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사 보증서는 건설사들
지난 2023년 12월 28일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기업개선작업을 뜻하는 워크아웃(workout)은, 기업이 도산이나 부도 위기에 처했을 때 채권자와 채무자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기업을 살릴지 말지 결정하는 마지막 보루에 해당한다. 태영건설이 이를 신청했다는 것은 ‘돈 갚을 능력이 되지 않으니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과 다름없다. 만일 채권단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법정관리 과정을 밟게 된다.태영건설은 올해 1월 11일 채권단협의회로부터 75%의 동의를 얻어 워크아웃을 개시했다.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 SBS를 소유한 태영그룹의 모태 기업이자, 국토교통부 시공능력평가에서 16위를 차지한 대형 건설사가 하루아침에 부도 위기를 맞게 되자 시장은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속사정을 알고 보면 ‘예견된 참사’였다는 반응이다. 태영건설의 자기자본 대비 PF(프로젝트파이낸싱) 비율이 타 건설사에 비해 높은 편인 데다, 춘천 레고랜드 사태로 인해 채권시장이 전반적으로 경직돼 있었던 만큼 대출 만기 연장이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사실 이번 워크아웃은 태영건설이 서울 성동구 성수동 오피스 개발 사업과 관련된 480억 원 규모의 PF 채무를 막지 못한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러한 사정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하려면 부동산 PF에 대해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PF’란 대규모 자금의 프로젝트를 이행하기 위한 자금 조달을 뜻한다. 부동산 영역에서 특정 건설을 위해 돈을 빌리는 PF가 흔히 일어난다. 태영건설도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부동산 개발에 참여하다 보니 부동산 PF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채무 규모만도 9조 원 이상, 채권자는 400곳 이상이다.
태영건설이 여기저기서 자금을 융통한 것은 맞지만, 엄밀히 말해 태영건설이 직접 빌렸다고 보긴 어렵다. 시행사의 보증을 선 대가로 채무를 지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태영건설만의 독특한 상황이 아니다. 국내 대부분의 건설사는 시행사 보증을 서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사정은 복잡하다. 많은 사람이 부동산 사업의 주체를 건설사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부지를 매입하고, 어떤 시설을 누가 어떻게 지을지 결정하고, 부동산을 어떻게 팔지 고민하는 것은 전적으로 시행사의 몫이다. 문제는 이렇게 ‘뼈대’를 담당하는 시행사가 생각보다 영세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약간의 비용으로 개발에 필요한 토지 일부를 매입한 뒤 엄청난 청사진을 제시하며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토지 매입비며 개발비를 충당한다. 물론 돈을 빌려주는 쪽도 허술하진 않다. 시행사의 낮은 자본력을 우려해 든든한 보증인을 요구한다. 그게 바로 태영건설과 같은 시공사다.
공사가 성공적으로 끝나 분양자들이 대금을 지불하면 PF 대출금을 상환하고 사업을 마무리하는 게 수순이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지난해 예상치 못한 역대급 부동산 폭락으로 부동산 PF 위기가 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높아지는 금리만큼 대출 이자가 상승하자 집은 팔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분양가를 높일 순 없는 노릇. 따라서 애초 예상했던 사업성 역시 담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예상과 빗나가는 상황이 벌어지면 보증을 섰던 시공사 역시 사면초가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태영건설이 보증을 선 곳은 숱하게 많았고 만기가 도래했으나 당장 갚을 능력이 되지 않자 워크아웃까지 신청하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충재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원장은 “건설 시장은 다른 시장과 달리 초기 자본이 많이 들어가고 사업 기간이 길다”며 “타인 자본을 많이 쓰기 때문에 분양을 통해 자본을 빨리 회수해야 하는데, 시장이 좋을 때는 큰돈을 벌지만 안 좋을 때는 다 망한다”고 말했다.
시공사, 임금 체불, 금융회사··· 연쇄 위기 초래하는 워크아웃
채권단협의회로부터 75% 동의를 얻어 워크아웃을 개시한 태영건설.
수십 곳의 사업을 진행하는 시공사가 휘청이면 연쇄적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대한건설정책연구원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 진단과 하도급업체 보호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태영건설 사태와 관련해 수많은 피해가 발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태영건설 하도급 업체 452개사의 현장 862곳 중 71개사의 104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금 미지급, 대금지급기일 변경, 결제 수단 변경 등의 피해가 잇따랐던 것이다. 또 65억5000만 원 규모의 임금 체불과 제때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한 노동자는 2500여 명에 이르렀다. 만일 시공사가 연쇄적으로 도산할 경우 대출을 감행한 금융회사 또한 위기를 맞으며 더욱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금융위원회에서는 임금 체불, 협력 업체나 수분양자의 피해 등을 최대한 줄이는 데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 상황. 이렇듯 무리한 PF는 국가경제에 큰 위협이 된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부동산 사업은 태영건설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설상가상 부동산 경기 하락으로 최근 2년간 PF가 포함된 부동산·건설 업종의 연체액과 연체율은 각각 3배, 2.4배로 늘었다. 날로 치솟는 공사비에 금리 부담까지 가해지면서 건설사들의 자금 조달은 더욱더 요원해지고 있다. 따라서 제2, 제3의 태영건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상황. 건설업계에서는 유동성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분위기다.
신세계건설은 지난해 11월 한국기업평가와 한국신용평가 등 국내 신용평가사로부터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받아 우려를 자아냈으나, 최근 그룹을 통해 2000억 원 수준의 자금을 마련해 상반기 만기가 도래하는 2000억 원의 PF 보증 상환에 대비했다. 타 건설사 대비 우발채무가 높다는 지적을 받았던 롯데건설 역시 시중은행 및 금융기관 펀드를 조성해 미착공 PF를 장기 전환하기로 했으며, 2022년 말부터 현재까지 1조6000억 원의 PF 채무를 감축해 부담을 덜어냈다.
이경자 삼성증권 연구원은 “건설사들의 선제적인 유동성 확보 노력으로 주요 건설사에서 이벤트 리스크가 나타날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PF 리스크가 해소되려면 건설사들의 사업성 개선을 위한 자구 노력, 시장의 극적 회복이 전제돼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행사 자기자본 기준 올리면 주택 공급 위축될 수도
부동산 PF 부실은 시장의 파장은 물론 국가경제에도 뇌관으로 작용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각계의 고민 또한 깊어지고 있는 실정. 정부는 저금리 대출로 대환 할 수 있는 ‘PF 대출 대환보증’을 신설하거나 비주택 PF 보증을 확대하며 시장을 안정화하고 있다. 동시에 미분양 등으로 건설사가 타격을 받지 않도록, 미분양 주택 매매 시 세금을 줄여주는 정책 등을 속속 내놓고 있다.부동산 PF 구조를 바꾸는 근본적인 대책 마련도 필요하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시행사들이 상당한 자본을 갖춘 상태에서 사업을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상황. 전문가들은 부동산 경기의 등락에 따라 반복적으로 불거지는 PF 문제를 해결하려면 시행사의 자본력과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충재 원장은 “자본력을 갖춘 시행사가 필요하되, 중장기적으로 시행사 자기자본을 늘리도록 해야지 갑자기 기준을 높이면 주택 공급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시행사의 자본력 확대와 동시에 금융기관 역시 PF 대출 승인 시 보다 신중한 검토로 사업 부실 위험을 재차 검증하는 편이 좋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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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출처 태영건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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