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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중 3백일을 무대에 서는 ‘라이브의 여왕’ 이은미

“지금까지는 저를 위한 음악을 해왔지만, 이젠 저를 지켜준 이들을 위해 노래하고 싶어요”

기획·송화선 기자 / 글·오진영‘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2006. 06. 19

‘맨발의 디바’ ‘라이브의 여왕’으로 불리는 가수 이은미가 2년간의 침묵을 깨고 새 앨범 ‘마 농 탄토’를 내놓았다. 한때 노래를 떠나고 싶어 방황했다는 그를 만나 삶과 노래에 대한 진솔한 고백을 들어보았다.

1년 중 3백일을 무대에 서는 ‘라이브의 여왕’ 이은미

지난 5월 중순 가수 이은미(39)를 만난 곳은 홍대 앞 한 사진 스튜디오였다. 오후 1시부터 7시 무렵까지 계속된 사진촬영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인터뷰를 위해 옆자리에 앉은 그는 무척 고단해보였지만, 눈빛만은 행복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은미를 ‘라이브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그는 천생 가수인 사람이다. 하지만 스스로는 자신이 가수가 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고, 고등학교 합창 동아리에서 솔로를 맡은 적도 있었지만 학창시절 누군가 장래 희망을 물으면 ‘특수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지만 고 3 때 몸이 아파 학교를 많이 빠지는 바람에 (지금의 수능시험인) 학력고사를 잘 못봐 특수교육과 진학에 실패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리 디스크가 생겨 3년 넘게 누워있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주로 누워있다 보니 음악을 듣는 데만 집착하게 됐어요. 사실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시간이 흐르며 몸은 좀 나아졌지만,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친구 가운데 한 명이 라이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그곳에 드나들며 음악을 듣곤 했다고. 그러던 어느 날 손님이 없는 틈을 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그 소리를 들은 카페의 가수 한 명이 다가와 그에게 ‘목소리가 좋다’며 가수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게 계기가 돼 그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음반을 선생 삼아 혼자 열심히 노래를 연습했고, 그러다 자신 있는 곡이 생기면 신촌의 라이브 카페에 가서 그 노래를 불렀다고. 그 시절 신촌에서 노래하며 만난 친구들이 강산에, 박학기, 한동준, 고 김광석, 김건모 등이다.
92년 ‘기억 속으로’가 담긴 데뷔 앨범 ‘외면’을 낸 뒤 15년 동안 이은미는 7백 번이나 무대에 섰다. 우리나라 여자가수 중 최다 공연기록이다. 1년 중 3백일 가까이 콘서트를 하는 그의 이름 앞에는 언제부턴가 ‘맨발의 디바’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됐다. 왜 그는 ‘맨발’로 노래하게 됐을까.
“단독 공연을 한 지 얼마 안돼 두 번째 콘서트를 할 때였어요. 11일 동안 하루 2회씩 공연을 하는 강행군이었는데 5일째 되는 날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대기실에서 혼자 엉엉 울다 거울을 봤는데 짙은 분장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장신구를 다 빼고 화려한 무대의상을 벗어젖힌 뒤 늘 입고 다니던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었다. 의상이 간편해지자 하이힐도 벗고 무대 위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때부터 ‘맨발’은 가수 이은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우연히 시작된 가수의 삶, 하지만 노래는 곧 제 인생의 모든 것이 됐어요”
“무대에 서면 그 다음부터는 본능에 이끌려가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객석의 긴장과 흥분이 제 심장으로 빨려 들어오는 거지요. 객석과의 일체감을 통해 또 다른 나로 변하는 걸 느낄 때의 희열과 감동, 그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짜릿하고 강렬합니다.”

1년 중 3백일을 무대에 서는 ‘라이브의 여왕’ 이은미

이은미가 립싱크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은 이 같은 무대의 매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가수라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불러야지 왜 음반 틀어놓고 입만 벙긋거리느냐”고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말하는 이가 없다 보니 그는 공격 대상이 됐고, 악성 인터넷 댓글 등에 상처를 받아야 했다. 아무도 떠맡으려 하지 않는 싸움의 의무까지 짊어진 채 끝없이 이어진 공연에 지쳐가던 그는 지난 2003년 ‘아예 음악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고 한다.
“소속사에 전화를 걸어 ‘6개월 동안은 날 찾지 말라’고 통보했어요. 그러고는 혼자 산으로 바다로 돌아다녔죠. 어렸을 때는 엄한 아버지 때문에, 가수가 된 다음에는 늘 스태프과 함께 다니느라 혼자 여행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자유의 시간 동안 이은미는 자기 자신과 음악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산사에서 만난 한 스님의 말씀은 그에게 새로운 출발점이 됐다.
“그분이 ‘지금까지 너 자신을 위해 노래했다면, 이제는 네가 있을 수 있도록 지켜준 사람들을 위해 재능을 써보라’고 하시는데, 그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할 수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찾아보자는 생각으로 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그 후 자신의 공연 모습이 담긴 테이프를 모니터링하는데 음악용어 ‘마 농 탄토(그러나 지나치지 않게)’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는 감정이 소리를 지배하는 음악을 했구나, 이제는 감정을 충분히 바닥에 깔아놓고 언제 들어도 편안한, 하지만 심장과 온몸을 데우는 좋은 밸런스의 음악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앨범이 6집 ‘마 농 탄토’. 이은미는 음반작업을 마친 뒤 ‘앞으로는 지금껏 나를 지켜준 사람들을 위해 음악을 하겠다’는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다시 공연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더 이상 서울의 콘서트장이 아니다. 지금 그는 전국의 소규모 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서고 있다.
이은미는 지방 곳곳에 과시용 공연장을 지어놓고 1년 중 대부분의 날은 아무 공연도 하지 않은 채 비워놓는 나라가 세계 어느 곳에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위한 음악공연’의 첫 순서로 지방 문화예술회관 투어를 기획했다고. 그는 공연장을 비워놓을망정 대중음악인들에게는 대관하지 않는 일부 지방 문화예술회관의 벽을 깨기 위해 이 콘서트의 이름을 ‘문화혁명 콘서트’라고 붙였다.
오늘의 이은미를 있게 해준 주위 사람들과 팬들을 위한 음악을 하기 위해, 아직 멀고 험한 길로 남아있는 문화혁명 콘서트를 계속하기 위해 그는 이제 신발끈을 고쳐 매겠다고 말했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가수, 신뢰할 수 있는 가수 이은미로 기억해주신다면 저는 행복한 음악인일 것”이라고 말하는 이은미의 표정이 활기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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