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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착한 엄마로 시청자들의 눈물샘 자극한 고두심

“이혼하지 않고 참아서 끝까지 갈 수만 있다면 그것도 아름다운 삶인 것 같아요”

■ 글·김지영 기자 ■ 사진·정경진

2004. 05. 04

가슴 아프고도 훈훈한 가족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낸 KBS 수목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는 연기자 고두심을 또다시 주목하게 만들었다. 가족을 위해 희생을 자처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섬세한 연기로 보여준 그는 ‘과연 고두심’이라는 감탄사를 자아내게 했다. “힘들고 고통스런 역할이었지만 촬영하는 동안 정말 행복했다”는 그를 만났다.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착한 엄마로  시청자들의 눈물샘 자극한 고두심

최근 인기리에 막을 내린 KBS 수목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단연 돋보인 연기자는 어머니 영자 역의 고두심(53)이다. 극중에서 그는 딴 살림을 차린 남편과 이혼한 큰딸, 유부남을 사랑하는 둘째딸, 죽은 형의 복수를 꿈꾸는 막내아들로 이뤄진, 하루도 바람잘 날 없는 가정을 위해 희생을 자처하는 어머니이자 남편의 여자를 위해 자신의 신장까지 떼어주는 미련하리만큼 착한 아내로 등장해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
“그동안 어머니 역할을 많이 했지만 극중의 엄마처럼 저를 많이 울리고 웃게 한 배역은 없었던 것 같아요. 초반에는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이 모두 노력한 덕분에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설령 끝까지 시청률이 좋지 않았다고 해도 이처럼 좋은 드라마에 출연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을 거예요.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고 힘든 역할이었지만 촬영하는 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극중 상황이 실제였다면 미련없이 남편 놓아줬을 것
곱슬곱슬한 웨이브 머리에 화장기없는 얼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슬픈 눈동자. 연갈색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의 모습은 누군가를 많이 닮은 듯했다. 바로 지난 석달 동안 그와 함께 해온 극중의 어머니 영자인 것. 그는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다며 “드라마가 끝나도 당분간 영자에게서 벗어나기가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도 ‘꽃보다 아름다워’ 식구들만 보면 극중의 엄마 말투가 나와요. 정말 이러다 영자처럼 치매에 걸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요즘 기억이 가물가물한 게 건망증이 심해졌거든요(웃음).”
그는 극중에서 치매에 걸린 영자가 그 사실을 모르는 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찍을 때 ‘이것이 실제상황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고 한다.
“극중 엄마의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하겠어요. 남편과 같이 못 사는 것도 서러운데 남편의 둘째 여자한테 신장을 떼어주어야 하는 그 심정이 오죽하겠어요. 지금 세대는 그렇게 살라고 해도 못 살겠지만 예전에는 그런 어머니들이 있었어요. 심지어는 둘째 여자와 한 집에서 사는 어머니도 봤어요. 이혼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하는 거고, 이혼이 더 발전적인 선택일 수도 있지만 참을 수 있어서 끝까지 갈 수만 있다면 그것 또한 굉장히 아름다운 삶인 것 같아요. 다만 가슴이 숯검정처럼 새까맣게 타도록 참고 사느냐, 마느냐의 선택은 순전히 어머니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해요. 자식을 위해 참으라고 강요해서도 안되고, 강요할 수도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착한 엄마로  시청자들의 눈물샘 자극한 고두심

‘꽃보다 아름다워’ 식구들만 보면 극중의 엄마 말투가 나올 정도로 맡은 배역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고두심.


그는 ‘꽃보다 아름다워’가 실제 상황이라면, 자식과 아내를 버리고 새둥지를 튼 주현을 놓아주었을 것이라고 한다. 행동은 구세대처럼 옛것을 고집하지만, 사고는 신세대처럼 개방적이라 한번 떠난 사랑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는다는 것.
그가 노희경 작가의 작품에 출연하기는 ‘내가 사는 이유’에 이어 두 번째. ‘내가 사는 이유’에서는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도저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강인한 엄마 역을 맡았던 그는 노희경 작가에 대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가족 이야기를 가장 진실하고 섬세하게 담아내는 작가”라고 호평했다. 노 작가가 작품마다 주옥 같은 명대사로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건 그의 언어들이 진실하기 때문이라는 것.
“요즘에는 드라마들이 죄다 불륜이나 삼각관계, 이혼, 재벌2세 등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식상한 느낌이 있어요. 그런 면에서 노희경 작가의 작품은 신선하죠. 여느 드라마처럼 충격요법으로 시청자들을 자극하거나 신데렐라를 꿈꾸게 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죠. 그래서 노희경 작가의 작품은 시청자에게든, 연기자에게든 항상 잔잔한 감동과 긴 여운을 남기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이번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가족간에 대화와 사랑이 가정의 행복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꼈어요.”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착한 엄마로  시청자들의 눈물샘 자극한 고두심

슬하에 1남1녀를 둔 엄마로서 늘 곁에서 챙겨주지 못했는데도 밝고 반듯하게 자라준 아이들이 대견하다고.


슬하에 1남1녀를 둔 그는 그동안 자식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극중의 어머니처럼 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연기를 위해 아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일벌레 엄마’였다는 것. 때문에 그는 연기생활을 하면서도 아이들을 곁에서 뒷바라지 해주지 못하는 데 대한 미안함을 털어낼 수 없었다고.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춘기 시절 딸(25)은 그를 원망하는 말로 비수를 꽂기도 했지만 다행히 비뚤어지지 않고 반듯하게 자라주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간 후 학창시절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을 정도로 똑똑하고, 연예인으로 나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예쁜 외모를 지닌 그의 딸은 지난해 워싱턴대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자리를 잡았다. 딸이 유학을 가고, 그가 방송활동으로 바쁠 때도 말썽없이 건강하고 밝게 자라준 아들(19)도 지난 2002년 역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당시 아들은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고 싶어했지만, “지금은 공부할 때이고, 연기자가 되더라도 지성과 실력을 겸비할 수 있도록 그 분야의 석사, 박사과정을 마쳤으면 좋겠다”는 그의 뜻에 순순히 따라주었다고 한다.
“작은아이는 순한데 큰아이는 욕심도 많고 당차요. 작은아이와 여섯살 터울인데, 혼자서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동생이 태어나면서 사랑을 빼앗기니까 굉장히 분해하더라고요. 또 제가 학교가는 것을 챙겨주지 못하니까 저한테 불만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한테 더 심통맞게 말하곤 했는데, 그때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지 못한 게 아쉬워요. 늘 곁에서 챙겨주지 못했는데도 잘 자라준 아이들을 떠올리면 대견하고 흐뭇하기도 하고요.”
‘꽃보다 아름다워’를 촬영하는 동안 몸무게는 그대로인데 얼굴살이 많이 빠졌다는 그는 이제 촬영을 오래 하고 나면 눈이 침침하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흰머리가 느는 등 예전같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서 나이를 발견할 때 서글퍼진다고 한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이제는 며칠씩 연달아 촬영이 있을 때 가장 힘들어요. 그 때문에 좋아하는 등산도 일주일에 두 번밖에 못 갔어요. 원래는 매일 아침 2시간 정도 집 가까이에 있는 산에 오르고 촬영 없을 때는 대여섯 시간씩 등산을 했어요. 그럼 든든해요. 제가 버티는 힘이 바로 거기서 나오거든요. 등산을 하지 않으면 오래 서 있기 힘들고 다리도 후들거려요. 그런데 이제는 관절이 나빠져서 등산 보다는 평지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주도의 시골마을에서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산을 좋아하고, 학교까지 걸어서 등하교를 했을 정도로 걷는 것을 좋아했다. 지난 2002년 연기생활 30주년을 맞아 고향인 제주도에서 ‘도보’ 순례를 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깊어진다는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초라한 모습으로 늙기 전에 연예계를 은퇴해 제주도의 오두막집에서 가족들과 못다한 정을 나누며 도란도란 정겹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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