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음악이라는 테두리 안에만 머물지 않고 그림과 서예, 문학에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뉴에이지 음악을 전문으로 다루는 파워 블로거 녹쓴퍄노는 이런 그를 두고 “뼛속까지 아트의 피가 흐르는 종합예술인이요, 시와 그림과 음악으로 영혼을 낚는 뉴에이지의 음유시인”이라고 표현했다. 남들은 한 가지도 갖기 힘든 재능을 그는 어떻게 이토록 많이 가질 수 있었을까. 그 답은 그가 지나온 삶에 있다.
인생의 고비마다 도움 준 피아노

“형과 누나들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제 실력은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피아노는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대신 그는 그림에서 자신의 재능을 찾아 일찌감치 진로를 미술로 정하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미술학원에 다니며 데생을 배웠다. 선화예중과 계원예고, 중앙대학교에서 모두 회화를 전공했다.
비록 미술로 진로를 바꿨지만 그의 곁에는 늘 피아노가 있었다. 미술을 하면서도 음악의 끈을 놓지 않은 덕분에 그는 대학생이던 1991년 MBC 신인가요제에서 장려상을 받는 기쁨을 맛봤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취미삼아 치던 피아노 가정형편이 급격히 기울었을 때 그에게 학비와 생계비를 마련할 발판이 돼줬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어요. 아버지는 이혼 후 미국으로 가시고 저는 어머니와 살았어요. 그런데 그 무렵 작은형이 안 좋은 일로 세상을 떠나 어머니가 큰 충격을 받으셨죠. 그때부터 어머니가 전북 지역의 요양원에서 지내며 치료를 받아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어요. 살길이 막막해 낮에는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레스토랑이나 바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죠. 그렇게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모아 학교를 다니다 보니 격년으로 휴학해 졸업하기까지 10년이 걸렸죠.”
졸업을 앞두고 스스로 해냈다는 뿌듯함도 잠시. 앞으로는 또 어떻게 살아갈지가 걱정이었다. 경제적인 여유가 전혀 없어 미술이나 음악을 해서 생계를 꾸리긴 힘든 여건이었다. 때마침 지인의 권유로 기자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제가 인생의 멘토로 삼은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도 원래 기자였어요. 그래서 기자라는 직업에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같이 일해보자는 분이 있어서 엉겁결에 취재기자가 됐죠.”
1993년 시사주간지 기자로 사회생활의 첫 단추를 꿴 그는 2004년 당시 취재 중이던 기사를 빼고 광고를 받으라는 외압에 굴복할 수 없어 다니던 신문사에 사표를 냈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그에게 살 길을 열어준 것은 윤석호 PD의 계절시리즈 중 하나인 〈겨울연가〉였다. 2002년 국내 방영에 이어 2003년부터 일본에서 전파를 탄 이 드라마는 이듬해인 2004년 일본 열도를 한류열풍으로 달궜다. 이 드라마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에는 데이드림의 피아노 연주곡 2곡이 들어 있었다. 2005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OST에도 삽입된, 〈겨울연가〉의 최지우 테마곡으로 유명한 ‘Stepping on the rainy street’와 ‘I miss you’라는 피아노 연주곡이었다.
“앞으로 뭘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음반기획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가 만든 ‘Stepping on the rainy street’이 대박이 났다고요. 그때부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피아니스트로 연주 활동을 펼쳤죠.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이루마 씨, 음악감독 겸 작곡가인 이지수 씨와 공동으로 피아노 테마곡 앨범도 냈고요. 일본, 미국 등 해외의 유명 연주가들과도 종종 국내외에서 공연을 해요. 국내에서는 20~30명이 보는 앞에서 연주를 하는데, 일본 공연 때는 1만5천~2만 명이 오니까 가슴이 벅차요. 2013년 도쿄에서 열린 국제포럼 콘서트에는 윤석호 PD와 최지우 씨가 참석해 반응이 더 뜨거웠죠.”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에게 피아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 같은 존재다. 피아니스트가 아닌 다른 길로 가려 했지만 먼 길을 돌아 피아니스트가 됐고, 위기를 맞을 때마다 그에게 살 길을 열어줬으니 말이다.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원망했어요. 그땐 부모님이 제게 물려준 건 불화로 인한 상처뿐인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피아노가 큰 재산이더군요. 그 덕에 대학도 졸업하고, 공연도 하고, 집도 사고…. 피아니스트가 제 운명이라는 걸 이젠 알아요.”
멈추지 않는 창작 시계

“존 F. 케네디와 함께 제가 좋아하는 위인이 다산 정약용이어서 이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써보고 싶었어요. 정약용을 ‘차왕’이라 한 것은 ‘다산’이 ‘차가 많은 산’이라는 뜻이고, 실제로 그분이 차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어서예요. 차왕에는 백성을 왕처럼 섬겨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어요. 차를 풀 곧, 민초로 본 것이죠. 정약용은 정조의 최측근이었는데 그분의 생전 흔적을 취재하면서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며 치열하게 살았다는 거예요.”
연세영이라는 본명으로 이 책을 펴낸 그 역시 정약용 못지않게 치열하게 산다. 당장은 신간을 낸 저자로서 각지에서 열리는 프로모션 행사에 참석해야 하고, 9집 앨범 발매를 목전에 두고 있으며, 오는 10월에는 그림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또 내년 7월 서울 종로구 스페이스 선에서 열리는 회화전에도 초대작가로 참여한다. 이런 일정들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그의 창작 시계는 멈춘 적이 없다. 비결이 뭘까.
“하루에 서너 시간 자요. 보통 밤 10시 반에 잠들어 새벽 2시에 일어나요. 다른 사람보다 네다섯 시간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거죠. 그때부터 글쓰기와 작곡, 회화 중 하나에 꽂혀서 집중적으로 그것만 해요.”
그가 페이스북에 올리자마자 수백 개의 댓글이 달리고 ‘공유하기’가 이어지는 그림이나 서예, 시 같은 것들이 그 결과물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노(No)!’ 단순히 작업 도중 머리를 식히려고 그리거나 쓴 것이지 온전한 작품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해요. 데이드림 연세영 씨는 왜 그렇게 많은 일을 하느냐고. 시간이 안 날 것 같은데 신기하다고요. 그러면서 저를 창작력이 대단하고 페이스북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예술가로 보더라고요. 근데 실은 제 안의, 제 삶의 어두운 면을 치유하려고 매일 창작에 열성을 쏟는 거예요. 창작을 하면서 제 삶을 보듬는 거죠.”
▼ 앞으로는 어떤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나요.
영화음악이요. 제가 그동안 해온 음악, 미술, 문학을 다 아우를 수 있는 콘텐츠거든요. 소설 〈차왕〉도 영화음악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작품이에요. 책 안에 든 삽화를 모두 직접 그리고, 지금 ‘남당가’라는 음악을 만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지금까지는 자조적이고 순수하고 단출한 음악을 했지만, 영화음악은 오케스트라를 기반으로 한 스케일이 큰 음악이고 대중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음악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어요.
▼ 순수음악에서 대중음악으로의 변화를 모색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후배들을 돕고 싶어요. 음악 하는 친구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거든요. 영화음악은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드럼 등 다양한 악기 연주자가 필요하고, 컴퓨터 음악도 있어야 하니 양질의 일자리를 늘릴 수 있을 거예요.
▼ 바람이 있다면요.
개인적인 명예는 많이 얻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창작활동을 하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만들고 싶어요. 그게 협동조합이 될 수도 있고, 예술가들을 위한 모임일 수도 있고, 동아리가 될 수도 있겠죠. 또 제가 음반이나 책을 낼 때마다 반겨주시는 고마운 팬들과 함께 좋은 일을 하고 싶어요. 2014년 저를 아끼는 분들과 의기투합해 만든 ‘꿈사모(꿈을 사랑하는 모임)’가 있는데 단순한 팬클럽이 아니라 공익적인 활동을 주로 해요. 현재 회원이 6백 명이 넘어요. 최근 좀 바쁘다는 핑계로 열심히 하지 못했는데 그분들과 다시 뭉쳐 어려운 이웃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뜻 깊은 나눔 활동을 하고 싶어요.
그는 매일 꿈을 꾸며 산다. 그 꿈은 음악이 되고, 시가 되고, 그림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데이드림’을 외친다. 매일 꿈을 잃지 말라고, 지금 겪는 고통을 잘 견디고 나면 햇살 가득한 내일을 만날 수 있다고.

사진 조영철 기자
사진 제공 헉스뮤직
디자인 이지은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