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빠르고 자극적인 트렌드가 넘쳐나는 지금, 패션계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시 대신 조용한 감정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흐름이 포엣 코어를 불러냈다. 포엣 코어는 시인의 서정성을 담은 스타일로 유행과 거리가 먼 베이식한 디자인과 차분한 색감, 느슨한 실루엣을 핵심 키워드로 삼는다. 캘빈클라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레이 톤으로 통일한 슈트 차림에 얇은 금속 테 안경을 더해 금방이라도 노트에 시를 써 내려갈 것 같은 분위기를 완성했다. 토리버치는 옷장에 하나쯤 있을 법한 브라운 톤 재킷과 플리츠스커트를 자연스럽게 조합해 지적인 무드를 연출했다. 코치 역시 빈티지 글렌 체크 재킷에 해진 듯한 와이드 데님 팬츠와 뿔테 안경을 매치해 투박한 너드 감성을 드러냈고, 스칼스튜디오는 소매를 걷은 셔츠 위에 리넨 소재의 베스트와 팬츠를 더해 보다 일상에 가까운 편안한 분위기를 강조했다.

2026 팬톤이 선택한 올해의 컬러는 바로 천상계의 순수함을 닮은 클라우드 댄서(Cloud Dancer)다. 단순한 백색이 아닌 구름에 빛이 스민 듯 은은한 미색이 감도는 화이트 톤을 뜻한다. 이 오묘한 컬러가 이번 시즌에는 가볍고 유연한 소재와 만나 더 없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우아한 깃털 장식의 튜브톱 드레스로 마치 천상의 존재를 연상시키는 고전적 우아함을 보여준 지방시가 대표적인 예다. 짐머만은 소매를 풍성하게 부풀린 순백의 셔링 드레스에 골드 톤 주얼리를 더해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부드러운 크림 톤 차림에 헤드 스카프로 순결한 이미지를 강조한 샌디리앙과 페티코 역시 눈에 띄었다. 소란스럽기만 한 시대에 클라우드 댄서가 주목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내면의 고요를 담아내기에 하얀 캔버스만큼 적합한 컬러도 없을 테니까.

레이스와 리본, 플로럴 패턴, 풍성한 헴라인까지. 발레코어와 걸코어가 만들어낸 로맨틱한 흐름은 18세기 프랑스를 풍미했던 로코코 양식과 결합하며 2026년식 네오로코코 코어로 확장됐다. 이는 미니멀리즘에 대한 피로가 누적된 패션계가 다시 한번 맥시멀리즘을 향해 방향을 튼 결과다. 특히 거대하게 부풀린 헴라인이 공통적인 특징으로 나타났다. 캐롤리나헤레라는 바닥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스커트 라인의 튜브톱 드레스로 트렌드의 선두에 섰다. 로코코 특유의 화려한 문양과 구조적인 실루엣이 맞물리며 그 시절 사치와 향락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지암바티스타발리는 마치 로코코 시대의 건축물을 보는 듯한 드레스로 볼륨감을 극대화했다. 반면 에르뎀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실루엣에서 영감을 받은 플로럴 드레스에 롱 트렌치코트를 매치해 차분하게 분위기를 이끌었고, 시몬로샤는 페티코트 형태의 시스루 스커트를 브라톱과 매치해 한층 가볍고 발랄한 무드다.

오래도록 패션은 반듯함을 미덕으로 삼아왔다. 하지만 올 시즌에는 오피스 웨어의 규범을 의도적으로 비트는, 이른바 디텐션 코어가 하나의 미학으로 부상했다. 잘 차려입은 정장 차림에 한쪽 칼라를 일부러 삐져나오게 하거나 소매를 둘둘 걷고 어깨 같은 특정 부위를 과장하는 식. 어딘지 불완전해 보이는 옷차림을 만드는 것이 이 코어의 핵심이다. 셀린은 정교하게 재단된 블랙 슈트에 셔츠 칼라와 커프스를 한쪽만 드러나도록 연출해 불완전함의 미학을 드러냈다. 알렉산더맥퀸은 재킷의 라펠을 구겨 접은 듯한 디자인으로 테일러링의 정통성에 균열을 냈고, 몬스는 소매를 과도하게 접어 올린 쇼츠 슈트 룩으로 ‘잘못 입어서 더 멋진 옷’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이세이미야케 역시 삐져나온 셔츠 칼라와 과장된 어깨, 팬츠 버클을 풀어헤친 담대한 연출로 클래식 룩을 의도적으로 뒤틀었다. 어쩌면 디텐션 코어는 완벽함을 요하는 시대에 스타일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남겨둔 작은 오류일지도 모른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 ‘브링 잇 온’ 등 미국 하이틴 영화 속 치어리더들이 손에 쥐고 흔들던 폼폼 장식이 2026년 런웨이에 등장했다. 모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백 가닥의 선이 굴곡을 이루며 런웨이를 보다 역동적인 장면으로 바꿔놓았다. 뉴욕의 파티 걸 문화를 전면에 내세운 에어리아는 오프닝부터 피날레까지 폼폼 장식을 쏟아내다시피 하며 컬렉션 분위기를 활기차게 끌어올렸다. 피날레에서 선보인 메탈릭한 태슬 드레스는 살아 있는 거대한 응원 도구로 보일 만큼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루아르는 보디슈트에 메탈릭한 오버사이즈 폼폼 아우터를 걸치며 리듬감을 살렸다. 샤넬 역시 피날레 무대에 장인이 돋보이는 거대한 폼폼 장식 풀 스커트를 올리며 런웨이를 환호의 장으로 만들었고, 이에 질세라 알라이아는 춤추는 듯한 술 장식 스커트로 단정한 실루엣에 생동감을 가득 불어넣었다. 이번 시즌 치어 코드는 패션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예술의 영역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앞치마는 오랫동안 여성의 노동과 삶을 상징해온 아이템이다. 가정과 일터를 오가며 묵묵히 수행해온 노동의 세월이 이 얇은 천 한 장에 응축돼 있는 셈.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은 그간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저평가돼온 앞치마를 하이패션의 전면으로 끌어올렸다. 예상치 못한 소재와 장식을 적용한 앞치마는 여성의 강인함과 활동성, 책임감 있는 태도를 드러낸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건 미우미우다. 컬렉션 전반에 가죽과 캔버스, 레이스 소재 앞치마를 등장시키며 가정에서 공장으로 이어지는 여성 노동의 궤적을 재해석했다. 레이브리뷰는 셔링이 들어간 레이스 앞치마에 투박한 카고 팬츠와 스니커즈를 매치해 장식과 노동의 간극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안드레아스크론탈러는 앞치마 원피스와 카디건 차림에 눈 주변을 짙게 칠한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책임을 짊어지는 여성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안나수이 역시 원피스에 팬츠를 레이어드해 활동성을 가미하고, 에이프런 톱을 두르는 것으로 마무리해 앞치마를 룩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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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강현숙 기자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레이브리뷰 샌디리앙 스칼스튜디오 안드레아스크론탈러 알라이아 알렉산더맥퀸 에어리아 지방시 캘빈클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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