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그가 이번엔 원톱 주연 영화로 돌아왔다. 3월 4일 개봉한 ‘매드 댄스 오피스’는 24시간 빈틈없는 삶을 살아온 구청 과장 국희가 승진 누락과 딸과의 갈등을 겪으며 삶의 균열을 맞고, 플라멩코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을 그린 휴먼 드라마다. 냉철한 완벽주의로 조직을 장악해온 국희는 악성 민원인을 달래러 갔다가 들른 플라멩코 연습실에서 뜻밖의 해방감을 마주한다. 자신을 롤 모델로 따르던 구청 막내 직원 연경(최성은)과 함께 춤을 배우며 딱딱했던 국희의 삶도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염혜란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중년 여성이 삶의 변화를 겪는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시나리오는 흔치 않다. 평범한 인물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변해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일하는 여성의 고민에 깊이 공감”

이모, 아내, 아줌마, 엄마 같은, 어쩌면 시청자들이 무심히 넘길 수도 있는 평범한 캐릭터에 자신만의 킥을 더해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내는 염혜란. 일과 일상에서의 내공이 묻어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매드 댄스 오피스’로 첫 주연을 맡게 된 엄혜란은 ‘동백꽃 필 무렵, ‘더 글로리’ 등 다양한 작품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아봤다.
새삼 고생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영화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어렵게 관객을 만나게 된 만큼 많은 사랑을 받고 오래 기억되는 작품이 됐으면 합니다.
시나리오에서 플라멩코라는 소재를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어우, 플라멩코라니 쉽지 않겠는데?’ 싶었죠(웃음). 그런데 저는 춤 영화를 좋아해요. 춤을 통해 억눌렸던 감정이 터져 나오고 성장하거나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많잖아요.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 왜 하필 플라멩코인지 여쭤봤더니, 오랫동안 직접 춰오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작품이 말하려는 이야기와 감독님의 에너지가 닮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고민을 풀어낸다는 점도 끌렸고요.
촬영을 위해 3개월간 플라멩코를 배웠다고요.
힘들었습니다. 단기간에 배울 수 있는 춤이 아니더라고요(웃음). 춤을 배우는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플라멩코를 배우는 분들을 만났는데, “이 춤이 일상을 버티게 하는 힘이다. 춤을 통해 해방감을 느낀다”고 하시더라고요. 연습할 땐 고통 그 자체여서 해방감을 느끼는 경지까진 가지 못했지만, 공연을 보면서 스텝 소리를 듣는데 가슴속에서 뭔가가 요동치는 게 느껴졌어요. 왜 플라멩코를 ‘영혼의 춤’이라 하는지 알겠더군요.
국희는 전형적인 완벽주의 공무원인데, 본인과 닮은 점이 있나요.
저는 국희처럼 남에게 지시하는 걸 잘 못 하는 사람이라 처음엔 낯설었어요. 그런데 연기할수록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고민에 깊이 공감하게 되더라고요. 저 역시 현장에서 완전 신입은 아니잖아요. 위로는 꽉 막힌 상사를 대하고, 아래로는 사고방식이 전혀 다른 후배들 사이에 끼어 있는 ‘중간 세대’의 답답함과 한계가 제 이야기처럼 와닿았어요. 저는 그동안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라고 믿고 살아왔어요. 그래서 늘 기준을 높게 세워두고,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어요.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느꼈거든요. 제가 제 기준으로 보며 아쉬워하거나 조언한다고 했던 말들이, 누군가에겐 부담이나 강요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딸에게 내 기준 강요한 건 아닌지 돌아보게 돼 ”
극 중 딸과의 갈등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 딸과의 관계는 어떤가요.그동안 작품에서 유난히 좋은 엄마 역할을 많이 맡았어요. 특히 ‘폭싹 속았수다’의 광례 같은 엄마를 연기하다 보니 그런 이미지로 봐주실 땐 부담이 되기도 해요. 사실 저는 그렇게 이상적인 엄마는 아니거든요. 광례를 보고 한참 울다가, 3시간 뒤에 엄마와 또 싸웠다는 댓글을 본 적이 있어요. 그게 현실인 것 같아요. 엄마가 고맙고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일상에서는 계속 부딪히잖아요. 저 역시 ‘먼저 겪어본 사람’이라는 이유로 딸에게 조언을 하는데, 아이로선 그냥 잔소리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도 그 나이에서는 이미 완성된 존재인데, 저는 자꾸 미완성처럼 바라본 건 아닐까 싶더라고요. 건강한 관계는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요.
이번 영화로 소위 ‘꼰대력’이 좀 줄어들었을까요.
사람이 한 번에 바뀌진 않겠죠(웃음). 하지만 ‘아차, 방금 내 말이 비난처럼 들렸겠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이 생긴다면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작심삼일도 100번이면 근 1년이 되잖아요. 관객들도 영화를 보고 그런 ‘아차’ 하는 순간을 하나씩 가져가셨으면 좋겠어요.
글로벌 OTT에서 맹활약 중인데, 해외에서의 인기도 실감하나요.
얼마 전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참석했는데, 레드카펫에서 팬들과 인사하고 사인해드리며 걷는 데 1시간이 걸렸어요. 제 이름을 불러주시고, ‘폭싹 속았수다’ 장면을 프린트해 오셔서 사인을 요청하시는 모습을 보고 정말 놀랐어요. 아직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까지 챙겨서 보고 오신 걸 보며 ‘이게 무슨 일이지?’ 싶더라고요.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유럽은 아직 한국 작품이나 배우들을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아무도 못 알아보겠지’ 하고 있었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손을 흔들어주시고 사진을 요청하는 분들이 계셨어요. “‘더 글로리’에서 인상 깊었다”고 말해주는 분도 있었고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분이 우리 작품을 보고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그만큼 부담도 클 것 같아요.
배우가 평생 활동하면서 자기 이름 앞에 붙는 타이틀을 얻는다는 건 정말 큰 기회라고 생각해요. ‘폭싹 속았수다’의 광례나 ‘더 글로리’의 현남처럼, 좋은 작품 속 캐릭터로 오래 기억된다는 건 하늘이 도운 일이죠. 그만큼의 무게는 당연히 감당해야 하고요. 어떤 분들은 ‘이번에도 광례 같은 모습이겠지’ 하고 기대하셨다가 다르게 보이면 실망하실 수도 있고, “이번엔 좀 약하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을 거예요. 그 기대와 부담 자체도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그 무게를 피하기보다, 담담하고 의연하게 받아낼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누군가는 “배우는 외형이 중요하다”고 얘기하고, 누군가는 “눈빛이 중요하다. 오라가 중요하다” 얘기하기도 합니다.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얼마 전 영국 드라마 ‘킬링 이브’를 보면서 산드라 오 배우의 연기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고전적인 미인의 이미지는 아니지만 화면을 장악하는 힘과 깊이가 있더라고요. ‘어떻게 저렇게 연기를 잘할까’ 싶으면서, ‘저렇게 힘 있고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더 많은 주인공을 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야 관객도 더 다양한 얼굴과 이야기를 만날 수 있고, 저 역시 그런 흐름 안에서 다채로운 시나리오를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단순히 ‘연기를 잘해서’라기보다는, 그 배우를 응원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염혜란은 ‘매드 댄스 오피스’에서 춤을 통해 자신만의 리듬을 찾고, 딸과 후배 등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는 법을 깨달아가는 공무원 국희를 연기한다.
“평범함이 주는 낮은 문턱이 장점”
염혜란 배우를 롤 모델로 꼽는 후배들이 많은데요.그 말이 정말 부담스러워요(웃음). 저도 어릴 때는 ‘나 같은 사람은 유명해질 수 없고, 나 같은 사람은 힘을 가질 수 없을 거야’라는 생각 때문에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이 일을 계속하다 보니 기회가 생기고, 중심에 서는 역할도 맡게 됐어요. 후배들이 저를 롤 모델로 언급하는 건 ‘나도 평범하지만 저런 역할을 해볼 수 있겠다. 좀 더 기회들이 생기고 있구나’ 하는, 자신을 향한 응원처럼 느껴집니다. 저도 너무나 아름다운 분들을 보면 ‘그냥 넘사벽이다. 저렇게는 못 되겠다’ 싶을 때가 있어요. 관객분들이 보실 때 왠지 ‘염혜란처럼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닐까, 그 평범함이 주는 낮은 문턱이 제 장점이라면 장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배우로서 스스로에게 확신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연극으로 시작했는데, 무대에서는 비교적 꾸준히 역할을 맡았어요. 그래서 ‘일이 없어서 힘들다’는 좌절은 덜했던 편이에요. 다만 더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다는 갈증은 늘 있었죠. 드라마와 영화로 넘어오면서 그 갈증이 해소됐어요. 제가 한 연기를 훨씬 많은 분이 봐주시고, 그 피드백이 이렇게 큰 힘이 된다는 걸 처음 알았죠. 그걸 처음 실감한 작품이 ‘도깨비’였어요. 갑자기 미용실에서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생기는 걸 보며 대중 매체의 힘을 체감했죠. 그때 배우로서의 확신이 조금 더 생겼던 것 같아요.
국희처럼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위기의 순간을 겪었을 텐데, 그때마다 어떻게 극복해왔나요.
돌이켜보면 지혜롭게 넘기지 못한 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 위기들이 왔을 때 주변에서 조언을 많이 해주는데, 그땐 남의 말이 들리지 않아요. ‘이게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야’라고 고집하게 되죠.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돼요. 그때 해주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 말을 했는지요.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결국 타인의 말에 조금씩 귀를 여는 과정인 것 같아요. 저도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게 아니라, 주변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며 지혜롭게 나이 들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국희가 플라멩코에서 자신만의 해방구를 찾은 것처럼 염혜란 배우도 자신만의 해방구가 있나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그게 꼭 필요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가족이나 타인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그런 개인의 행복이 결국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저는 정작 그걸 못 가진 사람이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제게는 단순하고 정직한 즐거움이 없었어요. 늘 일과 연결된 무언가를 배우고, 준비하고, 발전시켜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저만의 플라멩코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차기작도 기대가 되는데, 작품 선택의 기준은 뭔가요.
배우는 시기를 타는 것 같아요. 이전과는 다른 캐릭터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안타깝게 보내는 작품도 있어요. 캐릭터는 조금씩 다르지만, 그걸 제가 다르게 표현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연기력의 한계가 보일 거 같으니까요. 그럼에도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의미 있는 시도를 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염혜란 #매드댄스오피스 #여성동아
사진제공 디스테이션 엔케이컨텐츠 넷플릭스 사진출처 동백꽃필무렵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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