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러리 사과나무1
이런 연유로 지중해 연안과 브르타뉴 지방은 술과 관련된 문화도 다르다. 지중해 쪽은 많이 재배되는 포도로 만든 와인을 중심으로 한 음주문화가 발달해 있다. 반면 브르타뉴에서는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사과를 활용해 술을 만드는 전통을 갖고 있다. 영어로 사이더(cider)라고 부르는 사과주, 프랑스어로 시드르(cidre)가 이 지역의 대표 술이다. 와인은 보통 9~16도 사이의 알코올 도수를 갖고 있는데, 시드르는 4~8도 사이의 도수에 기포감이 있어 맥주와 비슷하게 음용한다. 하지만 사과 특유의 새콤달콤한 향과 껍질과 씨앗에서 오는 쓴맛, 묘한 타닌감까지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도 프랑스에서 수입한 시드르를 구입할 수 있고, 국내에서 생산하는 시드르도 있다.
지난 8월에 방문한 곳은 브르타뉴의 코르누아이(Cornouaille)라는 지역으로 사과 재배지이면서 시드르로 유명하다. 코르누아이 시드르는 유럽 내에서 PDO(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 등급의 지리적표시제 인증을 받은 몇 안 되는 시드르 중 하나이다. PDO 등급의 지리적표시제 인증을 받은 ‘코르누아이 시드르’는 반드시 코르누아이 지역에서 생산한 사과로, 코르누아이의 전통 방식으로, 코르누아이에서 양조·가공한 시드르임을 의미한다. 이게 별거인가 싶겠지만 PDO 인증을 받은 코르누아이 시드르를 생산하는 농가, 즉 사과도 재배하고 직접 양조도 하는 농가는 고작 28곳밖에 없다. 또 인근 사과 농장에서 사과를 매입해 전문적으로 시드르를 만드는 양조장은 7곳밖에 없을 정도로 양조 규정이 까다롭다.
프랑스 코르누아이 지역에 위치한 케르마오 농장.
결론적으로 케르마오 농장이 생산하는 6종의 시드르는 매우 훌륭했다. 케르마오에서 생산하는 시드르의 65%는 농장 인근에서 소비되고, 나머지는 프랑스 다른 지역으로 유통돼 소비된다고 한다. 이번 방문에서 주목을 끌었던 부분은 우수한 품질의 시드르나 대단한 농법에 관한 것이 아닌, 케르마오의 기후변화에 따른 위기 대응법이었다.
20년 후에도 국산 사과 먹을 수 있을까
케르마오 농장에서 생산한 시드르.
코르누아이 지역에서는 전통적으로 80여 가지의 사과 품종을 재배해왔다. 대부분 양조용 사과다. 알이 대체로 작고, 달거나 쓰거나 강한 타닌 성분이 들어 있는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 케르마오 농장의 며느리는 “케르마오 농장에서는 이 중 15가지 품종을 재배하고 있다”며 “이 15가지 품종의 사과는 각각 유전적 특성이 매우 다르다. 맛과 향, 개화 시기도 한 달 이상 차이가 나고 수확 시기도 서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어 “케르마오 농장에서는 이 15가지 품종의 사과를 순차적으로 수확해 주스를 내고, 이를 블렌딩해 케르마오 농장만의 특유한 시드르를 생산한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특성이 다른 15가지 품종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기후변화와 질병으로 일부 품종이 크게 타격을 입어도 다른 품종은 버틸 수 있다. 즉, 유전적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케르마오 농장 사과 품종의 가장 큰 강점이자 기후변화 등의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인 셈이다.
더워지는 날씨와 강우량의 변화, 이로 인한 질병으로 특정 품종의 사과 작황이 10~15% 나빠져도 다른 유전적 특성을 지닌 품종의 사과가 이를 절충해주기 때문에 케르마오 농장은 위협에 버틸 힘이 있다. 이러한 다양성의 확보를 강화하기 위해 케르마오 농장은 최근 인근 땅을 추가로 매입하고 코르누아이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재배해온 80여 품종 전부를 조금씩 심었다. 케르마오 농장은 더욱 극심해질 기후변화와 질병의 위협을 유전적 다양성 확보라는 무기로 적극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사과 품종은 전체를 다 합쳐봤자 10여 종 남짓이다. 게다가 후지와 홍로를 합치면 전체 재배량의 70%에 육박할 정도로 극단적인 편향성을 갖는다. 그 흔했던 인도, 국광은 다 베어버렸고 새콤달콤함의 대명사였던 홍옥도 찾기가 쉽지 않다. 좀 더 달고, 알이 크고, 유통에 유리한 단단한 사과만을 추구하다 보니 벌어지게 된 다양성의 훼손이다.
우리는 기후변화와 이에 따른 질병의 위협에 취약하다. 후지와 홍로가 이렇게 기후변화에 약할 줄 몰랐던 것이다.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성 확보밖에 없다. 농촌진흥청에서는 고온의 기후에 적응할 수 있는 품종으로 서머킹과 골든볼 등을 새롭게 내놓고 있지만 실질적인 다양성 확보는 소비자의 수요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번 가을에는 품종을 따져가며 평상시에 먹지 않던 사과를 골라보는 게 어떨까? 소비자들의 이런 작은 행동의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과연 우리는 미래 기후변화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지, 20년 후에도 국산 사과를 먹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브르타뉴 #사과주 #기후변화 #여성동아
사진제공 장준우 푸드비즈니스랩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