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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생 사용설명서 여덟 번째 | 내 인생의 플랜B

“9회 말 투아웃에 다시 시작하다”

잠재력 인정받던 야구 선수에서 게임 기획자 된 최홍진

글 | 권이지 객원기자 사진 | 조영철 기자

2012. 06. 25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게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던 남자는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부상을 당했다. 수술 후 재활해도 선수 생명이 어렵다는 의사의 말과 함께 프로 구단에서 계약을 포기하겠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는 하늘이 원망스러웠지만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반전을 꾀했다.

“9회 말 투아웃에 다시 시작하다”


매년 프로야구 시즌이 끝나면 졸업을 눈앞에 둔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수를 뽑는 신인 드래프트가 열린다. 학생들이 프로 선수라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리다. 선수로 등록된 몇천 명 중 8개 구단(이제 9개 구단)이 뽑는 신인 선수는 1백 명 안팎. 그마저도 루키 시즌에 뛸 수 있는 선수는 몇 없다. 상위 라운드에 뽑히는 선수 한둘은 1군 무대에서 얼굴을 볼 수 있지만, 하위 라운드에 뽑히는 선수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2군을 전전하다 기회를 잡지 못하고 야구를 그만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해에 살아남는 선수는 고작해야 5명 내외다.
2001년 한국야구위원회 주최 신인 드래프트 9라운드로 두산 베어스에 지명된 최홍진(30) 씨도 비슷한 고민을 했다. 프로 무대에서 뛸 것인가, 대학에 진학할 것인가. 경기도 분당에 위치한 네오위즈 게임즈 사옥에서 만난 그는 운동선수로는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을 지녔다. 수줍은 미소가 인상적인 그의 야구 경력은 13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해 야구 명문인 신일고에서 투수로 활약했지만 타고난 체격 조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의 주무기는 빠른 공이 아니라 머리 싸움. 경기 상황과 타자의 심리를 읽어내는 기술이 뛰어났다.
고교 야구 대회인 봉황대기 전국대회 예선 경기에서 7회까지 2실점으로 막아 경기 MVP에 뽑힌 적도 있다. 두산 베어스는 그런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 그를 지명했다. 하지만 최씨는 프로에 입단하지 않고 대학 진학을 택했다. 부모님의 설득도 있었고, 계약금 문제도 있었다. 상위 라운드에서 선택된 선수들 중에는 계약금으로 10억원 이상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하위 라운드로 갈수록 계약금이 낮아지기 때문에 스스로 좀 더 갈고닦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홍익대에 입학해 대학 리그에서 뛰었다.
졸업을 1년 정도 앞둔 어느 날, 그는 어깨가 말을 듣지 않아 병원을 찾았다가 어깨 뒤쪽 연골이 찢어지는 ‘우측 견관절 외순박리’라는 진단을 받았다. 무리한 운동으로 연골에 이상이 온 것. 한 번 손상되면 회복되지 않는 것이 연골인지라 수술 후 7개월간 재활하며 재기를 준비했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만 하며 살았기에 다른 길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활 기간 동안 두산으로부터 드래프트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프로 선수가 되겠다는 꿈은 산산조각 났다.

야구밖에 모르던 남자, 새 삶을 위해 공부, 또 공부하다

“9회 말 투아웃에 다시 시작하다”

최홍진 씨는 여전히 공을 던진다. 이전에는 승리를 위해서였다면 지금은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다.



사실 재활 기간 동안 그는 운동 대신 공부를 했다. 어쩌면 다시는 마운드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공부라도 해놓자는 심산이었다. 체육학과에 재학 중인 다른 학생들이 운동에 치중하느라 공부에 소홀한 틈을 타 그는 착실히 학점을 쌓았다. 중고교 시절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으니 책상 앞에 앉아 있기조차 힘들었지만, 만약 야구를 포기해야 한다면 남들보다 곱절은 노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절박해졌다. 하나밖에 없던 목표를 잃어버렸지만 방황은 하기 싫었다.
“우리나라는 ‘엘리트 체육’이라고 해서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합숙을 하며 훈련해요. 공부는 거의 하지 않죠. 친구도 같이 운동하는 동료들 외에는 없고요. 누구나 다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운동 외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전혀 몰라요. 다른 것을 경험한 적 없으니까요.”
주변에서 같이 운동했던 친구들 중에 프로 선수가 되지 못한 경우 나쁜 길로 빠져든 이들도 있었다. 그는 체육 교사가 되고 싶어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졸업 후 3년 정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했지만 임용고시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또다시 미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때 석사 졸업 당시 쓴 논문이 떠올랐다.
전공은 교육학이었지만 그는 스포츠 마케팅에 관심이 많아 그와 관련된 주제로 논문을 썼다. 스포츠와 스포츠 게임, 광고 마케팅에 대한 내용이었다. 졸업 논문을 쓸 당시 농구 시즌이라 그에 대해 썼지만, 본래 관심사는 역시 야구였다. 2010년 프로야구 메인 스폰서는 CJ 계열 게임 회사 넷마블의 야구 게임 ‘마구마구’였다. 2등신의 만화 캐릭터로 재미를 더한 이 게임은 프로야구 흥행과 함께 큰 인기를 얻었다. ‘마구마구’의 성공을 보고 게임과 스포츠, 광고를 접목하고 싶다는 생각에 학교를 그만두고 게임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2010년 말 게임 회사 네오위즈 게임즈의 자회사에 입사, 운영업무를 담당했다. 그는 2012년 초부터는 네오위즈 게임즈에서 준비 중인 게임 ‘야구의 신’ 기획자로 적을 옮겼다. 회사에서 야구 게임을 준비하던 중 선수 출신인 그의 노하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야구 선수도 선생님도 해봤지만 기획 업무는 처음이었던 그에게 이번 임무는 새로운 도전. 열린 마음으로 대해주는 동료들 덕에 위기를 넘기며 많이 배우고 있다고 웃어 보였다.
그가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게임 ‘야구의 신’은 원하는 선수를 모아 배치하고, 구단주와 감독이 돼 구단을 운영하는 야구 매니지먼트 게임이다. 그는 실제 선수들의 이름과 연봉, 능력치가 모두 게임에 반영되도록 준비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실제에 가까운 움직임을 위해 모션캡처 프로그램으로 자신의 투구 폼과 타격 폼을 입력하기도 하는 등 자신이 야구 선수 시절부터 쌓아왔던 노하우를 통해 게임의 리얼리티를 살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야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료들과도 야구로 교류한다. 야구는 물릴 만큼 했으니 선수로 뛰기보다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에 회사 야구팀의 코치를 맡았다. 게임 회사 직원들이 만든 사회인 야구 리그인 ‘게임인 리그’에서 그의 지도를 받은 팀이 2011년 우승을 거두는 등 지도자로서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무렵 그가 자녀를 프로 선수로 키우고 싶어 하는 부모님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고 싶다고 했다. 요즘 들어 자신처럼 운동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는 우리나라 체육 교육에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 초·중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소질이 있어 운동을 시키고 싶다면 학교보다는 클럽 활동을 통해 접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공부와 운동을 병행해야 혹시라도 이 길이 아닐 때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늦지 않고요. 어린 시절에는 하나가 아닌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선수 생명을 앗아간 부상은 최홍진 씨에게 전화위복이 됐다. 실패와 좌절은 강도만 다를 뿐 누구에게나 온다. 남들보다 많이 늦고, 멀리 돌아왔지만 그는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며 하루하루 자신의 삶을 구원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미국 메이저리그 팀 뉴욕 양키스의 전설, 요기 베라의 명언이 떠올랐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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