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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새로운 도전

일본영화 ‘린다 린다 린다’ 주연 맡은 배우 배두나

기획·구가인 기자 / 글·류정‘조선일보 기자’ / 사진ㆍ동아일보 사진DB파트, 조선일보 제공

2006. 05. 18

“예쁘지 않게 보이는 게 나빠?” 영화 ‘린다 린다 린다’ 촬영 전, 일본 유학생 ‘송’ 역을 맡은 주인공 배두나는 메이크업을 거부했다. 감독은 당황스러워했고, 동료 배우들은 말렸다. 하지만 아직 덜 여문 고등학생에게 파운데이션과 아이섀도가 무슨 소용 있단 말인가. 배두나는 맡겨진 배역을 위해서라면 꾸며진 예쁨보다 자연스러운 수수함을 선택할 줄 아는 ‘진짜’ 배우였다.

일본영화 ‘린다 린다 린다’ 주연 맡은 배우 배두나

지난 4월 중순 개봉한 일본영화 ‘린다 린다 린다’에서 한국 유학생 ‘송’ 역을 맡아 스크린으로 돌아온 영화배우 배두나(27).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이후 3년 만에 만난 그는 여전히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씀벅거리며 ‘안 예쁘면 안 되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스물일곱, ‘여자의 황금기’ ‘20대의 절정’ 등으로 미화되는 그 나이에 안 예뻐 보여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는 여배우는 몇이나 될까.
“실제론 저도 패션이나 뷰티에 관심 많아요. 예쁜 옷, 예쁜 구두… 하지만 영화에선 그런 아이가 아닌데 억지로 그러는 건 못 참겠더라고요. 더구나 제가 화장법에 따라 이미지가 많이 바뀌는 얼굴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의 ‘태희’도 맨얼굴이었다. 돌연 일본영화에 캐스팅된 것도, 연기에 대한 그의 이런 진지함이 작품들 속에 녹아 있던 덕분일 것이다. ‘린다 린다 린다’의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배두나를 보고 ‘찍었다’고 한다. 이미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천재적인 감독이니 무조건 하라”는 말을 들었던 배두나는 망설임 없이 일본행을 결심했다.
“‘송’은 정말 저 자체였어요. 일본어나 노래를 얼마나 준비했냐고 하시는데, 그냥 고등학교 때 혼자 끄적이며 익힌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읽는 정도였어요. 아마, 촬영 내내 이방인으로 그들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이 ‘송’이 친구들과 어울리고, 노래를 배워가는 모습과 닮았을 거예요.”
영화 속 ‘송’은 얼떨결에 ‘하이(응)’ 했다가 밴드의 보컬을 맡게 되고 말문이 막힐 땐 한국어를 외치는 소녀다.
배두나에게 “두나 어언니”라고 부르던 동료 일본 배우들은 그보다 최고 여덟 살이나 더 어렸다. 한국에서 온 이 눈 큰 언니를 ‘왕따’시키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고 한다.
“‘고양이를 부탁해’를 찍을 때보다 더 배우들하고 친해졌던 것 같아요. 밤에 호텔에 모여서 파자마 파티하면서 두부김치도 해먹고, 서로의 꿈이나 남자친구 얘기도 하고. 정말 학창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어요.”
배두나의 어머니는 연극배우 김화영씨. ‘고양이를 부탁해’에 ‘태희 엄마’로 특별출연하기도 했다.
“제가 배우로서 커가는데 어머니가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영화 ‘청춘’을 찍기 전, 베드 신 때문에 고민하자 ‘배우가 벗는 게 겁이나 베드 신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호통치시기도 했고요.”
흥행이 잘 안돼서 가슴앓이하고 있을 땐 “작품이 칭찬을 받는데 흥행까지 되면 너 너무 콧대 높아져서 안 된다. 하늘은 공평한 거다”라며 ‘쿨’하게 등을 쳐주었던 이도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딸 사랑은 지극해서 그의 길게 뻗은 예쁜 다리도 아기였던 배두나를 업지 않고 다리를 수시로 주물러줬던 어머니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데뷔했음에도 ‘어머니의 후광을 얻어 커온 배우?’ 하는 의심 어린 시선이 따라붙어 맘고생하기도 했다.

일본영화 ‘린다 린다 린다’ 주연 맡은 배우 배두나

“지금은 은퇴하셨고, 제게 따로 연기 지도를 해주지도 않으세요. 스스로 깨치라는 뜻이겠죠. 앞으로는 애송이 같은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립하는 이미지를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럼에도, 배두나에겐 큰 상처 없이 곱게 자란 듯한 ‘온실 속 화초’의 느낌이 남아 있다. 그런 그에게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상처받은 기억은 뭘까.

‘서른 살 이후 더 아름다운 배우’ 꿈꿔
“2000년 영화 ‘청춘’이 개봉된 다음이었어요. 당시 영화 홍보 포인트가 ‘배두나가 벗었다’였는데 얼마 후 헤어진 지 한참 된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더라고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시절 캠퍼스 커플로 사귀었던 첫사랑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러나 과거의 남자가 보내온 어이없는 통보는 “네가 그런 영화를 찍을 줄은 몰랐어. 네가 내 여자친구였다는 사실이 창피하다”였다.
“그때 너무 큰 상처를 받았어요. 저에겐 배우가 되기 위해 해내야 할 큰 과제였고, 넘어야 할 산이었는데… 그때 결심했어요. 누군가에게 ‘좋은 여자’가 되기보다는 반드시 ‘좋은 배우’가 돼야겠다고.”
옛 남자친구 얘기를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이 솔직한 여배우. 현재의 남자친구에 대해 물었더니 “없다”고 한다. 그러다 뭔가 찔리는 게 있는지 한 번 정정한다.
“아마, 없다고 말해야겠죠? 히히.”
그는 과거 한 잡지의 설문 조사에서 ‘내면이 가장 독특할 것 같은 여배우’로 꼽힌 적이 있다. 그래서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도 ‘외계인’이 많았다.
“아마 비현실적인 캐릭터를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순수하고 정의로운. ‘고양이를 부탁해’에서의 태희도 모두들 ‘나도 저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친구잖아요. 제가 그리는 이상향을 연기하다 보니 그렇게 보였나봐요.”
그가 작품을 고르는 기준을 보면 더 쉽게 이해가 간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작품은 싫어요. 억지스러운 유머나 설정도 싫고요. ‘린다…’는 스토리가 독창적이진 않지만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만의 유머가 있었어요. ‘반짝반짝거리는’ 감독이라면 서슴지 않고 하겠다고 말해요. 하지만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를 선택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런데 자꾸 ‘독특하다’고 해서 알았어요. ‘내가 재미있다고 하는 작품은, 나 같은 사람만 좋아하는구나’(웃음).”
배두나의 내면은, 화려한 원색을 덧칠하기보다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처럼 하얀 순백색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 때문에 더 튀는지도. 그는 연기 역시 하얀 종이에 그림 그리듯 한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을 함께 찍었던 박찬욱 감독으로부터 종종 “연기하는 데 고정관념이 없다”는 칭찬을 들었을 정도.
“저는 과거 겪었던 감정을 끌어올려 연기하기보다 캐릭터에 자신을 흡수시키려고 노력해요. 경험에 비춰 연기하는 건 한계가 있는 것 같거든요. 살인을 해봐야만 살인자를 연기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냥 백지 상태에 캐릭터를 녹이고, 나를 충분히 설득해서 표현하려고 해요.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어떻게 관객이 움직이겠어요. 손 동작 하나도 저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면 하지 않아요.”
이번 일본 촬영 때는 어린 일본 배우들에게 많이 배웠다고 한다. 기타와 드럼을 처음 쳐본다는 어설픈 뮤지션들은 “나는 진짜 기타리스트가 될 거야”라고 말하더니 한 달 만에 정말 그렇게 돼버렸다고.
“저는 그냥 흉내만 낼 줄 알았어요. 근데 결국 해내더라고요. 그 친구들 집념에 놀랐죠.”

일본영화 ‘린다 린다 린다’ 주연 맡은 배우 배두나

배두나의 별명은 ‘무심(無心)이’. 세상이 아무리 요란을 떨어도 크게 놀라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대소사를 잘 까먹는다고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사진기면 사진기, 꽃꽂이면 꽃꽂이… 하나에 ‘꽂히면’ 푹 빠졌다가 ‘다 됐다’ 싶으면 거들떠도 안 보는 성격도 ‘무심’과 닮았다. 그런 ‘쿨’함 때문일까. 배두나는 열등감이 없다. 재미 삼아 “자신감과 열등감이 몇 대 몇이냐”고 물었는데, ‘열등감 0’이라고 답한다.

“저 자신이 예쁘장한 여배우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남자 팬들이 좋아할 만한 얼굴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요. 하지만 그래서 더 좋아요. 제가 배우가 될 수 있었던 건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개성이 있기 때문에 설 자리도 있잖아요.”
배두나는 ‘오피니언 리더’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한다. 거창하게 논설을 쓰거나 연설을 해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저 여자 참 멋있다’ ‘저 여자가 하는 말은 믿음을 준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배우가 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서른 살 이후 제 모습을 혼자 상상하곤 해요. 진정한 배우의 인생은 서른 살부터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배우가 돼 있을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배우가 되기 위해 그냥 뚜벅뚜벅 걸어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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