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호텔앤리조트가 2018년 문 연 레스케이프 호텔의 ‘라망 시크레’와 2022년 손종원(40) 셰프가 합류하면서 리뉴얼 오픈한 조선 팰리스 호텔 ‘이타닉 가든’은 미식가들 사이 유명한 곳이다. 일단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라 리스트’에 라망 시크레는 3회 연속, 이타닉 가든은 2회 연속 선정됐다. 또 다른 세계적인 미식 가이드 ‘미쉐린 가이드’에서도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라망 시크레는 손종원 셰프가 헤드 셰프를 맡은 지 2년 만에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1’에서 1스타를 받아 3년 연속 유지해오고 있다. 이타닉 가든 역시 ‘미쉐린 가이드 서울 2023’에 1스타로 처음 이름을 올렸다.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가운데 2곳 이상에서 동시에 별을 획득한 셰프는 손종원뿐이다.
인터뷰는 서울 역삼동 조선 팰리스 호텔 36층에 위치한 이타닉 가든에서 진행했다. 런치 타임 이후 금쪽같은 휴식 시간을 내준 손종원 셰프는 인사 후 바로 “내부를 둘러보겠냐”며 구석구석 앞장서 소개했다. 비밀의 화원 같은 주방까지 서슴없이 보여준 건 자신감이었다.
프렌치 기반의 컨템퍼러리 레스토랑인 라망 시크레와 한식을 재해석한 이노베이티브 레스토랑 이타닉 가든은 결이 다르다. 손종원 셰프는 2곳을 오가며 70명의 팀원을 이끈다. “‘라 리스트 2024’에 2곳 모두 이름을 올려 내심 안심했겠다”고 농담을 건네자 “그런 면이 확실히 있다. 직원들이 서로 저쪽만 편애한다고 해서 양쪽에 눈치가 보인다”며 웃었다.
일주일을 라망 시크레와 이타닉 가든에 어떻게 나눠 쓰시나요. 하루 일과도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이타닉 가든이 자리 잡아가고 있어서 5일은 여기 있고, 이타닉 가든 휴무일에는 라망 시크레에서 일해요. 보통 오전 6시 45분쯤 일어나 7시 30분에 아침 운동하고 10시에 출근해요. 퇴근은 오후 10시나 11시쯤 합니다. 셰프라는 직업 자체가 계속 레스토랑에 붙어 있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오히려 2곳을 다 맡게 되면서 음식적인 면에서 방향성이 구체적으로 잡히고 서로의 콘셉트가 명확해진 것 같아요. 단점은 관리할 직원이 많아진 거죠. 그런데 그만큼 또 팀 구성원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보람도 있어요.
이번 ‘라 리스트’ 올해의 신인 부문 수상 셰프 6명 중 아시아 셰프로는 유일하잖아요. 스스로 봤을 때 강점이 무엇인가요.
강점이라기보단 아까 주방 벽에 ‘evolve(진화하다)’라고 붙여놓은 거 보셨나요. 제 모토예요. 사람이 지난해와 올해가 똑같으면 발전이 없는 거잖아요.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어떻게든 계속 업그레이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점이 제 특징 같아요.
셰프님을 포함해 한국 요리가 세계에서 점점 더 주목받고 있어요. 이번 ‘라 리스트 2024’에 한국 식당 36곳이 포함됐는데, 2020년 리스트에는 22곳, 2022년은 25곳이었어요.
셰프들 사이에서도 “What is next?”라고 물으면 한식을 손꼽는 경우가 많아요.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 2024 시상식’이라는 미식계의 큰 행사가 올해 3월 서울에서 열리는 것만 봐도 그렇고요. 특히 뉴욕에서는 한식이 가장 핫한 퀴진이에요. 요즘 트렌드가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고 비건이라든지 환경적인 움직임도 많잖아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장이나 발효 음식, 사찰 음식 등 이미 갖고 있었던 문화가 지금 재조명되고 있는 거죠. 이타닉 가든에서도 김치나 장아찌류, 숙성시킨 음식을 많이 선보입니다. 다른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당연히 낼 텐데 이타닉 가든이 조금 더 발효 음식 자체를 조명하는 편이에요.
메뉴를 개발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식재료가 가장 중요해요. 그 철에 나는 가장 좋은 식재료를 사용해요. 그렇게 구한 좋은 식재료를 가지고 조리할 때는 제가 서양 관점에서 배운 요리 스타일을 접목해 좀 안 해본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라망 시크레 같은 경우는 제철의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는 건 똑같은데 식감이나 온도, 향에 더 신경을 써요. 제가 생각하는 프랑스 요리는 좀 더 복잡한 조리를 통해서 향이나 식감을 극대화하는 것 같아서요.
좋은 제철 식재료는 어떻게 구하나요.
사실 식재료를 구하는 것도 셰프의 능력에 포함되거든요. 발품을 많이 팔고 인연이 닿은 생산자분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아두려 해요. 예를 들어 줄기에서 새콤한 맛이 나는 루바브라는 채소를 사용한다고 하면 일단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곳을 찾아야 하고, 우리가 책임지고 사갈 테니 내년에 이만큼 재배해달라 요청해요. 그 양을 토대로 메뉴를 짜고 고객에게 선보이고요. 생선도 이 시즌에 좋은 것이 뭐니까 어떻게 구해서 어떤 메뉴를 만들겠다는 저만의 데이터가 있죠.
너무 실험적이어서 예상 밖의 결과를 얻은 메뉴도 있나요.
가끔 콘셉트에 사로잡혀서 맛이 있고 없고 판단을 잘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직원들끼리 테이스팅할 때 ‘맛있다’는 평을 제일 싫어해요. 뭐가 좋고 뭐가 어떻다고 말해주는 게 좋아요. 물론 직원들이 좀 세게 말하면 상처 입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제가 물어놓고 뭐라고 할 순 없잖아요(웃음). 음식은 참 솔직해요. 예전부터 달콤한 디저트인 밀 크레이프를 요리 느낌의 세리버리 버전으로 만들고 싶어 여러 번 시도했는데 만족스러운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최근 파리에 갔다가 들르고 싶었던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뭔가 느낌이 오더라고요. 그걸 토대로 봉평 메밀가루로 크레이프를 만들고 루이 소스에 버무린 대게와 겨울 시트러스를 채워 최근 라망 시크레의 겨울 메뉴로 올렸어요.
우도희 수셰프의 도움으로 완성했다고 셰프님 SNS에 올린 사진 봤어요. 솔직하면서 실력 좋은 팀원들을 많이 뒀네요.
팀원들이 더 커야 레스토랑이 더 좋아지는 거잖아요. 원래는 메뉴판의 요리 설명도 제가 다 썼거든요. 이제는 좀 더 팀원들의 얘기를 담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함께해요. 제가 기분 좋은 순간은, 직원이 저한테 “음식에 관심이 많은 분이 계신데 주방을 보여드리면 좋겠다”고 요청할 때예요. 자발적으로 손님한테 무얼 더 해드리고 싶단 거잖아요. 라망 시크레의 경우는 구조 때문에 주방을 공개하진 않는데 예전에는 영상으로 우리가 가꾼 텃밭 식재료를 보여드렸어요. 그럼 손님들도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지겠죠. 결국 이 모든 게 소통이에요.
소통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즘 손님들은 SNS에 올릴 인증 사진을 찍으며 요리를 눈으로도 먹잖아요. 맛있고 예쁜 요리를 위해 맛과 미감에 각각 얼마큼의 포커스를 두고 만드나요.
음식의 담음새가 이 음식 맛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맛을 더 표현해주는 거죠. 물론 맛만 있으면 모양이 안 예뻐도 상관없어요. 맛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만 제가 배운 요리는 ‘이렇게 예쁜데 맛은 또 어떨까?’ 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예쁘면 맛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편견을 깨는 도전을 하고 있어요.
토목을 전공하다가 요리를 시작한 것도 도전이잖아요. 처음에 토목학과는 왜 선택한 건가요.
집안에 공대 쪽, 과학자 이런 분들이 많으세요.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왔으니까 저도 장래 희망이 과학자였어요. 학교도 집안 어른들이 권해서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죠. 그런데 필기시험은 친구들과 비슷하게 보거나 성적이 더 좋게 나오는데, 실험은 좋아서 하는 친구들만큼은 못 따라가겠는 거예요. 저는 억지로 하는 공부인데 이 친구들은 그냥 라이프였던 거죠. 그럼 내가 좋아하는 건 뭘까 생각하다 보니 요리였어요. 어려서부터 요리를 좋아했고 성향 자체도 좀 감성적인 편이에요. 문학이나 인디영화를 좋아해요. 미술관도 자주 가고 사진 찍는 것도 즐겨요.
해보니 어때요. 요리는 창작의 영역인가요, 정밀한 이과의 영역인가요.
요리는 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테크닉으로 훌륭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자란 테크닉을 감성으로 커버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감성적인 걸 좋아해도 요리는 과학적인 시점에서 바라보는 분자 요리를 좋아해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내가 어떤 부분이 틀려서 잘 안 풀리는 건지 파고들어서 결국 완성해내는 게 재미있어요. 예를 들어 흔히 스테이크를 센 불에 구우면 육즙이 가둬진다고 하잖아요. 과학적으로는 틀린 말이에요. 전혀 상관없어요. 이런 테크닉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책도 많이 찾아보고 그래요. 학구파라기보단 깊게 파는 걸 좋아하는 ‘덕후’죠(웃음).
요리 덕후여도 한국행은 많이 고민했을 것 같아요.
막연하게 한국인이니까 궁극적으로는 한국 음식을 하고 싶다곤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몰랐어요. 저는 앞으로 5년 후 계획 이런 건 세우지 않아요. 헤드 셰프 제안을 받았을 때도 1~2년 해보고 다시 가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왔어요. 원래 ‘그냥 해보지 뭐’ 이런 주의예요. 팀이 커지고 책임감과 욕심이 생기면서 지금까지 온 거죠.
한국에 와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많았죠. 외국 생활을 10년 넘게 하다 보니 처음에는 한국적인 문화도 낯설었고, 여기는 또 조직이 크잖아요. 적응하는 게 어려웠어요. 한국 고유의 조리법도 익혀야 하니까 궁중음식연구원 수업도 들었어요. 지금도 선생님들 찾아다니며 배워요. 다음 주에는 순대 수업이 있어요. 힘들어도 제가 선택한 길이잖아요. 부모님이 반대했는데도 싸워서 택한 거라 힘들어도 부모님께 찡찡대지 못하고, 핑계를 댈 수도 없었죠(웃음).
손종원 셰프의 요리에는 단순히 예쁘고 맛있는 것을 넘어 스토리텔링이 담겨 있다. 현대 한국의 양식을 추구하는 라망 시크레의 경우 손님이 갈 때 휴게소 호두과자 봉투에 담은 호두 마들렌을 선물로 준다. 조심히 살펴 가라는 배웅의 의미다. 이타닉 가든의 시그니처와도 같은 예쁜 디저트를 담아낸 자개함이 식탁 위에 펼쳐지면 귀하게 대접받는단 느낌이 든다. 그뿐이 아니다. 호텔 객실에서 나온 커피 캡슐 찌꺼기를 비료로 활용해 텃밭을 가꾼다거나 농가에서 맛에는 문제가 없는 못난이 과일을 사는 등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도 계속하고 있다.
음식 외적인 부분까지 챙기는 이유는 무엇이죠.
이 사회에서 자라왔으니까 저도 사회를 위해 무언가 도움이 돼야죠. 음식 만드는 사람으로서 환경이 없으면 요리를 못 하잖아요. 환경을 신경 쓰는 게 당연하고 또 제가 이렇게 해야 같이 일하는 팀원들도 보고 배워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 역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셰프님들로부터 그렇게 배웠고요. 그런데 텃밭 같은 경우는 환경을 생각한 부분도 있지만 요리하는 친구들이라면 음식에 쓰이는 꽃이 어떻게 생겼고 맛은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셰프로서의 성장을 위해 시작했어요.
좋은 사람이 좋은 요리를 만들고 있네요. 셰프님이 추구하는 ‘파인 다이닝’은 어떤 건가요.
만족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요. 손님이 들어오기 전보다 행복해져서 나갈 수 있는 다이닝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예전에는 나를 과시하는 느낌으로 무언가 보여줘야 할 듯했는데, 지금은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좀 더 들렸으면 좋겠고 손님이 특별한 경험을 하고 돌아가면 좋겠어요. 당연히 그 특별한 경험 안에 맛과 서비스도 포함돼 있을 테고요.
손님의 특별한 경험에는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라 리스트’ 선정 같은 이름값에서 오는 가치도 포함될 텐데요. 지금의 자리를 유지 또는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나요.
많죠. 그런데 이제 시작이에요. 1년 전 음식을 지금 보면 부끄러워요. 물론 그때 낸 음식이 이상했다는 건 아닙니다. 당시로선 최선이었겠지만 돌아보면 더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이타닉 가든의 음식 중 오픈 때부터 빠지지 않고 준비하는 콩 요리도 모양과 농도, 들어가는 재료 등을 조금씩 바꾸면서 업그레이드하고 있어요.
음식에 진심인 분이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인터뷰 끝나고 저녁 식사 메뉴는 뭐예요.
일할 때는 테이스팅을 계속하니까 식사는 안 해요. 출출하면 간식으로 과일, 견과류를 주로 먹고, 가끔 근처 순댓국집에서 순댓국 한 그릇 먹고 와요. 떡볶이랑 과자도 좋아하는데 자극적인 걸 좀 덜 먹으려고 자제하는 편이에요. 저는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면 다 좋아해요. 다만 고쳐야 할 점이긴 한데, 음식으로 장난친 느낌이 들면 먹지 않아요. 손님에 대한 존중이 없잖아요. 그래서 저도 점점 더 근본에 충실해지려 노력해요.
메뉴판만 봐도 그 식당이 음식을 대하는 자세를 알 수 있다. 이타닉 가든의 겨울 메뉴로는 남리아 수셰프(부주방장)의 추억이 담긴 머위와 김정환 셰프 드 퀴진(주방장)이 추천하는 겨울 매생이, 김성국 이그제큐티브 소믈리에가 좋은 와인에 빗댄 겨울 해산물을 듬뿍 넣어 만든 김치 등이 나간다. 라망 시크레는 디저트는 먹지 않아도 치즈는 꼭 먹는 프랑스 친구들을 보면서 손종원 셰프가 구상한 치즈 코스, 지속 가능성을 위해 육류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랑구스틴과 블랙 트러플 라비올리 등을 준비했다. “메뉴를 바꿀 때마다 왜 아이디어가 안 나올까 자괴감에 쩔어 산다”며 “스스로 한계를 짓지 않으면 결국 평소 쌓아둔 경험에서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 과정이 재미있다”는 손 셰프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잘하는데 즐기기까지 한다면 필승 조합이다.
#이타닉가든 #라망시크레 #파인다이닝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사진출처 손종원 SNS
인터뷰는 서울 역삼동 조선 팰리스 호텔 36층에 위치한 이타닉 가든에서 진행했다. 런치 타임 이후 금쪽같은 휴식 시간을 내준 손종원 셰프는 인사 후 바로 “내부를 둘러보겠냐”며 구석구석 앞장서 소개했다. 비밀의 화원 같은 주방까지 서슴없이 보여준 건 자신감이었다.
나물과 장아찌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유
손종원 셰프는 해외 유학파다. 중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주 명문 사립고등학교 올세인츠를 수석 졸업하고 인디애나주 로즈헐먼 공과대학교 토목학과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요리에 입문한 시기는 대학교 4학년, 다소 늦은 출발이었다. 부모님의 반대 끝에 미국 뉴욕 요리학교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에서 공부를 하고 덴마크 코펜하겐의 ‘노마’와 미국 샌프란시스코 ‘퀸스’ 등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한국에서의 커리어는 라망 시크레 헤드 셰프로 초빙된 2018년부터 시작됐다.프렌치 기반의 컨템퍼러리 레스토랑인 라망 시크레와 한식을 재해석한 이노베이티브 레스토랑 이타닉 가든은 결이 다르다. 손종원 셰프는 2곳을 오가며 70명의 팀원을 이끈다. “‘라 리스트 2024’에 2곳 모두 이름을 올려 내심 안심했겠다”고 농담을 건네자 “그런 면이 확실히 있다. 직원들이 서로 저쪽만 편애한다고 해서 양쪽에 눈치가 보인다”며 웃었다.
일주일을 라망 시크레와 이타닉 가든에 어떻게 나눠 쓰시나요. 하루 일과도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이타닉 가든이 자리 잡아가고 있어서 5일은 여기 있고, 이타닉 가든 휴무일에는 라망 시크레에서 일해요. 보통 오전 6시 45분쯤 일어나 7시 30분에 아침 운동하고 10시에 출근해요. 퇴근은 오후 10시나 11시쯤 합니다. 셰프라는 직업 자체가 계속 레스토랑에 붙어 있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오히려 2곳을 다 맡게 되면서 음식적인 면에서 방향성이 구체적으로 잡히고 서로의 콘셉트가 명확해진 것 같아요. 단점은 관리할 직원이 많아진 거죠. 그런데 그만큼 또 팀 구성원들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보람도 있어요.
이번 ‘라 리스트’ 올해의 신인 부문 수상 셰프 6명 중 아시아 셰프로는 유일하잖아요. 스스로 봤을 때 강점이 무엇인가요.
강점이라기보단 아까 주방 벽에 ‘evolve(진화하다)’라고 붙여놓은 거 보셨나요. 제 모토예요. 사람이 지난해와 올해가 똑같으면 발전이 없는 거잖아요.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어떻게든 계속 업그레이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점이 제 특징 같아요.
셰프님을 포함해 한국 요리가 세계에서 점점 더 주목받고 있어요. 이번 ‘라 리스트 2024’에 한국 식당 36곳이 포함됐는데, 2020년 리스트에는 22곳, 2022년은 25곳이었어요.
셰프들 사이에서도 “What is next?”라고 물으면 한식을 손꼽는 경우가 많아요. ‘아시아 50 베스트 레스토랑 2024 시상식’이라는 미식계의 큰 행사가 올해 3월 서울에서 열리는 것만 봐도 그렇고요. 특히 뉴욕에서는 한식이 가장 핫한 퀴진이에요. 요즘 트렌드가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고 비건이라든지 환경적인 움직임도 많잖아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장이나 발효 음식, 사찰 음식 등 이미 갖고 있었던 문화가 지금 재조명되고 있는 거죠. 이타닉 가든에서도 김치나 장아찌류, 숙성시킨 음식을 많이 선보입니다. 다른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당연히 낼 텐데 이타닉 가든이 조금 더 발효 음식 자체를 조명하는 편이에요.
메뉴를 개발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식재료가 가장 중요해요. 그 철에 나는 가장 좋은 식재료를 사용해요. 그렇게 구한 좋은 식재료를 가지고 조리할 때는 제가 서양 관점에서 배운 요리 스타일을 접목해 좀 안 해본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라망 시크레 같은 경우는 제철의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는 건 똑같은데 식감이나 온도, 향에 더 신경을 써요. 제가 생각하는 프랑스 요리는 좀 더 복잡한 조리를 통해서 향이나 식감을 극대화하는 것 같아서요.
좋은 제철 식재료는 어떻게 구하나요.
사실 식재료를 구하는 것도 셰프의 능력에 포함되거든요. 발품을 많이 팔고 인연이 닿은 생산자분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아두려 해요. 예를 들어 줄기에서 새콤한 맛이 나는 루바브라는 채소를 사용한다고 하면 일단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곳을 찾아야 하고, 우리가 책임지고 사갈 테니 내년에 이만큼 재배해달라 요청해요. 그 양을 토대로 메뉴를 짜고 고객에게 선보이고요. 생선도 이 시즌에 좋은 것이 뭐니까 어떻게 구해서 어떤 메뉴를 만들겠다는 저만의 데이터가 있죠.
공대생 출신이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요리
1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존경하는 셰프들을 만나 감회가 새로웠다는 손종원 셰프. 2 레스케이프 호텔 옥상 텃밭에서 기른 식재료를 이용해 만든 ‘라망 가든에서 온 작은 한입거리들’. 여기 들어가는 식재료는 지금은 맛볼 수 없고 봄에 다시 재배할 예정. 3 ‘이타닉 가든’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거치며 꾸준히 자리를 지켜온 콩 요리.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다.
가끔 콘셉트에 사로잡혀서 맛이 있고 없고 판단을 잘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직원들끼리 테이스팅할 때 ‘맛있다’는 평을 제일 싫어해요. 뭐가 좋고 뭐가 어떻다고 말해주는 게 좋아요. 물론 직원들이 좀 세게 말하면 상처 입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제가 물어놓고 뭐라고 할 순 없잖아요(웃음). 음식은 참 솔직해요. 예전부터 달콤한 디저트인 밀 크레이프를 요리 느낌의 세리버리 버전으로 만들고 싶어 여러 번 시도했는데 만족스러운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최근 파리에 갔다가 들르고 싶었던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뭔가 느낌이 오더라고요. 그걸 토대로 봉평 메밀가루로 크레이프를 만들고 루이 소스에 버무린 대게와 겨울 시트러스를 채워 최근 라망 시크레의 겨울 메뉴로 올렸어요.
우도희 수셰프의 도움으로 완성했다고 셰프님 SNS에 올린 사진 봤어요. 솔직하면서 실력 좋은 팀원들을 많이 뒀네요.
팀원들이 더 커야 레스토랑이 더 좋아지는 거잖아요. 원래는 메뉴판의 요리 설명도 제가 다 썼거든요. 이제는 좀 더 팀원들의 얘기를 담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함께해요. 제가 기분 좋은 순간은, 직원이 저한테 “음식에 관심이 많은 분이 계신데 주방을 보여드리면 좋겠다”고 요청할 때예요. 자발적으로 손님한테 무얼 더 해드리고 싶단 거잖아요. 라망 시크레의 경우는 구조 때문에 주방을 공개하진 않는데 예전에는 영상으로 우리가 가꾼 텃밭 식재료를 보여드렸어요. 그럼 손님들도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지겠죠. 결국 이 모든 게 소통이에요.
소통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요즘 손님들은 SNS에 올릴 인증 사진을 찍으며 요리를 눈으로도 먹잖아요. 맛있고 예쁜 요리를 위해 맛과 미감에 각각 얼마큼의 포커스를 두고 만드나요.
음식의 담음새가 이 음식 맛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맛을 더 표현해주는 거죠. 물론 맛만 있으면 모양이 안 예뻐도 상관없어요. 맛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만 제가 배운 요리는 ‘이렇게 예쁜데 맛은 또 어떨까?’ 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예쁘면 맛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편견을 깨는 도전을 하고 있어요.
토목을 전공하다가 요리를 시작한 것도 도전이잖아요. 처음에 토목학과는 왜 선택한 건가요.
집안에 공대 쪽, 과학자 이런 분들이 많으세요.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왔으니까 저도 장래 희망이 과학자였어요. 학교도 집안 어른들이 권해서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죠. 그런데 필기시험은 친구들과 비슷하게 보거나 성적이 더 좋게 나오는데, 실험은 좋아서 하는 친구들만큼은 못 따라가겠는 거예요. 저는 억지로 하는 공부인데 이 친구들은 그냥 라이프였던 거죠. 그럼 내가 좋아하는 건 뭘까 생각하다 보니 요리였어요. 어려서부터 요리를 좋아했고 성향 자체도 좀 감성적인 편이에요. 문학이나 인디영화를 좋아해요. 미술관도 자주 가고 사진 찍는 것도 즐겨요.
해보니 어때요. 요리는 창작의 영역인가요, 정밀한 이과의 영역인가요.
요리는 하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테크닉으로 훌륭한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자란 테크닉을 감성으로 커버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감성적인 걸 좋아해도 요리는 과학적인 시점에서 바라보는 분자 요리를 좋아해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내가 어떤 부분이 틀려서 잘 안 풀리는 건지 파고들어서 결국 완성해내는 게 재미있어요. 예를 들어 흔히 스테이크를 센 불에 구우면 육즙이 가둬진다고 하잖아요. 과학적으로는 틀린 말이에요. 전혀 상관없어요. 이런 테크닉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책도 많이 찾아보고 그래요. 학구파라기보단 깊게 파는 걸 좋아하는 ‘덕후’죠(웃음).
요리 덕후여도 한국행은 많이 고민했을 것 같아요.
막연하게 한국인이니까 궁극적으로는 한국 음식을 하고 싶다곤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몰랐어요. 저는 앞으로 5년 후 계획 이런 건 세우지 않아요. 헤드 셰프 제안을 받았을 때도 1~2년 해보고 다시 가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왔어요. 원래 ‘그냥 해보지 뭐’ 이런 주의예요. 팀이 커지고 책임감과 욕심이 생기면서 지금까지 온 거죠.
한국에 와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많았죠. 외국 생활을 10년 넘게 하다 보니 처음에는 한국적인 문화도 낯설었고, 여기는 또 조직이 크잖아요. 적응하는 게 어려웠어요. 한국 고유의 조리법도 익혀야 하니까 궁중음식연구원 수업도 들었어요. 지금도 선생님들 찾아다니며 배워요. 다음 주에는 순대 수업이 있어요. 힘들어도 제가 선택한 길이잖아요. 부모님이 반대했는데도 싸워서 택한 거라 힘들어도 부모님께 찡찡대지 못하고, 핑계를 댈 수도 없었죠(웃음).
손님이 들어오기 전보다 행복해져 나갈 수 있도록 고민
디저트를 담은 자개함.
음식 외적인 부분까지 챙기는 이유는 무엇이죠.
이 사회에서 자라왔으니까 저도 사회를 위해 무언가 도움이 돼야죠. 음식 만드는 사람으로서 환경이 없으면 요리를 못 하잖아요. 환경을 신경 쓰는 게 당연하고 또 제가 이렇게 해야 같이 일하는 팀원들도 보고 배워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 역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셰프님들로부터 그렇게 배웠고요. 그런데 텃밭 같은 경우는 환경을 생각한 부분도 있지만 요리하는 친구들이라면 음식에 쓰이는 꽃이 어떻게 생겼고 맛은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셰프로서의 성장을 위해 시작했어요.
좋은 사람이 좋은 요리를 만들고 있네요. 셰프님이 추구하는 ‘파인 다이닝’은 어떤 건가요.
만족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요. 손님이 들어오기 전보다 행복해져서 나갈 수 있는 다이닝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예전에는 나를 과시하는 느낌으로 무언가 보여줘야 할 듯했는데, 지금은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좀 더 들렸으면 좋겠고 손님이 특별한 경험을 하고 돌아가면 좋겠어요. 당연히 그 특별한 경험 안에 맛과 서비스도 포함돼 있을 테고요.
손님의 특별한 경험에는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라 리스트’ 선정 같은 이름값에서 오는 가치도 포함될 텐데요. 지금의 자리를 유지 또는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나요.
많죠. 그런데 이제 시작이에요. 1년 전 음식을 지금 보면 부끄러워요. 물론 그때 낸 음식이 이상했다는 건 아닙니다. 당시로선 최선이었겠지만 돌아보면 더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이타닉 가든의 음식 중 오픈 때부터 빠지지 않고 준비하는 콩 요리도 모양과 농도, 들어가는 재료 등을 조금씩 바꾸면서 업그레이드하고 있어요.
음식에 진심인 분이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인터뷰 끝나고 저녁 식사 메뉴는 뭐예요.
일할 때는 테이스팅을 계속하니까 식사는 안 해요. 출출하면 간식으로 과일, 견과류를 주로 먹고, 가끔 근처 순댓국집에서 순댓국 한 그릇 먹고 와요. 떡볶이랑 과자도 좋아하는데 자극적인 걸 좀 덜 먹으려고 자제하는 편이에요. 저는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면 다 좋아해요. 다만 고쳐야 할 점이긴 한데, 음식으로 장난친 느낌이 들면 먹지 않아요. 손님에 대한 존중이 없잖아요. 그래서 저도 점점 더 근본에 충실해지려 노력해요.
메뉴판만 봐도 그 식당이 음식을 대하는 자세를 알 수 있다. 이타닉 가든의 겨울 메뉴로는 남리아 수셰프(부주방장)의 추억이 담긴 머위와 김정환 셰프 드 퀴진(주방장)이 추천하는 겨울 매생이, 김성국 이그제큐티브 소믈리에가 좋은 와인에 빗댄 겨울 해산물을 듬뿍 넣어 만든 김치 등이 나간다. 라망 시크레는 디저트는 먹지 않아도 치즈는 꼭 먹는 프랑스 친구들을 보면서 손종원 셰프가 구상한 치즈 코스, 지속 가능성을 위해 육류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랑구스틴과 블랙 트러플 라비올리 등을 준비했다. “메뉴를 바꿀 때마다 왜 아이디어가 안 나올까 자괴감에 쩔어 산다”며 “스스로 한계를 짓지 않으면 결국 평소 쌓아둔 경험에서 아이디어가 나온다. 그 과정이 재미있다”는 손 셰프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잘하는데 즐기기까지 한다면 필승 조합이다.
#이타닉가든 #라망시크레 #파인다이닝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사진출처 손종원 SNS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