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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주 특별한 사랑

영화감독 서동일씨와 4년 동거 끝에 뒤늦게 웨딩마치 울린 만화가 장차현실

글·정혜연 기자 / 사진·홍중식 기자

2008. 08. 22

이혼 후 다운증후군 딸 은혜와 단둘이 살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서동일씨를 만나 4년간 동거를 해온 만화가 장차현실. 그가 최근 서씨와 지각 결혼식을 올려 화제다. 장차현실씨를 만나 우여곡절 많았던 지난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영화감독 서동일씨와 4년 동거 끝에 뒤늦게 웨딩마치 울린 만화가 장차현실

만화가 장차현실씨(44)와 영화감독 서동일씨(37)는 4년 전 처음 만났다. 이혼 후 싱글맘으로 다운증후군 딸 은혜(18)를 키우며 소소한 일상을 소재로 한 만화를 연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던 장씨 앞에 장애여성의 성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핑크팰리스’를 촬영하던 서 감독이 나타난 것. 장씨는 자신에게 촬영협조를 부탁하는 그를 보며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동일씨 영화에 장애여성의 부모 인터뷰 장면이 들어가야 했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다 저와 연락이 닿아 양평 집으로 찾아왔어요. 저는 은혜를 키우면서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어진 상태였는데 동일씨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런 제 모습과 닮은 구석이 많아 첫만남부터 동질감을 느꼈어요.”
서울과 경기도 양평을 오가며 영화작업을 하던 서 감독은 어느 날 장씨에게 “내가 여기로 올까?”라고 물었고 서 감독에게 내심 호감을 느끼고 있던 장씨는 이를 승낙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작업실을 함께 쓰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고.
“만약 은혜가 동일씨를 거부했더라면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데 은혜는 처음부터 동일씨를 오빠라 부르며 잘 따랐죠. 같이 살게 됐을 때도 참 좋아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동일씨와 사이가 너무 좋아지다 보니 ‘나는 애인 없는데 엄마만 생겨서 샘나’라고 질투하긴 했지만…(웃음).”
‘영화감독 서동일’과 ‘배우 정은혜’로 처음 만났던 두 사람은 서로를 오빠, 동생이라 부르며 가까워졌다고 한다. 함께 산 이후에도 호칭은 바뀌지 않았는데, 세 식구가 장을 보러 나가면 그는 서 감독을 ‘자기’라 부르고 은혜는 ‘오빠’라 불러 사람들이 의아해하기도 했다고. 그러던 중 장씨가 임신을 하자 그때부터 은혜는 “오빠는 이제 다 컸으니 아빠해도 돼”라며 자연스럽게 서 감독을 ‘아빠’라 불렀다고 한다.
장씨와 서 감독은 함께 산 지 1년 만에 아들 은백이를 낳았고 3년 뒤인 지난 6월 초 결혼식을 올렸다. 그동안 혼인신고만 한 채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 없었던 두 사람이 마음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은혜가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괴롭힘을 많이 당해 장애학교도 보내보고, 홈스쿨링도 시키다가 대안학교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쪽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그곳에서도 장애와 비장애에 대한 편가르기가 그대로 행해져 은혜가 계속 상처를 받더라고요. 많이 겪어왔지만 겪을 때마다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죠. 곁에서 지켜보는 게 마음 아프고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늘면서 점점 스트레스가 심해졌고 결국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해 머리카락을 박박 밀었어요. 지금 머리는 가발이고요.”
두건 아래 세련되게 정리된 커트 머리를 만지며 그는 당시 상황을 그린 만화를 꺼내 보여줬다. 전기면도기로 자신의 머리를 깎는 장씨 뒤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선 서 감독이 눈에 들어왔다. 만화 속 서 감독은 힘들어하는 장씨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어깨 위에 살며시 손을 얹고 “결혼하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은혜 문제 외에 다른 일도 좀 있었어요. 저희 집은 은백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태어난 후에도 모든 것이 은혜를 중심으로 돌아갔거든요. 그러다 보니 은백이를 키우는 문제부터 시작해서 집안일 등 사소한 문제로 동일씨와 자주 부딪혔죠. 사람은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바닥을 드러낸다고 하잖아요. 제가 딱 그랬는데 놀랍게도 동일씨는 매번 제게 맞춰주더라고요. 그리고 극도로 예민해져 있을 때 제 마음을 헤아리고,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해준 거죠.”

영화감독 서동일씨와 4년 동거 끝에 뒤늦게 웨딩마치 울린 만화가 장차현실

두 사람이 함께 험난한 고비를 넘겨야 진정한 가족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장씨는 “풀어지고, 다져지는 시간을 많이 가져서인지 이제 우리 사이에 견고한 믿음이 자리 잡은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우여곡절 끝에 올리게 된 결혼식에 대해 그는 은혜, 은백이가 함께해 더욱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보통 결혼식은 두 사람의 결합을 알리는 자리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네 사람이 진정한 식구가 됐음을 알리는 자리였으니 결혼식이 아닌 ‘가족식’을 올린 셈이죠(웃음). 친척들과 마을 할머니들, 그리고 은혜, 은백이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분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였어요.”

“결혼식은 다운증후군 딸 지켜보며 고통 겪는 제게 남편이 준 선물이었어요”
장씨의 집은 은백이가 태어난 뒤 웃음이 끊이지 않지만 그는 처음 아이를 가졌을 때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임신했을 때 장씨의 나이는 이미 마흔을 넘긴 상태였고 주변 반응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생겼다고 말했을 때 다들 ‘낳으려고?’라며 되물었죠. 개인적으로도 은혜를 낳고 혼자 키우면서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 당황스럽기도 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아이를 선택한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부터는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라도, 만에 하나 동일씨와 헤어져도 꼭 낳겠다’고 다짐했죠.”
장씨는 임신 7개월이 될 때까지 산부인과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나이 들어 임신했기에 병원에서 분명 좋은 소리를 할 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산달이 다가와 장씨가 산부인과를 찾자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서는 그를 ‘고위험 산모’로 분류하며 각종 정밀검사를 권했다고 한다.
“임신한 내내 자연분만을 꿈꿨어요. 제왕절개를 권하는 큰 병원보다 자연분만이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작은 병원에서 제 힘으로 아이를 낳고 싶었죠. 수소문 끝에 자연분만을 권하는 병원을 찾았고 기대에 차 있었는데 예정일보다 통증이 빨리 와 병원에 갔더니 담당 의사선생님이 공교롭게도 여행을 가셨더라고요. 다른 선생님이 아이가 힘들어하고 있기 때문에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하셔서 결국 그렇게 했는데 정말 실망이 컸어요.”
다행히 은백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고 한다. 지난 5월 세 돌을 맞은 은백이는 요즘 다니는 놀이방에서 인기가 많다고. 은백이에게 전하는 축하 메시지가 빼곡히 적힌 롤링페이퍼를 보여주며 장씨는 “놀이방 선생님이 ‘이렇게 말 잘하고 영민한 세 살짜리 아이는 처음 봤다’고 말했을 정도”라며 아들 자랑을 했다.
“은백이가 태어나고 집안 분위가 많이 달라졌어요. 동일씨는 말할 나위 없고 은혜도 동생이 생겼다고 정말 좋아했죠. 은백이가 은혜 같은 누나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큰 축복이거나 영원한 불행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예요. 은혜가 동생에게 주는 거짓 없는 사랑은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선물인데 은백이가 크면서 그런 누나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축복일 수도 있고 불행일 수도 있겠죠.”
장씨는 최근 은혜와 단둘이 살던 때부터 서 감독을 만나 아들 은백이를 낳기까지의 소소한 일상을 그린 만화를 묶어 책으로 펴냈다. 장애와 비장애, 성별과 나이의 벽을 넘은 가족의 일상을 표현했다고 해서 제목도 평등하게 ‘작은 여자 큰 여자, 사이에 낀 두 남자’로 지었다고 한다. 숱한 고비를 함께 넘기고 ‘가족식’을 올린 이들 네 사람이 지금껏 살아온 날처럼 앞으로도 행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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