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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혜스님 법명 받고 첫 동안거에 들어간 산골소녀영자

■ 기획·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글·김순희 ■ 사진·조선일보 제공

2003. 01. 09

산골소녀 영자가 속세를 떠나 산사로 들어간 지 1년6개월이 지났다.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세상을 등진 ‘산골소녀’ 영자가 도혜스님이 되었다. 불자의 길을 걷고 있는 그의 수행과정과 ‘도혜스님’으로 살아가는 이야기.

도혜스님 법명 받고 첫 동안거에 들어간 산골소녀영자

강원도의 한 절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직후의 영자.


‘산골소녀 영자’. 그는 세인들이 기억하는 ‘영자’라는 이름을 버렸다. ‘도혜스님’이 그가 새로 얻은 이름이다. 산골소녀 영자(20)가 머리를 깎고 산사로 들어가 비구니가 된 지 1년6개월이 지났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산에서 내려와 못다 한 공부를 하겠노라고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디딘 지 몇달 만에 영자는 아버지를 잃었다. 금품을 노린 강도에게 아버지가 살해되자 속세를 등지고 강원도 삼척의 한 암자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도혜’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동안 영자는 삼척에서 7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이는 낮은 산등성이 아래 위치한 산사에서 속세의 고뇌와 번뇌를 씻어왔다. 그러다 최근 경기도 용인시 화운사 암자에서 동안거에 들어갔다. 동안거는 음력 시월보름부터 이듬해 정월 보름까지 선방에서 두문불출한 채 화두를 잡고 마음공부에 매진하는 불가의 전통수행법이다.
영자가 사미승이 된 것은 아버지를 잃은 지 1년2개월이 흐른 지난해 4월11일. 경북 김천 직지사에서 행자교육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았다. 부처님께 귀의할 것을 맹세하는 연비식도 치렀다.
영자는 아버지를 잃은 후 사람 만나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오랫동안 아버지와 단둘이 살아온 탓도 있지만 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사람들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영자는 절에 찾아오는 신도들이 자신을 아는 체하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영자는 주지스님 외에는 마음을 열어놓지 않았다. 그가 승복을 입은 모습은 종종 삼척시내에서 목격되곤 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다. 그옆에는 언제나 은사인 혜설스님이 함께했다.
산골소녀 영자가 머물고 있는 절의 신도 김할머니(85)는 영자의 산사생활을 줄곧 곁에서 지켜봤다. 김할머니는 지난 1년여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이뤄진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젊은 스님(김할머니는 영자를 젊은 스님이라 불렀다)은 도 닦으면서 잘 살고 있어요”라며 “부지런히 불경도 외우고 경내에 있는 채마밭과 꽃밭도 가꾸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주곤 했다. 김할머니는 영자가 KBS <인간극장>을 통해 산속 생활의 서정과 순수를 전해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CF출연까지 해 일약 스타가 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김할머니는 “젊은 스님이 처음에는 사람들을 만날 때 낯을 가려 좀 힘들어하기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 방앗간에 혼자 심부름도 다닐 만큼 많이 활달해졌다”면서 “가끔 주지스님과 함께 수행하러 가느라 얼마간 절을 비우기도 했다”고 영자의 근황을 전했다.
영자가 머물고 있는 암자에는 종종 기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곤 했는데, 영자는 기자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에 대해 마땅찮게 여겼다고 한다. 혜설스님에게 “사람들이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내가 절에 들어온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방송국에서 뉴스시간에 알려주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가요?”라며 푸념을 하기도 했다고.
영자가 사람들을 피하고 싫어하자 혜설스님은 2001년 11월 여승들만의 도량인 수원 화운사로 아무도 모르게 데리고 갔다. 영자는 사찰에서 각종 허드렛일을 도우며 ‘예비스님’의 길인 행자생활에 매달려 번뇌로 가득한 마음을 다스렸다.
영자는 지난해 3월이 돼서야 노스님들에게 불제자로 평생 살아갈 자격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김천 직지사 ‘22기 행자교육원’에 들어갔다. 3주간의 교육은 몸이 쇠약해진 영자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교무스님들이 “몸이 허약해 교육을 받기 어려우니 데리고 가라”는 결정을 내렸지만 그의 은사인 혜설스님을 비롯한 원로스님들이 적극 나서 퇴교를 막아 영자는 교육을 마치고 지난 해 4월에 사미승이 됐다.

도혜스님 법명 받고 첫 동안거에 들어간 산골소녀영자

영자가 산속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살 때의 행복했던 시절.

지난 12월9일. 영자 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진 강원도 삼척의 안정사에는 적막감이 맴돌았다. 죽어서도 딸을 애타게 보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모를 바 없지만, 영자는 아버지의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영자 부녀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영자의 둘째 큰아버지 내외만이 안정사를 찾아 영자 아버지의 넋을 위로했다. 영자는 속세를 떠난 후 친척들과도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
영자의 둘째 큰어머니 오화복씨(57)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영자한테 아직까지 전화 한통이 없었다”며 섭섭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참 무심허기도 허고 매정허기도 하요. 절에 들어가고 나서는 아직까지 연락 한번 없다니까요. 삼척시내 시장에서 승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봤다는 마을 사람들도 있습디다. 연락 한번 없으니 참 섭섭하죠. 그래도 큰엄마랍시고 엄마 없이 자란 영자를 살갑게 대하곤 했는데…. 무심허지. 무심한 것. 그래도 즈이 아버지 제사 때는 올 줄 알았어요. 언젠가는 찾아오겠지요. 아버지도 찾아볼 거고요. 시간이 지나니까 (영자에게) 섭섭했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좀더 잘 해줄 걸’하는 마음이 큽디다. 즈이 큰아버지도 술만 마시면 죽은 동생 생각이 나고 영자 생각이 나서 눈물짓곤 합니다.”
영자가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산속의 집은 전화만 해지됐을 뿐 살림살이들은 아버지가 살해당할 당시 그대로 남아 있다. 영자 모녀가 광고에 출연한 후 한때 관광객이 몰려들기도 했지만 ‘그 사건’ 이후 등산객들조차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가끔 남편(영자의 큰아버지)이 올라가서 집을 살펴보고 와요. 지난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산사태가 나지 않았을까 싶어 올라가 봤더니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흙덩어리가 다행히 집을 피해서 흘러내렸다고 합디다. 영자가 절에 들어간 뒤에 그 집에 설치되어 있던 전화만 해지했어요. 그 집이 영자 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어서 일년에 한번씩 1만5천원 정도 토지세가 나와요. 즈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거 영자 앞으로 명의이전을 하든지 해야 할 텐데 절에 들어가 있으니 그것도 쉽지 않고….”
영자 큰어머니는 영자가 어느 절에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그나마 절에서 잘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이라고 말한 그는 조만간 시간을 내서 영자를 찾아가 만나보겠노라고 했다.
동안거에 들어가 있는 영자가 머물고 있는 화운사의 관계자는 “어린 마음에 상처받고 살아온 도혜스님이 잘 지내고 있으니까 더는 관심을 갖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큰스님이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아픈 상처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도록 수양을 쌓은 큰스님이 되면 그때 가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영자는 동안거가 끝나면 다시 삼척의 암자로 돌아간다. 현재 삼척의 암자를 지키고 있는 스님은 “도혜가 이 절에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지켜봤다”면서 “도혜가 호기심도 많고 가끔 TV 보는 것을 즐겨 혜설스님이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일부러 TV를 못 보게 한 적도 있었다”고 전했다.
“속세에 있는 사람들은 도혜의 이렇게 작은 일까지 다 궁금한 모양입니다. 그냥 놔두세요. 도혜가 대인기피증에 걸려 있다고 하는데 그런 거 없어진 지 오래됐어요. 밝고 명랑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물론 수행도 잘하고 있고요. ‘도혜가 대인기피증에 시달린다’는 말은 아직까지 도혜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 혜설스님이 의식적으로 도혜를 세상 사람들로부터 감추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나도는 것 같습니다.”
음력 정월이 지나면 산골소녀 영자 ‘도혜스님’은 강원도 삼척의 어느 한적한 암자로 아버지와 단둘이 살면서 근심걱정 없던 그 천진난만한 미소를 간직한 채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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