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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노장의 열정

10년 만에 다시 일선 현장으로 돌아온 ‘사랑이 뭐길래’ 박철 PD

글·김명희 기자 / 사진·성종윤‘프리랜서’

2008. 02. 22

‘사랑이 뭐길래’ ‘엄마의 바다’ 등 빅 히트 드라마를 연출했으며 할리우드 유명 배우 웨슬리 스나입스의 장인으로도 잘 알려진 박철 PD가 드라마 ‘전처가 옆방에 산다’로 10년 만에 현장에 돌아왔다. 그를 만나 오랜만에 다시 메가폰을 잡은 소감과 사위 이야기를 들었다.

10년 만에 다시 일선 현장으로 돌아온 ‘사랑이 뭐길래’ 박철 PD

드라마 ‘전처가 옆방에 산다’의 촬영 현장. 길이가 짧은 양복바지에 야구 모자를 눌러 쓴 노신사가 부지런히 세트를 누비며 연기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패션은 유행에 뒤떨어졌을지 몰라도 상황에 맞게 배우들의 대사 톤을 조절하고 불필요한 동작을 정확하게 걸러내는 데서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90년대 초반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며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와 ‘엄마의 바다’를 연출했던 박철 PD(69). 98년 SBS 드라마 ‘사랑하니까’를 끝으로 현장을 떠났던 그가 10년 만에 메가폰을 다시 잡았다. MBC 드라마넷을 통해 1월9일부터 방영되고 있는 새 드라마 ‘전처가 옆방에 산다’의 연출을 맡은 것.
“그동안 여러 차례 현업 복귀를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아 백수생활을 했는데 오랜만에 다시 연출을 하려니 처음에는 어색하더군요. 몇 년 쉬다가 자전거를 타는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오랫동안 안 탔다고 해서 자전거 타는 법을 잊는 사람은 없잖아요(웃음). 금방 적응이 돼서 이제는 슬슬 가속이 붙고 있어요.”
‘전처가 옆방에 산다’는 한때 스타였지만 현재는 인기가 시들해진 여배우(오정해)와 매니저인 남편(전노민)이 이혼 사실을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계속 함께 살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드라마. ‘홈드라마의 거장’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그의 컴백 작품치고는 제목이 좀 자극적이다.
“제목과 설정만 그렇지, 내용은 오히려 시트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어요(웃음). 가족간 사랑이 중심이 되는 드라마로, 기존에 제가 연출했던 작품들처럼 평범한 인물들의 일상사를 코믹하게 그려내는 데 중점을 두고 있죠.”
이번 드라마는 주연배우 오정해·전노민의 파격적인 변신으로도 화제가 됐다. 그동안 ‘착한 남자’ 전문이었던 전노민은 데뷔 후 처음으로 코믹 연기를 선보이고 있으며 오정해 역시 단아한 이미지와는 180도 다른 푼수끼 다분한 연기에 도전하는 것. 다소 모험 같은 이번 드라마의 캐스팅은 그가 직접 했다고 한다.
“배우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연기의 폭을 넓혀주는 게 연출자에게 부여된 임무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두 사람 모두 토크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무척 재치가 있더라고요. 코믹한 역에도 잘 맞겠다 싶어 눈여겨보고 있다가 이번 드라마에 캐스팅했는데 처음에는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은 나처럼 어색해하더니만 금방 몰입하더군요. 두 사람 모두 변신에 대한 갈증이 있던 터라 판을 만들어주니까 신들린 듯 열심히 하는 거죠.”

“처음에는 딸 내외 결혼 반대했지만 3남1녀 키우며 사는 모습 보면 흐뭇해요”
10년 만에 다시 일선 현장으로 돌아온 ‘사랑이 뭐길래’ 박철 PD

촬영에 앞서 전노민, 오정해 등의 연기자들과 리허설을 하고 있는 박철 PD.


박철 PD는 ‘블레이드’ ‘덩크슛’ ‘데몰리션맨’ 등에 출연한 영화배우 웨슬리 스나입스(46)의 장인으로도 유명하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딸 나경씨(35)가 97년 웨슬리 스나입스를 만나 2003년 결혼한 것. 이 부부는 슬하에 3남1녀를 두고 있다. 박 PD는 딸이 외국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많이 반대했다고 한다.
“처음엔 두 사람 결혼에 회의적이었어요. 딸이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하기는 했지만 근본에는 동양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어 외국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 것 같지 않았거든요. 더군다나 상대가 할리우드 유명 배우라 가정에 소홀하지 않을까 걱정도 됐고….”
‘사랑이 뭐길래’가 방영되는 동안 대한민국의 모든 아버지는 가부장적 권위의 상징인 ‘대발이 아버지’(이순재)와 민주적 아버지상을 대변하는 ‘지은이 아버지’(김세윤)로 나뉘었다. 그 드라마를 찍으면서 스스로 ‘대발이 아버지’에서 ‘지은이 아버지’로 옮아가려 노력했다는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가족들의 의사를 존중해 딸 내외의 결혼을 허락했다고 한다.
“어려서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저 역시 가족들에게 무척 권위적이었죠. 그런데 가치관의 변화에 민감한 방송국에서 일하다 보니 제 안에서 두 가지 가치관이 충돌을 일으키더군요. 그러던 중 ‘사랑이 뭐길래’를 촬영하면서 더 이상 ‘대발이 아버지’ 같은 가장이 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아이들 결혼문제는 제 의견을 접고 아내 뜻에 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것 같아요. 사위가 딸을 끔찍하게 아껴주고 또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요.”
한국이든 미국이든 아이들 키우는 일은 만만치 않을 터. 그의 아내는 수시로 미국 뉴욕에 사는 딸 내외의 집을 찾아 육아를 돕는다고 한다. 딸 내외는 아이들을 무척 엄하게, 독립적으로 키우고 있으며 그 점에선 한국식보다는 미국식에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일년에 꼭 한두 번씩 한국을 방문해 아이들에게 한국문화를 체험하게 한다고.
세계적인 배우를 사위로 둔 소감은 어떨까.
“사위는 백년손님이라고 하잖아요. 우리 사위도 마찬가지예요. 다만 ‘한국 사람이었더라면 대화도 더 많이 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오락거리도 많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죠. 그래도 기특한 면이 많아요. 겸손한데다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모르는 건 배우려고 노력하고….”
일흔 가까운 나이에 다시 일을 손에 잡기까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메가폰을 잡으라고 권한 사위의 힘이 크다는 그는 자신 연배의 사람들이 경험을 살려 할 수 있는 일들이 조금씩 늘어나면 좋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우리나라는 모든 일이 젊은 층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사회 전반에 조로 현상이 만연한 것 같아요.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해서 한창 일할 나이에 직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도 아쉬운 일이고요. 앞으로는 우리 사회에 경험이 존중받고 연륜이 빛을 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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