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안채, 사랑채로 이어지는 ㄷ자 형태의 한옥. 남향이라 여름에는 햇빛이 비켜가고 겨울이면 방 안 깊숙이 들이친다. 여름에는 들어열개창을 열어 대청에 멋스럽게 달아놓는다.
30년이 넘도록 한옥에 살고 있는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씨.
한국에서 23년째 ‘IRC 리미티드’라는 해양 중설비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Peter E. Bartho lomew)씨. 1968년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아 강원도 강릉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한옥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거처할 곳을 찾다가 조선시대 고택인 선교장(船橋莊)에 머물게 됐고 이 때부터 한옥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것. 산새와 나무, 기와지붕이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툇마루 너머 푸른 소나무가 한눈에 내다보이던 전경, 겨울밤을 녹이던 따뜻한 온돌방 등 한옥 생활의 운치를 맛보며 ‘한옥 예찬론자’가 되었다. “온돌방, 흙과 나무, 기와의 단아함 등 한옥에는 지혜롭고 멋스러운 정취가 있어요. 자연과 어우러져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모습을 보면 묘한 매력이 느껴져요.”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틈만 나면 동네 어른들과 오래된 한옥을 수리·보수했다. 찢어진 한지문을 새로 바르고, 나무에 들기름칠을 하고, 틀어진 나무문도 새로 달면서 거의 한옥 전문가가 다 됐다.
안채에는 마당이 한눈에 보이는 마루, 고가구로 꾸민 안방, 온돌이 유난히 따뜻해 손님용 침실로 사용하는 건넌방이 있다. 문짝을 떼어놓으면 하나의 공간으로, 문짝을 달면 독립된 공간으로 쓸 수 있어 편리하다.(좌) 선교장 생활의 추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그곳의 문살 사진을 찍어와 본떠 만든 미닫이문. 한지와 문살 문양이 곱다.(우)
1920년대 지어진 도심 속 전통 한옥
선교장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와 아파트에서 1년 남짓 살았지만 한옥 생활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에 위치한 남향의 한옥집. 일대에서 ‘대나무집’이라 불리는 그의 집은 1920년대에 지은 집장사의 집이다. 살기 위해 지은 게 아니라 남에게 팔기 위해 지은 집이라서인지 서까래가 짧고 대청마루와 툇마루가 없는 것이 아쉽지만, 부엌·안방·건넌방·아랫방·사랑채까지 갖춘 ㄷ자형 한옥이다. 그가 집을 구입하면서 안타까웠던 것은 앞서 살던 사람들이 미닫이문을 버리고 마루를 뜯어놓은 것. 선교장에서 살던 때의 추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선교장의 미닫이문을 사진으로 찍어 와 똑같이 복원하고, 마루에는 카펫을 여러 겹 깔았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아직도 종이를 바닥에 바르고 목재가 상하지 않도록 못 하나도 박지 않는 등 전통적인 한옥의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한옥뿐 아니라 백자 항아리, 다기, 막사발 등 우리나라 골동품의 예스러움이 좋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견고한 서까래와 서양의 앤티크한 실링팬이 어우러져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손때 묻은 고가구와 멋스러운 골동품, 병풍 등으로 꾸며진 안방은 전통미가 느껴진다.(왼쪽부터 차례로)
안채에서 마당 쪽으로 나 있는 창문. 한자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문살에 전통 한지를 발라 만든 문이 멋스럽다. 마당 한쪽에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가 있어 ‘대나무집’이라 불린다.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는 계절마다 색다른 풍경을 연출해낸다. 손님 방으로 사용하는 사랑채. 우아한 곡선의 기와와 나무 현판, 디딤돌 등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해 운치가 느껴진다.(왼쪽부터 차례로)
자연과 사람을 생각하는 친환경적인 공간
10평 남짓한 마당에는 어두운 잿빛 박석(薄石, 얇고 넙적한 돌)이 깔려 있다. 한가운데에는 50년 남짓 되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그늘을 만들며 서 있고, 대나무를 비롯한 여러 그루 나무들이 병풍처럼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여름이면 은행나무 아래 평상을 깔고 삼겹살을 굽거나 바비큐 파티를 벌이기도 하고, 달이 밝은 날에는 친구들을 불러놓고 마당에서 술 한 잔을 기울이다보면 시름도 잊히고 스트레스도 풀린다.
그가 30년 이상 고집스럽게 한옥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가장 건강한 집’이기 때문이다. 한옥은 흙과 나무, 종이, 돌 등 자연에서 나는 재료로 지어져 있어 사람의 몸과 마음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흙, 나무, 종이… 한옥을 지을 때 사용하는 재료들은 모두 자연 그대로예요. 자연과 가깝고 집주인을 가장 잘 배려한 친환경의 집이라고 할 수 있지요. 게다가 멋스러운 정취까지 있으니 한옥에 살면 몸의 기운이 절로 좋아질 수밖에 없답니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공간
대문을 열고 들어서서 돌계단을 올라가면 마당과 이어지는 중문이 나온다.(좌) 문고리와 빗장이 있는 대문과 중문은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들어졌다.(우)
흔히들 “한옥은 불편하다”고 말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집 틀을 유지하면서 부엌 등 편의공간만 조금만 고치면 생활하는 데 불편이 전혀없다. 한옥의 특징인 탁 트인 열린 구조는 여름에 시원하지만 겨울에는 추운 것이 단점. 하지만 알루미늄으로 덧문을 만들어 안채 앞에 세워두고 온풍기를 틀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다. 덧문은 목재가 상하지 않도록 못 하나 박지 않고 나사를 조여 세웠다가 봄이 되면 떼서 따로 보관해둔다. 난방이 쉽도록 방마다 바닥에 동 파이프를 깔았지만 아궁이를 남겨 2개월에 한 번 정도 불을 지펴 집 안의 습기를 없앤다. 아랫방 아궁이 옆의 공간은 세탁실로 꾸미고, 욕실과 부엌은 현대식으로 개조했다. 연탄을 쌓아두었던 광은 2층 구조로 바꿔 1층에는 컴퓨터 책상을 두었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도록 꾸민 2층에는 러닝머신을 두었다. “한옥에 사는 분들 대부분이 편리한 현대식으로 바꾼다고 멋진 갑창문(한지를 문 안팎으로 두껍게 발라 미닫이문 안쪽에 덧끼워 다는 문)을 내다버리고, 온돌을 없애고 아궁이를 막아버리죠. 하지만 조금만 신경 쓰면 전통을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어요.”
그는 대대손손 자랑스럽게 가꾸어도 모자랄 한옥과 같은 옛것을 천덕꾸러기 취급하고, 새것과 깨끗한 것만 좋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섭섭하고 유감스럽다고 한다. 한옥이 모여 있는 북촌마을에 재개발 열풍이 불고 있는 요즘은 자고 나면 한옥이 헐린다. 그가 30년 넘게 가꿔온 집도 예외는 아니다. “유럽의 도시에도 18, 19세기 집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이런 집들 역시 좁아서 살기에 불편해요. 하지만 내부를 조금씩 현대식으로 바꾸더라도 겉모양은 그대로 유지해 전통을 보존하지요. 기와 한 장, 문짝 하나 등 모두가 예술작품인 한옥도 지키고 가꾸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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