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퍼나이프’는 과거 촉망받는 천재 의사였던 ‘세옥’이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스승 ‘덕희’와 재회하며 펼치는 치열한 대립을 그린 메디컬 스릴러다. 박은빈이 맡은 세옥은 열일곱 나이에 의대에 수석 입학할 만큼 수재지만, 덕희에 의해 의사 면허를 박탈당한다. 이후 약사로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밤에는 불법 수술을 일삼는 ‘섀도 닥터’로 이중생활을 이어간다. 그리고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이들을 서슴지 않고 제거하는 살인마이기도 하다. 사람을 살리면서도 죽이는 두 얼굴의 천재. 기존 메디컬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결의 인물이다.
박은빈의 연기는 이번에도 기대 이상이다. 프레임 안에서의 그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다. 선한 인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는 오히려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진 변호사, tvN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에서 천재 가수, KBS 드라마 ‘연모’에서 남장을 한 세자를 연기하며 도전을 이어온 박은빈. 이번에도 그는 반사회적인격장애를 지닌 천재 의사라는 쉽지 않은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완성해냈다.
이번 드라마는 글로벌 OTT 플랫폼에서 공개되며 외신의 반응이 뜨겁다. 미국 유명 드라마 전문 매체 ‘소프센트럴(Soapcentral)’은 “박은빈의 ‘정세옥’은 귀여움과 광기, 영리함을 동시에 선사하며 미세한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흥미롭다”고 평했고, 필리핀 연예 전문 매체 PEP는 “흡인력 있는 스토리, 박은빈의 강렬한 연기와 설경구의 압도적 존재감이 돋보인다”고 호평을 쏟아냈다.
이러한 반응 속에서 박은빈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대본과 노트, 메모 등을 직접 들고 나와 인터뷰에 임했는데, 질문 하나하나에 신중하게 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배우로서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에 도전하는 게 재미라고 생각해요. 같은 것을 반복하는 데 쉽게 염증을 느끼는 성격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제가 가진 기존 이미지를 탈피하려고 선택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안 해봤던 걸 해보자’는 가벼운 마음이었죠. 기획사 대표님은 대본을 보고 저를 떠올렸다고 하셨어요. ‘이런 역할에 나를 떠올리는 제작자들이 있네?’ 하는 마음에 “왜 제게 제안을 했냐?”고 질문했더니, 오히려 제가 연기해야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대요. 그런 시선들이 참 흥미로웠고, 저 역시 대본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해볼 만하다’ ‘어려운 도전은 아니다’라는 생각에 합류하게 됐죠.
세옥은 감정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소모가 큰 캐릭터라 연기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연기를 잘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비축해두는 편이에요. 일상에서 ‘이 이상으로 에너지를 소모해버리면 일을 잘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껴지면 스스로 조율을 하는 편이죠. 이번에도 극단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이 많았고, 또 분명 쉽지 않은 장면에서 저 스스로 위협적인 감정이 들 때면 의식적으로 분리를 잘해야 했어요. 하지만 연기적으로 힘들다고 느낀 적은 거의 없었어요. 오히려 설경구 선배님과 주고받는 호흡에서 새로운 희열을 얻는 느낌이었죠. ‘이 장면에서 도파민이 돌아도 되나?’ ‘이 상황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괜찮은 걸까?’ ‘시청자들은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늘 점검하면서 작품에 임했던 것 같아요.
촬영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시간이 부족했던 점이요. 특히 8회 후반부에 양 경감과 대치한 뒤 선생님(설경구)을 만나는 장면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목 중 하나라고 생각했거든요. 이 장면을 통해 드라마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두 인물 간의 아리송했던 감정선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고 봤어요. 그래서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 촬영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서 아쉬움이 컸어요. 그 장면을 야식 먹고 자정을 넘겨 새벽 5시까지 촬영했던 것 같아요. 해가 뜨는 바람에 더 촬영할 수 없었죠. 솔직히 아쉬움이 남지만, 다시 돌아가도 그 이상 진심으로 할 수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두 연기 장인의 흥미로운 티키타카
드라마의 볼거리 중 하나는 단연 설경구, 박은빈 두 연기 장인의 팽팽한 호흡이다. ‘하이퍼나이프’를 집필한 김선희 작가는 인터뷰에서 “설경구와 박은빈, 두 배우를 한 화면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은빈 역시 “설경구 선배가 궁금했다. 영화에서만 늘 뵙던 분을 실제로 만난 거였다”고 기쁨을 전했다.설경구 배우와는 첫 만남이었다고요. 현장에서는 어땠는지 궁금해요.
실은 대면하는 장면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대기 시간에는 차에 있는 배우가 많은데, 선배는 주로 모니터 뒤에 계셨죠. 함께 찍는 신이 적다 보니 그럴 때 아니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어서 안부를 건네며 끊임없이 스몰 토크를 시도했어요. 배우로서도, 인간적으로도 궁금했거든요. 이를테면 “토마토파스타가 좋으세요? 크림파스타가 좋으세요?” “빵이 좋으세요? 떡이 좋으세요?” 이런 것들요. 물론 “귀찮으면 이야기해주세요. 저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에요”라고 미리 말씀도 드렸죠. 지금은 선배님이 가장 친한 배우가 됐어요. 이 부분은 선배에게 직접 허락받았습니다. 앞으로 누가 친한 배우가 누구냐고 물으면 선배라고 이야기하고 다닐 거예요(웃음).
설경구 배우와 연기 호흡은 어땠나요.
선배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어요. 특히 7~9회 대본이 다소 늦게 나오면서 이 시리즈가 궁극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며 마무리될지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는 순간이 있었어요. 그때 어떤 마음으로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됐는지, 이 작품이 시청자들에게 어떤 감각을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선배님과 중점적으로 이야기를 나눴어요. 애초에 이 드라마는 평범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은 사제 관계를 표방했잖아요. 그래서 ‘역동적인 감정들이 그냥 상식적으로 흐르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죠. 또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너무 어렵게 다가가진 않길 바랐어요. 그 안에 얽히는 감정들이 복합적이라 해석의 여지가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도록 배우로서 잘 전달해보자’는 목표가 서로 같았고, 그 점이 다행이었죠.
설경구 배우와 함께 연기하며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있다면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대본을) 분석하고 고민하지만, 연기할 때는 오히려 직관적으로 부딪히는 방식을 선호해요. 대사도 현장에 가서 외우는 경우가 있고요. 머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현장에서 부딪히며 얻는 몰입에 따른 반응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요. 선배님도 비슷한 스타일이셨어요. 리허설 때보다는 카메라가 돌아갔을 때 전력으로 서로 맞부딪치며 연기하는 성향이라 참 잘 맞았어요. 그래서 선배님과의 연기에서 에너지를 알뜰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수술 장면이 자주 나왔는데, 직접 연기하신 건가요.
네. 화면에서 손만 나온 장면을 제외하고 모두 제가 직접 했어요. 수술 장면이 있는 날은 이대목동병원 신경외과 김영구 교수님이 휴가를 내고 상주해주셨어요. 다행히 신경외과 수술은 세밀한 작업이어서 손의 움직임이 다양하지 않더라고요. 또 의사들마다 수술 스타일이 다르다고 하셔서 ‘이왕 맡은 천재 역할이니 과감하게 하겠다’ 생각하고 나름의 세심한 설정하에 연기했습니다. 수술 장면을 촬영하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어요. 하루에 6~10시간씩 수술 장면을 찍다 보니 ‘진짜 내 눈앞에서 뇌가 열리고 손끝 하나로 사람을 살리게 된다면, 의사는 경이로운 작업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이런 과정에서 느껴지는 숭고함이 분명 있었어요. 대부분의 의학 드라마는 의사의 소명 의식을 내세우지만 우리 드라마는 다르잖아요. 그렇게 새로운 감정을 느끼면서 다음에 다른 결을 가진 의사 역할을 하게 되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심리학 전공, 다양한 캐릭터 접근할 때 도움 돼
‘반사회적인격장애를 지닌 의사’는 분명 연기자에게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은빈에게는 의지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서강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던 터라, 여러 인격 장애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있었던 것. 그는 이번처럼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예측 불가능한 인물에 접근하는 데 그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세옥과 동질감을 느낀 부분이 있나요.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세옥뿐 아니라 제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저와 별개 인물로 생각해요. 그래야 훨씬 감정적으로 영향을 덜 받고, 오히려 연기에 몰입할 수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친구는 대체 왜 이러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친해지려는 캐릭터와 굉장히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오히려 완벽하게 타자화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더라고요. 그래서 캐릭터와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찾기보다는 제가 맡은 캐릭터를 이 세상에 잘 소개하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세옥은 생소한 인물이에요.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했나요.
처음부터 세옥을 단순히 ‘사이코패스’로 규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좀 더 범주를 넓혔어요. 반사회적인격장애의 특성들을 참고해서 표현했죠(사이코패스는 반사회적인격장애의 하위 개념). 제가 실제 이런 인물을 본 적은 없지만 최대한 이해하고 연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참고 문헌을 통해서 접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캐릭터는 독선적이고, 충동 조절이 어렵고, 감정적으로 타인을 몰아붙이기도 하죠. 하지만 결국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동력이기도 하기에 큰 에너지가 필요했어요. 기를 쓰고 연기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치열했죠. 과한 부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만의 방식으로 나름 인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어쨌든 세옥 덕분에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치열한 시간들을 보냈어요. 그렇다고 이 캐릭터를 미화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옹호를 바라지도 않아요. 또 악행을 변명하지 않는 인물이기에 끝내 갱생하지도 못하죠. 그래서 더더욱 내면의 감정 변화나 성장에 집중했어요.
대학에서 전공한 심리학이 이번 역할에 도움이 됐나요.
심리학을 전공한 덕분에 저만의 방법이 생긴 것 같아요. 배우마다 연기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특색 있는 역할을 맡게 되니 제가 공부했던 실제 진단 기준이나 체계를 참고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특성을 참고한 것이 인물을 좀 더 다층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됐어요. “세옥을 설명할 때 사이코패스에 국한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어떤 스펙트럼 안에서 그 인물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제가 배운 것들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세옥과 빨리 가까워질 수 있었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점들이 분명 있었어요.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온 노력형 배우 박은빈
박은빈은 1996년 네 살의 나이에 아동복 모델로 데뷔해 이듬해 MBC 아침드라마 ‘사랑과 이별’로 연기를 시작했다. 이후 SBS 드라마 ‘백야 3.98’과 ‘수호천사’, KBS 드라마 ‘명성황후’, MBC 드라마 ‘상도’ 등에서 아역 배우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리고 TV조선 드라마 ‘프로포즈 대작전’과 JTBC 드라마 ‘청춘시대’를 통해 완벽하게 성인 연기자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누구도 그의 얼굴에서 아역 시절을 떠올리지 않는다. 사극이든 현대극이든, 때로는 노래까지 넘나들며 어떤 역할이든 완벽하게 해내는 그는 국내를 넘어 엄청난 해외 팬덤을 보유한 신한류 스타다.데뷔한 지 30년 가까이 됐어요. 그 긴 시간 동안 연기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인가요.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에요. 그럼에도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다 보면 어떤 깨달음을 얻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발견해나가는 순간들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제껏 연기한 캐릭터를 모두 ‘친구’라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통해 온전히 세옥을 시청자 품으로 떠나보낼 수 있겠다 하는 후련함이 있지만, 한편으로 제 마음속에는 캐릭터들이 여전히 살아 있어요. 그 친구들이 제 성장을 도와줬기에 애틋한 감정도 있고요. 캐릭터는 작가님이 써주셨지만, 그 캐릭터를 해석하고 이해하고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건 배우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박은빈에게 연기는 천부적인 재능에 가까운가요. 아니면 피나는 노력일까요.
둘 다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천부적인 재능도 없고, 또 피나는 노력을 하는 인물도 아니거든요. 사람마다 노력에 대한 기준이 다르잖아요. 제가 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생각해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제 안의 안일함과 게으름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 혼자 조율하며 제 ‘안녕’을 지키는 한편, 배우로서 저의 임무를 잘 표현해 재미있게 보여드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저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어떤 방식의 성장을 선호하나요.
계단식 성장이랄까요. 급격하게 실력이 올라가는 때가 있어요. 확 깨달음을 얻을 때도 있고요. 하지만 언제나 상향 곡선을 그리지는 않더라고요.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아, 이게 계단이었구나’를 깨닫게 되는 거죠. 저는 습득력이 빠른 편인데, 배우를 하기에 참 좋은 자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잘 안 되더라도 매일매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퍼텐셜이 터지는 때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순간, 제 것이 되는 순간, 그런 순간들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 같아요.
퍼텐셜이 터졌던 순간으로 기억되는 작품이 있다면요.
특별히 한 작품을 꼽기보다는 각 작품에서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무인도의 디바’에서는 혼자 역경을 극복해야 하는 장면들이 있었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퍼텐셜이 터졌다고) 더 많은 분이 알아주신 작품이었죠. 새로운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 인물과 친해지기까지 늘 낯설고 예상보다 어려워서 후회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과정들을 지나면서 얻는 성취가 훨씬 크기에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올 수 있었어요. 설령 지치는 순간이 있어도 그걸 성취로 바꿀 힘을 기르려고 하고요. 그렇게 저는 저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박은빈 #하이퍼나이프 #여성동아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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