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구매할 때 ‘밥은 배 속에 들어가면 다 같지’라는 생각에 가격과 가성비를 구매 의사결정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세운다면, 당신은 적어도 쌀에 있어서는 미식가가 아니다. 만약 쌀의 구매 기준을 ‘도정일이 가까운 햅쌀의 품질’로, 한우는 ‘(정부가 매긴) 등급이 높은 소고기의 품질’로 정한다면 미식에 꽤 다가와 있다. 적어도 악식(惡食)은 아니다. 그러나 상식 또는 사회적 통념이나 규범에 의한 ‘높은 품질’의 판단 기준은 문화권이 바뀌면 바로 뒤집어진다.
이탈리아 쌀 브랜드 아퀘렐로는 최대 7년간 숙성된 쌀을 캔에 넣어 판매한다.(왼쪽) 아퀘렐로 쌀로 만든 토리노식 리소토.
스페인 중북부 레온에 위치한 목장 겸 스테이크 하우스 엘 카프리초.
이처럼 미식에는 단 하나의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으며 흔히 생각하는 ‘높은 품질’과 ‘낮은 품질’을 결정하는 요인은 더 이상 절대적인 수직적 평가 기준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식에서 중요한 것은 식재료의 수평적 특성, 즉 ‘다름’과 이를 소비하는 소비자의 취향이다. 저렴한 식재료, 가성비 좋은 식재료만을 찾아 구매하는 것은 가계 경제에는 분명히 도움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미식과는 거리가 멀다. 준비하려는 음식과 상황, 나와 내 가족의 취향에 맞는 식재료를 찾아 제값 주고 구매하여 즐기는 것이 미식이다. 그래서 미식을 하려면 약간의 학습이 필요하다.
쌀에 대해 알아보자. 쌀에 들어 있는 아밀로스는 전분의 형태 중 하나인데, 그 함량은 품종별로 차이가 난다. 아밀로스 함량이 낮은 쌀 품종으로는 ‘백진주’ ‘골든퀸 3호’ 등이 있고, 함량이 높은 것은 ‘일품’ ‘하이아미’ 등이 있다. 저아밀로스 품종은 탄성이 더 강하다. 밥을 지어 입에 넣으면 탱글탱글한 식감과 밥알 하나하나가 살아 있음이 느껴진다. 이를 “찰지다”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에 고아밀로스 품종은 입안에서 부들부들한 느낌이 드는데, 씹기 쉽고 소화가 잘된다. 오늘 저녁 친정 부모님이 오시는데 음식을 씹고 소화시키기 힘들어 하시면 고아밀로스 품종의 쌀로 밥을 짓는 것이 미식이다. 반대로 오늘 저녁에 밥을 볶을 건데 밥알 하나하나에 계란물이 코팅된 식감을 전달하고 싶다면 저아밀로스 쌀을 썼을 때 훨씬 더 효과적이다.
이런 공부를 개별 소비자가 직접 수행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메신저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셰프이고 마케터이다. 셰프는 특색 있는 식재료를 찾아서 그 특색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조리해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식재료의 특성이 무엇인지, 내가 왜 이렇게 조리를 했는지를 설명해주어야 할 메신저로서의 의무가 있다. 마케터들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식재료 특성을 콘텐츠화한 뒤 상품 상세 페이지를 통해 전달한다. 이를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이 바로 미식이고, 쌓인 경험과 지식을 식생활에 적용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 미식가인 것이다.
미식의 시작, 식재료의 다름을 파악하는 것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프랑스식 와인 바 루블랑의 토종닭 리소토.
‘토종닭 리소토’라는 메뉴를 개발한 프랑스식 와인 바 ‘루블랑’의 신민섭 셰프의 설명이다. 어떻게 보면 흔하면서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토종닭이라는 식재료를 ‘다름’으로 접근하여 그 특성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였다. 토종닭이 치킨용 일반 육계보다 품질이 더 높고 낮은지는 미식의 관점에서 중요하지 않고 의미도 없다. 그러나 셰프를 통해 토종닭의 특성이 강조되면서 미식의 재료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를 경험하고 학습한 소비자는 토종닭에 대한 자신의 취향(비록 그것이 불호이더라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토종닭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긴다. 집에서 수비드를 하긴 힘들겠지만 ‘토종닭을 에어프라이어에 구우면 맛있다’라거나 ‘토종닭을 삶은 백숙 국물을 활용해서 리소토를 만들면 그 풍미가 좋을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게 된다. 일반 육계와 토종닭을 구매해야 하는 상황과 시기, 그 다름에 대한 그림이 서서히 맞춰지기 시작한다. 이것이 미식이다.
식재료의 다름은 어디서 올까? 특정 식재료를 소비하는 데 뭔가 본질적인 다름을 느꼈거나, 특별히 더 좋아하는 이유가 존재한다면, 다음의 4가지 요소 중에 적어도 하나 이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식재료를 구매할 때도 이 4가지 요소를 참고하면서 나와 내 가족의 취향에 맞는, 만들려는 음식과 상황에 적합한 식재료를 세련되게 고른다면 당신은 미식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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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을 위한 ‘식재료 본질 4요소’
1 품종
생물학적, 유전적으로 구분되는 식재료의 특성
•고아밀로스 쌀(일품, 하이아미 등)과 저아밀로스 쌀(백진주, 골든퀸 3호)은 식감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양조용 포도 카베르네 소비뇽과 피노 누아르로 만든 와인은 탄닌 함량이 다른데, 이는 카베르네 소비뇽이 피노 누아르에 비해 포도 껍질이 두꺼운 품종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탄닌은 포도 껍질에 주로 분포한다.
2. 생육 환경
어떤 환경에서 생장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식재료의 특성
•간척지에서 재배한 쌀로 밥을 지었을 때 일반 논에서 수확한 쌀보다 윤기가 더 돈다. 간척지에는 마그네슘 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다. 마그네슘 함량이 높은 쌀로 밥을 하면 윤기가 더 돌기 때문이다.
•같은 품종의 더덕이라도 화산토 성분이 많은 울릉도에서 재배한 것은 강원도 더덕에 비해 향이 적고 식감이 더 부드러우며 심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3.생육 방식
작물을 두고 생산자와 생육 환경이 상호작용함으로써 달라지는 식재료의 특성
•같은 품종의 소라면 곡물을 많이 먹이는 생육 방식을 통해 마블링을 더
많이 형성할 수 있다.
•토경 재배한 상추는 수경 재배한 것보다 진이 더 많이 나고 향이
강하며 식감이 질기다.
4. 후처리 방식
발효, 숙성, 건조 등을 통해 식재료의 보존성과 상미(賞味)성을 끌어올리는 인간의 노력
•갓 수확한 쌀과 오랫동안 특정 온습도에서 보관한 쌀은 맛과 향,
용도가 다르다.
•드라이 에이징(Dry aging)을 하면 수분율은 더 낮아지지만 소고기의 육향을
더 강하게 끌어올릴 수 있다.
서울대학교 푸드비즈니스랩(푸드비즈랩)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와 연구진이 농업에서부터 식탁에 오르기까지 좋은 음식이란 무엇인지, 가치 있는 음식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놀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며 식품의 수확부터 식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흥미로운 포인트를 짚어준다.
사진제공 문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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