화를 그만두고 농사꾼이 될 생각도 해보았다. 실제로 연세대 농업개발원 낙농과에 입학해 공부를 하기도 했다고. 그곳에서 만난 여자 동기생과 인연이 닿아 혼례를 올렸다. 70년대 후반에는 진짜 일을 저질러, 경기도 남양주에서 젖소 두마리를 사서 목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목장은 그럭저럭 잘 됐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만화가였던 모양이다. 3년 만에 목장을 정리하고 다시 만화 그리는 일로 돌아왔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좌충우돌 말썽만 부리던 윤화백의 캐릭터들이 유식해지기 시작했다. 역사에 통달하고 유창하게 한문을 읊어댔다. 이런 변화는 40대에 접어든 작가가 역사에 눈을 돌리면서부터 일어났다. 신인시절, 할아버지 서가에 꽂혀있던 역사책을 꺼내 읽으면서 뒷날 만화로 그려보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품었던 생각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윤화백은 18살이란 어린 나이에 만화가로 데뷔한 이후 40여년을 줄곧 ‘아동만화’만 그려왔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맹꽁이 서당> <겨레의 인걸 100인> 시리즈 등 윤화백이 잇달아 내놓은 작품들마다 연간 1만∼2만 부씩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될 만큼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맹꽁이 서당> 은 조선시대 왕조별 연대기를 그린 내용이고, <겨레의 인걸 100인>시리즈는 삼국시대부터 근세의 역사인물들을 다룬 만화. 딱딱한 역사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내 요즈음도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에 단골로 오르는 작품이다. 아이들도 좋아하지만 그 교육적 효과 때문에 부모들이 먼저 권하는 만화로도 소문이 났다.
윤화백의 역사만화가 이처럼 호응을 얻게 된 것은 오랜 세월 단련으로 쌓은 ‘내공’과 더불어 역사를 제대로 그리기 위해 그가 기울인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일화라도 얼렁뚱땅 그리는 법이 없다. 속속들이 자료를 찾아보고 발로 뛰어 유적지를 찾아가 직접 확인한 뒤에야 만화로 옮겨냈다.
처음엔 달랑 역사책 한권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남양주에 있는 작업실 서가 대부분을 2천권 이상의 역사서들이 차지하고 있을 정도가 됐다.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참고할 만한 역사서들이 별로 없어 닥치는 대로 자료를 찾아 모았다. 헌 책방으로, 중국으로 자료를 구하러 다녔고 그것도 모자라 번역본이 없는 역사책을 읽기 위해 뒤늦게 성균관대 사회교육원에 입학해 7년 동안 하루 4시간씩 한문공부를 하기도 했다고. 그뿐인가. 만화에 등장하는 유적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 조광조나 김삿갓(김병연)의 무덤에는 대여섯번씩 찾아갔다고 한다.
그의 성공은 이런 노력에 힘입은 것이다. 역사만화의 교육적 가치를 인정받아 윤화백은 91년 문화부에서 제정한 만화문화상을 수상했다. 또 94년에는 서울 정도 6백주년 기념행사에서 그의 <겨레의 인걸 100인전>이 타임캡슐에 담겨 묻히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제가 만화에 매달린 게 40년 세월입니다. 그동안 만화에 대한 인식은 정말 많이 바뀌었지요. 독립된 장르로 인정받지 못하고 푸대접만 받던 시절에 비하면, 만화문화상이 생기고 대학에 만화예술학과들이 생기는 요즘은 정말 별천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윤화백은 평생 어린이들만을 대상으로 만화를 그려왔다. 80∼90년대 성인만화 붐이 한창일 때도 그는 ‘순수한 만화는 아동만화’라는 신념으로 한눈 팔지 않고 아동만화에만 전념했다. 요즘처럼 장인이 드문 시대, 한 우물만 파는 이런 줏대 있는 ‘고집’은 그의 ‘근성’과 더불어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윤화백은 팬들이 사인을 요청할 때면 <맹꽁이 서당>의 주인공들이 나와 있는 만화 한컷을 그리고 그 위에 ‘동심여선(童心如仙)’이라는 한문을 적어 사인을 대신한다. 방정환 선생의 동상에 새겨진 글로 ‘아이의 마음은 신선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그가 아동물에만 천착해온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명랑만화를 오래 그리다 보니 애들처럼 ‘주책스러워진’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는 윤화백. 평생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작은 것에 기뻐하며 살게 된 것은 ‘두심이’나 ‘맹꽁이’ 같은 만화주인공들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인 것 같다고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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