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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궁금했습니다

재혼 후 부산으로 보금자리 옮긴 작가 함정임

“문학의 창작자와 연구자라는 점에서 더없는 파트너, 인생의‘좋은’전환점이 됐어요”

글·구가인 기자 / 사진ㆍ조영철 기자

2006. 05. 04

지난해 부산대 박형섭 교수와 재혼한 작가 함정임씨. 그가 최근 여섯 번째 단편집 ‘네 마음의 푸른 눈’을 펴냈다. 올 봄 학기부터 동아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부산으로 터전을 옮겨 남편,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재혼 후 부산으로 보금자리 옮긴 작가 함정임

어느 날 그는 길가 비탈진 풀섶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붉은 들 꽃 한 송이를 발견했습니다. 내려다보니 푸른 들꽃 한 송이가 멀지 않은 곳에 피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붉은 들꽃 한 송이를 꺾어 주었지요. 그녀는 그의 가슴에 푸른 들꽃 한 송이를 꽂아주고, 이름을 지어주었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함정임·박형섭이 지인들에게 결혼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중)

지난해 8월 작가 함정임씨(42)는 부산대 불문과 박형섭 교수(49)와 ‘들꽃 결혼식’을 올렸다. 일반적인 예식장 결혼식 대신 2주간 아일랜드 여행을 떠나 소박하게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린 것. 아일랜드로 떠나는 날, 청첩 대신 보낸 들꽃 다발이 인쇄된 편지는 당시 세간의 잔잔한 화제가 됐다. 신문 신간 코너에 실린 함정임의 여섯 번째 책 출간 기사를 보자 문득 이들 부부의 소식이 궁금했다.
“아유, 먼 길 오셨어요.”
함정임씨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부산 신시가지의 한 아파트. 목요일 이른 오후였건만 남편 박형섭 교수도 함께 있었다.
“저는 월화수에 수업이 있고, 집사람은 월수금에 수업이 있어요. 목요일은 둘 다 수업이 없는 날이죠.”
부산 신시가지 전경이 훤히 내려보이는 이 전망 좋은 아파트는 원래 몇 년 전부터 박 교수가 혼자 살던 곳이다. 결혼한 뒤에도 함정임씨의 거처가 있던 경기도 일산과 부산을 오가며 생활하던 이들 부부는 얼마 전 부산에 완전히 터를 잡았다. 올해 3월부터 함정임씨가 동아대학교 문예창작과 전임교수가 된 것.
“남편이 수요일 수업을 마치면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지내다가 월요일 아침에 부산으로 내려가 수업을 했어요. 몰랐는데 부산으로 이사 온 뒤에, 그때 힘들었다고 말하더라고요(웃음).”
안주인 함정임씨가 향 좋은 홍차를 내놓는다. 테이블 위에 놓인 빨간 딸기와 홍차가 일부러 꾸민 듯 예쁘게 어울리고 반듯하게 정돈된 집안 구석구석에서는 집주인의 감각이 느껴진다. “이사 온 지 얼마 안돼 아직 어수선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가지런히 정리된 책이며, 곳곳에서 보이는 ‘하찮지만 아름다운’ 소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함정임씨가 산문집 ‘하찮음에 관하여’ 머리글에 쓴 “삶은 미적이어야 한다”는 어구가 떠올랐다. 그의 삶과 글은 날실과 씨실처럼 엮여 있다.
“아내와 제가 추구하는 게 상당부분 같아요. 저는 인생의 맛과 멋을 추구하는 게 행복의 기본조건이라고 생각해요. 삶의 공간에서 먹는 거며 입는 거, 걷는 거 이런 생활 속 작은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면 삶에 좀 더 진지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남편 박 교수 역시 ‘삶은 디자인이다’는 말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한다. 소소한 것들의 아름다움과 그 중요성을 느끼고 산다는 점에서 이 부부는 닮은 게 많다. 그래서일까. 서로가 처음부터 낯선 느낌이 없었다고 한다.

결혼을 계기로 ‘문학적 미망인’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들이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12월이다. 함정임씨의 ‘인생의 사용’을 읽고 감동받은 박 교수가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면서 가까워지게 됐고, 부산에 초청을 한 것. 당시 이야기 중 일부는 ‘네 마음의 푸른 눈’ 마지막에 실린 ‘푸른 모래’의 모티프가 됐다.
“이이는 다른 사람들한테 ‘푸른 모래’만 읽으라고 그래요(웃음). ‘푸른 모래’는 실제 이야기와 혼용해 쓴 거예요. 당시 홀린 듯 썼어요.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는 언어가 쑥 빠져나오는 느낌. 그럴 때가 많이 오지 않거든요. 그래서 저도 좋아하는 소설이에요.”(함정임)
“제가 그 현장에 있었으니까, 소설을 읽을 때마다 생생히 떠오르는 거죠.”(박형섭)

재혼 후 부산으로 보금자리 옮긴 작가 함정임

단편소설 ‘푸른 모래’의 모델이 된 남편 박형섭 교수와 함께.



함정임씨는 ‘자전거 도둑’으로 잘 알려진 작가 김소진의 아내이기도 했다. 97년 김소진이 서른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함정임씨는 김소진이 남긴 작품을 모아 전집을 펴낼 만큼 사별한 남편에게 예를 다했다. 이번 단편집에 실린 2002년 작 ‘문어가 물어봐’에서는 그 그리움의 흔적이 묻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김소진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굴레로 돌아왔다. 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함정임씨는 동아, 조선, 중앙, 경향, 서울 등 5개 사에서 동시에 작품이 당선될 만큼 재능 있는 작가였지만, 세상은 그를 ‘작가 함정임’이 아닌 ‘미망인’으로만 바라봤다.
“남편이 세상을 뜬 97년부터 2002년까지 많이 힘들었어요. 억울하죠, 갑갑하고. 저를 저쪽에 놓고 ‘너는 이쪽에 있어라’ 그러는 거잖아요. 작가가 죽음이나 비극 없이 어떻게 늘 해피엔딩만 쓰겠어요. 그런데 제 소설 속 죽음이나 비극은 다 김소진의 죽음으로만 연관해서 해석하셨죠. 이해한다는데 대체 뭘 이해해요? 2002년 이후에는 완전히 극복했는데, 그전까지 한 5년 이상 작가로서 속상한 부분이 많았어요. 원래 허무주의적인 성향이 강한데, 그런 초월적인 상태가 아니었으면 더 힘들었을 거예요.”
함정임씨의 30대는 그래서 더 고독했다.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 태형이와 소설쓰기. “유난히 피붙이에 대한 정이 많다”는 함정임씨는 박 교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가 결혼을 결정하게 된 계기는 뭐였을까. 함정임씨는 ‘사랑’과 ‘안정’을 그 이유로 꼽는다.
“서로가 만나게 된 건 어떤 운명적인 것, 초월적인 힘 같은 게 있는 거 같아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큰 움직임에 의해 만난 것 같은 느낌이요. 결혼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 건 아이였어요. 아이가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결심을 굳히게 됐죠.”
어린 시절부터 “과학자가 돼 엄마를 20년 젊게 만들어주겠다”고 말하던 살가운 아들 태형이는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이다. 아이는 박 교수와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낸다고 한다.
“우리 아이가 그렇게 쉬운 아이는 아니에요. 감수성도 남다르고. 아빠의 죽음처럼 그 나이 또래 다른 아이들에게 드문 경험을 가지고 있고, 천성적으로도 예민한 부분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둘이서 너무 강하게 결합돼 살았기 때문에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잘 지내요. 제겐 참 감사할 일이죠.”



역사적 인물을 다룬 소설 준비 중, 남편과 멕시코 여행 다녀올 계획
재혼 후 부산으로 보금자리 옮긴 작가 함정임

결혼으로 두 사람의 삶 역시 많은 게 바뀌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재혼이 인생에서 좋은 ‘전환점’이 됐다고 말한다.
“(결혼 전과) 큰 차이가 있죠. 완전 바뀌었으니까요. 쉬운 예로 결혼이 아니었다면 부산에서 생활하지도 않았을 거고요. 게다가 아이 문제에 있어서도 훨씬 안정적이에요.”(함정임)
“엄청 변한 거 같아요. 상승한 느낌. 결혼 전에도 매번 강조했어요. ‘같이 사는 건 지금보다 좋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했죠. 만족해요.”(박형섭)
문학의 창작자와 연구자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더없는 파트너이기도 하다. 함정임씨는 현재 잔혹연극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시인, 배우였던 앙토냉 아르토의 삶을 다룬 장편 ‘내 남자의 책’을 준비 중이다. 그에게 앙토냉 아르토를 소개한 이는 박형섭 교수였다.
“앙토냉 아르토의 삶을 따라가며 인간의 광기를 파헤치는 내용의 장편을 계간지에 연재 중이에요. 앙토냉 아르토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가 정신질환을 겪고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잘 몰랐어요. 아르토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사람이 남편이에요. 남편을 통해 알게 돼 저도 이젠 푹 빠지게 됐죠. 바로 옆에서 같이 연구하고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좋은 파트너예요.”
한동안 소설 외의 다른 것들에 치여 살았던 탓에 “소설에게 미안했다”고 말하는 함정임씨는 올해 여름 아르토의 행적을 훑기 위해 박형섭 교수와 함께 멕시코 여행을 계획 중이다. 여행을 많이 다니기로 유명한 그이지만 멕시코 여행은 처음이라고 한다. 새로운 삶을 열어가고 있는 그가 새로운 공간에 다녀와 들려주게 될 다음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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