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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노배우의 열정

12년 만에 연극무대 도전하는 나문희

글·김수정 기자 / 사진·홍중식 기자

2008. 09. 17

연기파 배우 나문희가 12년 만에 연극무대에 오른다. 연극 ‘잘 자요, 엄마’에서 자신의 눈앞에서 자살하려는 딸을 결국 막지 못하는 엄마를 연기하는 것. 그가 연극무대로 돌아온 소감과 실제 세 딸을 둔 엄마로 살아가는 모습을 들려줬다.

12년 만에 연극무대 도전하는 나문희

제시: 날 막으려고 애쓰지 마, 엄마…. 더 이상은 안 돼.
델마: 왜 안 돼! 왜 못해! 내가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넌 날 빠져나갈 수 없어.
제시: 잘 자요, 엄마.
델마: 안 된다, 아가. 그러지 마, 제발….
(총소리 들린다)
델마: 제시, 날 용서해다오. 난 네가 여태껏 내 것인 줄 알았단다.

어느 날 갑자기 두 시간 내에 자살하겠다며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딸. 엄마는 처음엔 딸이 괜한 심술을 부린다는 생각에 짜증을 내지만 점점 딸의 말과 행동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깨닫는다. 엄마는 상투적인 말로 딸의 행동을 말리지만 딸은 결국 자신의 방에 들어가 방아쇠를 당긴다.
8월29일부터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막이 오르는 연극 ‘잘 자요, 엄마’는 간질을 앓다가 자살을 결심한 딸이 엄마와 마지막 밤을 보낸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나문희(67)는 평소 딸 제시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을 뒤늦게 자책하는 엄마 델마 역에 손숙과 더블캐스팅됐다. 그가 연극무대에 오르는 것은 ‘어머니’ 이후 12년 만이다.
공연을 앞두고 만난 그의 눈은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아침부터 연습하면서 많은 눈물을 쏟았기 때문이다.
“특히 딸이 남편에게 버림받는 장면을 연기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어요.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습에 몰두하고 있어요. 오늘은 상대배우와 대사를 맞추면서 ‘내가 그래도 이만큼 해냈구나’ 싶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죠. 상대배우를 딸처럼 생각하고 연기하는데, 그런 비극적인 상황을 겪어보진 않았지만 연기하다 보면 세 딸을 키우면서 느꼈던 감정이 저절로 밀려와요.”

“딸들이 제 연기 보고 가슴 아파할까봐 공연 보러 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는 요즘 엄청난 숙제에 눌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연극열전 기획을 맡은 조재현씨가 출연을 제의했을 때 작품이 마음에 들어 무조건 한다고 했어요. 제시의 태도를 보면서 제 딸들이 떠올랐거든요. 델마 역시 읽으면 읽을수록 저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얼마 전, 재현씨에게 ‘나 좀 살려줘, 대신 맛있는 거 사줄게’ 하면서 사정했어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2인극이 벅차더라고요. 더욱이 델마의 말투가 굉장히 빠르고 날씨도 더워 체력소모가 크고요. 자존심 때문에 아닌 척하지만 사실 무대공포증 때문에 많이 떨리기도 해요.”
드라마와 영화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그가 다시 연극무대에 선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무대로 돌아온 것을 ‘재훈련’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12년 만에 연극무대 도전하는 나문희

“어떤 사람들은 탤런트가 멋 부리기 위해 연극무대에 선다고 말하는데, 그런 마음을 갖고서는 절대 연극을 할 수 없어요. 관객이 먼저 알아차리거든요. 탤런트 생활을 하다 보면 재훈련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는데 좀처럼 재훈련을 할 기회가 오지 않았어요. 저는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천하일색 박정금’에 출연하면서 벽에 몰린 듯한 느낌을 받았죠. 땅에 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절실함을 느꼈는데, 연극 연습에 들어간 순간 호흡이 깊어지고 발이 땅에 붙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연극은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관객과 직접 만나 공감대를 형성하는 매력이 있다”는 그는 특히 ‘잘 자요, 엄마’는 자신의 연기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될 것 같다고 얘기한다.
“저도 딸 셋을 가진 엄마니까 진짜 제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시는 세 딸의 면면을 합쳐놓은 듯한 아이예요. 권총자살을 한다는 설정이 충격적이지만 정서적인 거리감이 느껴지진 않았어요. ‘모녀지간이라고 해도 전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연극 내용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거든요. 제가 느낀 이 감정이 잘 전달돼야 할 텐데…(웃음). 소극장에서 관객과 함께 울고 웃고 숨쉬는 걸 상상만 해도 설레고 기뻐요.”
하지만 그는 세 딸에게는 공연을 보러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세 딸은 나문희를 배우로서 자랑스러워하고 그가 어떤 연기를 하더라도 믿고 응원하는 든든한 지원군. 그래서 배역이 크든 작든, 그가 나오는 모든 드라마와 영화를 챙겨 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을 보고 혹시나 너희들의 마음이 약해질까봐 이 작품만큼은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자녀들에게 말했다고.

12년 만에 연극무대 도전하는 나문희

딸 셋을 가진 나문희는 연극을 하면서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저희 아이들은 제가 무대에서 벌거벗고 춤춘다고 해도 ‘엄마는 배우니까’ 하고 이해해줘요. 하지만 아무리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도 제게는 언제나 품 안의 자식이잖아요. 지난 96년 MBC 특집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들다 말기암을 선고받는 며느리를 연기했는데, 아이들이 드라마에 푹 빠져 펑펑 울더라고요. 이번에도 그럴까봐 신경 쓰여요. 무대에서 연기하는데 객석에서 딸들이 울고 있으면 제대로 연기에 몰입할 수 있겠어요.”
나문희는 드라마 ‘굿바이 솔로’에서 말 한마디 없이 표정만으로 애절한 모정을 드러낸 할머니,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 에이즈에 걸린 며느리를 보며 눈물 흘리는 시어머니, ‘열혈남아’에서 아들을 죽이러 온 남자와 모자의 정을 맺는 엄마 등 수많은 엄마를 연기하면서 ‘대한민국 대표 어머니’라고 불려왔다. 그에게 “이번 작품으로 ‘대한민국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겠다”고 하자 그는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게 가장 싫다고 대답했다.
“한국에 있는 어머니 중 ‘대한민국 어머니’가 아닌 사람이 있나요? 처음에는 그렇게 불러줘서 고마웠는데 차츰 부담스러워지더라고요. 다만 이런 건 있어요. 예전의 작품들에 나온 엄마가 주로 남편의 그늘 아래에서 무조건 순종하고 자식에게 희생하는 엄마였다면 제가 요즘 주로 표현하는 엄마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엄마예요. 그냥 자기 할 말 다 하면서 열심히 사는 ‘나문희표 어머니’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그는 평소 어떤 엄마일까. 그는 “자식들에게 자주 전화를 걸고 자식들을 챙기는 편이지만 김치도 담글 줄 모르는, 살림보다는 연기에 마음을 빼앗긴 엄마”라고 한다.
“이 세상에 엄마라는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각박하고 험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엄마가 있어 사람들이 숨을 쉬고 사는 거 아닌가요. 제가 보기에 엄마는 자식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존재를 제자리에 서게 하고 보듬어주는 사람 같아요.”
그는 자신의 실제 모습은 지난해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여봉, 문희는요~” 하면서 콧소리를 내고 애교 부리던 ‘애교문희’와 닮았다고 했다. 평소 즐겨 부르는 노래는 패티김의 ‘4월이 가면’과 윤복희의 ‘웃는 얼굴 다정해도’. 지난 봄 개봉한 영화 ‘걸스카우트’에서 직접 와이어액션을 선보일 만큼 도전의식도 강한 편이라고. 그는 이날 연두색 티셔츠에 주황색 바지를 입어 화사한 분위기를 드러냈다. 인터뷰 내내 밝고 명랑한 목소리를 유지한 그의 웃음은 시원했고, ‘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저는 가볍고 경쾌한 걸 좋아해요. 정장보다는 편한 캐주얼을 즐겨 입죠. 말을 조리 있게 하는 편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고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는 평소보다 무대 위에서나 카메라 앞에서 더 과감해진다고 한다. “어머,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하며 자신도 놀랄 정도로 즐기면서 연기한다고.

늦은 나이에 주목받을 수 있는 건 젊은 시절 좌절하지 않고 노력했기 때문
그는 자신을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배우”라고 말한다. 지난 61년 MBC 성우 1기로 데뷔한 그는 성우로 활동할 당시에는 주인공 역을 많이 맡았지만, 탤런트로 활동의 폭을 넓힌 뒤로는 술집마담·가정부·동네아줌마 등 비중이 작은 배역을 주로 연기했다고 한다.
“비록 작은 역이었지만 내가 아니면 아무도 소화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물론 ‘저 역할은 내가 하면 좋겠다’며 주연배우를 부러워한 적이 있지만, 곧 ‘저 배우가 나보다 연기를 잘하기 때문에 맡긴 것이다’라고 마음을 고쳐먹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어요.”
평범한 중견배우였던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건 지난 95년 일일드라마 ‘바람은 불어도’로 KBS 연기대상을 수상하면서부터. 이후 대종상·청룡영화제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영화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에서는 단독 주연을 맡아 60대 연기자의 저력을 보여줬다.
“뒤늦게 철이 드는지, 나이 들수록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게 돼요. 가급적 시간 약속을 어기지 않고,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죠. 가끔 주위에서 연습을 많이 하면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냐고 묻는데 저는 오히려 연습할수록 감정이 채워지는 것 같아요. 웃든 울든, 그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신이 울면 무당이 굿으로 풀어주는 것처럼 저도 연기로 사람들의 맺힌 감정을 대신 풀어주고 싶어요.”
4년 전 과로와 고혈압으로 쓰러졌던 나문희는 요즘 걷기운동을 하면서 건강관리를 한다고 한다. 지난해 대장암 투병으로 고생하던 그의 남편 역시 현재 항암치료를 모두 마치고 건강을 되찾은 상태라고.
그의 꿈은 보는 이들에게 이웃처럼 편안한 연기자가 되는 것. 그는 “좋은 얘깃거리가 있으면 80대에도 주인공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이 들면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무대가 있는 곳에 무작정 내려, 연극을 보고 연기를 하며 그렇게 인생을 정리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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