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ULTURE

게임 속 또 다른 나를 그리는 태킴 작가

정세영 기자

2023. 05. 29

태킴 작가의 시간은 가상 세계와 현실이 함께 공존한다. 게임을 통해 만난 아바타가 실제 친구가 되고, 아바타의 플레이와 텍스트에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린다. 무한한 상상력과 관찰력을 소유한 그를 만나 게임과 미술을 잇는 기묘한 연결고리에 대해 들어봤다. 

태킴 작가의 심미적 감각을 가장 많이 반영한 작품들. ‘ㅎㅇ(Sup)’, 198x129cm, 2022(왼쪽). ‘아이런(Oh no)’, 198x129cm, 2022(오른쪽).

태킴 작가의 심미적 감각을 가장 많이 반영한 작품들. ‘ㅎㅇ(Sup)’, 198x129cm, 2022(왼쪽). ‘아이런(Oh no)’, 198x129cm, 2022(오른쪽).

가상 세계 속 아바타의 사실적인 비주얼과 행동은 사용자를 게임에 깊이 몰입시킨다. 사용자는 아바타의 플레이를 통해 스토리를 직접 만들고 감정과 심리를 이입해 오직 자신만의 서사를 완성한다. 가상 세계와 현실을 명확히 구분하는 사용자도 있지만, 뇌리에 오래 남은 게임 속 서사를 음악이나 소설, 미술 등 다른 형태로 표출하는 이들도 있다.

태킴 작가(36)는 게임을 통해 만난 아바타를 의인화해 그림을 그린다. 채팅과 목소리, 플레이 등 예리한 감각으로 채집한 특징과 분위기를 텍스트를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미세한 점과 곡선으로 대체한다. 작품 속 인물은 가상 세계의 아바타처럼 반듯하고 정갈하지 않다. 동양화에서 익힌 과감하고 탄탄한 붓질을 활용해 러프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표현한다.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석박사 과정과 영국 런던대학교(UCL) 슬레이드 페인팅(Slade Painting) 학과 석사 과정을 졸업한 그는 2021년 ‘Art In Culture’ 미술 전문가 9인이 선정한 영 파워 아티스트에 이름을 올린 MZ세대 대표 작가다. 지난해에는 영국 미술 전문 잡지 ‘트레뷰셋(Trebuchet)’에 장장 6페이지에 걸친 인터뷰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다음 달 영국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독일, 미국 등 전 세계에서 러브 콜을 받으며 대세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입증하고 있다.

미술계가 태킴 작가의 작품에 주목하는 이유를 단지 ‘게임’이라는 독특한 발상으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될 듯하다. 게임 속 아바타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정신적·육체적 괴리감과 죽음, 이별, 기쁨 등 다양한 감정까지 촘촘하게 담아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굿즈와 비스크 인형, 조각, 영상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 있는 중. 과연 그의 상상력과 감각은 어디까지 뻗어갈까.

작품의 주인공은 게임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에요. 게임의 어떤 점이 작가님을 매료했나요.

온라인은 사회적 위치나 나이, 조건 등을 전혀 따지지 않는 공간이에요.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아를 형성하고 소비할 수 있죠. 원하면 언제든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 수도 있고요. 허례허식 없는 공간에서 내가 원하는 자아와 비주얼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매력적이고 편하게 느껴졌어요. 게임 속에서 캐릭터가 하는 행동이나 텍스트, 목소리, 실수 등을 통해 그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림으로 자유롭게 표현해내는 것도 재미있고요.



작품의 출발은 ‘게임’이네요.

맞아요. 좀 더 깊게 접근하자면 게임 속 캐릭터에서 나오는 ‘순간적인 인간미’라고 할 수 있어요. 게임이나 채팅을 하면 순간적으로 캐릭터 뒤에 사람이 있구나라고 느낄 때가 있어요. 벽에 부딪힌다든지, 키를 잘못 눌러서 게임 장소를 이탈한다든지,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같은 편끼리 감정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까지요. 완벽하고 화려한 비주얼에 감정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캐릭터들이 실수도 하고 싸우는 모습을 보면 묘한 인간미가 느껴지더라고요. 이걸 특징으로 잡아 작업하고 있죠.

예를 들면요.

게임을 하다 같은 팀원이 어느 구역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며 화를 냈는데 결국 실수로 자신이 그 스폿에 들어가더라고요. 아차 싶었는지 후진을 하는데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아서 그림 아래쪽에 후진이라는 텍스트를 써두었어요. 뿔, 날개 등 캐릭터의 특징이 될 만한 비주얼이 있으면 그림에 그대로 접목하기도 하고요.

게임을 작품에 대입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2007년 함께 게임하던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사이버 장례식을 했는데, 캐릭터(고인의 아바타)가 있는 곳으로 가 동전을 뿌리고 ‘편히 가세요’라는 팻말을 꽂아두었죠. 게이머는 없지만 캐릭터는 그 장소에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며 아바타와 실제 사람과의 신체적 거리가 극단적으로 멀게 느껴졌어요. 이를 그림으로 남겨두었고 올해 3월 ‘피니치오니: 끝에게’라는 전시회를 통해 공개했어요.

그래서인지 작품 대부분이 어둡고 우울해 보여요. 인물들도 거의 무표정이고요.

가상 세계 속 아바타들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신체는 계속 노화하면서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이런 신체적 거리감이 대부분의 작품에 자연스럽게 언더라인으로 깔리면서 어두운 느낌이 나는 것 같아요.

즐거움과 기쁨은 어떻게 표현하나요.

텍스트를 통해서요. ㅋㅋㅋ, ㅎㅎㅎ, ㅋㅅㅋ, ㅎㅅㅎ 등의 텍스트가 들어간 작품들이 있어요. 핸드폰을 할 때 우리는 무표정으로 ㅋㅋ, ㅎㅎ라고 쓰면서 즐거움을 표현하죠. 비슷한 맥락이에요. 그림 자체는 어둡지만 위의 텍스트를 통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진짜 분위기를 표현하는 거죠.

작품은 캔버스가 아닌 비단 위에서 이루어져요. 밑그림은 목탄으로 그리는 것 같고요.

반대편의 형체가 다 비치는 얇은 비단의 뒷면에 컬러를 두껍게 쌓으면 앞면에는 색이 연하게 올라오는데, 이 모습이 은은하고 아름다워 보여요. 진한 컬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제 작업 방식과도 잘 맞고요. 목탄을 사용하는 이유는 수정이 쉽기 때문이에요. 털면 날아갈 정도로 접착력이 거의 없거든요. 연필도 써봤는데 지우는 데 일단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림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수정하는 데 써버리니 기운도 빨리 빠지더라고요.

캐릭터의 감정은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나요.

인간의 감정은 눈을 통해 나온다고 하죠. 가상 세계에서는 주로 텍스트를 통해 이를 파악하고요. 작품을 자세히 보면 동공에 미안, 감사, 힝 등의 문자가 적혀 있어요. 이렇게 눈에 텍스트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감정을 표현하고 있어요. 또 양쪽 눈의 컬러와 모양, 크기 등도 조금씩 달라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감정과 성격, 인격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비대칭적으로 그리고 있어요.

인물의 얼굴에 점이나 핏줄 등을 디테일하게 그려놓았어요. 의도한 건가요.

맞아요. 가상공간에서의 캐릭터는 대부분 반듯하고 대칭적인 모습이에요. 하지만 캐릭터를 통제하는 인간은 결점도 있고 실수도 하죠. 이런 부분에서 느껴지는 인간미를 캐릭터에 적용해보고 싶었어요. 스스로 인간적인 요소라고 생각되는 것을 비인간적인 대상에 부여하면서 생명력을 불어넣는 거죠. 그 방법으로 점이나 핏줄, 혈관 등을 선택한 거고요.

목 부분에는 3개의 점이 그려져 있어요.

기도와 식도 그리고 정신적 교류를 위한 통로를 의미해요.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호흡 같아요. 기도와 식도가 중요한 기능을 하고요. 또 사람은 타인과의 정신적인 교류 없이 살아갈 수 없어요. 그림 속 인물은 이 점들을 통해서 호흡하고 누군가와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는 거죠.

관객들이 꼭 봐주셨으면 하는 작품이 있다면요.

‘아이런(Oh no)’과 ‘ㅎㅇ(Sup)’이라는 작품이요. 원래는 심미적인 걸 많이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는데 2~3년 전부터는 그림이 좀 더 예뻐 보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컬러도 진하게 올리고 처음으로 배경에도 색을 넣었어요. 완성하고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작품이 더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림에 대한 애정도 높아졌고요.

현재와 미래, 삶의 중심은 언제나 게임

그림 속 아바타를 실제 형상으로 재현한 자기 조형 작업. ‘ㄱㄱ’, 48x36x45cm, 2023.

그림 속 아바타를 실제 형상으로 재현한 자기 조형 작업. ‘ㄱㄱ’, 48x36x45cm, 2023.

현실 세계의 사람을 그리고 싶었던 적은 없나요.

없어요(웃음). 아직까지는 가상공간 속 아바타들에게 더 끌려요. 꾸밈없고 솔직한 행동과 텍스트 등이 매력적이거든요.

실제 게임을 좋아하나요.

‘겜돌이’예요. 안 한 날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거의 매일 게임하죠. 게임을 통해 영감을 얻어 작업하고, 작업으로 받은 스트레스는 게임으로 풀어요. 요즘은 게임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 같기도 해요. 랭킹이 떨어지고 있거든요. 개인 과외도 받았는데 왜 이렇게 실력이 안 느는 걸까요(웃음).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무엇인가요.

‘리그 오브 레전드’요. 상대 팀의 넥서스(적군의 기지)를 파괴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 게임은 특히 단합력과 의사 전달이 중요해요. 때문에 같은 팀끼리 화내면서 싸우는 횟수도 많고요. 또 기쁜 일이 있으면 똘똘 뭉쳐서 엄청 즐거워하고 열광하죠. 이런 식으로 오가는 극단적이고 폭발적인 감정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어요.

1 머리 부분에 한자 없을 무(無)를 넣어 게임 중 생각 없이 달려들고 싸우는 맹목적인 현상을 담았다. ‘GO!Shoot!’, 125x79cm, 2022.

1 머리 부분에 한자 없을 무(無)를 넣어 게임 중 생각 없이 달려들고 싸우는 맹목적인 현상을 담았다. ‘GO!Shoot!’, 125x79cm, 2022.

게임을 통해 만난 친구들이 실제 전시회에 온 적도 있나요.

2022년 진행한 ‘얼굴 없는 게이머’ 시리즈 전시회를 할 때 많이 찾아왔어요. 게임 속 자신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고 하더라고요. 캐릭터의 특징을 파악해서 그림으로 표현한 점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고 하고요. 분명 온라인에서는 서로의 가정사까지 알 정도로 엄청 친한 사이였는데 실제로 만나니 정말 어색했어요. 의자에 앉아 함께 뻘쭘하게 사진을 찍고 헤어졌던 기억이 나네요.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다면요.

잘 알고 있겠지만 예술로 큰돈을 벌긴 정말 힘들어요. 회화 전공자 중에서도 그림이 전업인 사람은 거의 없죠.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강의 등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어요. 꼭 미술을 통해서만 경제적인 성공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관심 있는 분야의 일도 하면서 경제적인 여유를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성공의 기준이 내면의 만족이라면 미술에만 집중하고요.

설레는 근조 시리즈. 아바타와 사용자의 피할 수 없는 이별을 근조의 형태로 담았다. ‘설레는근조_내적화환(Inner bloom)’, 78.5x124cm, 2022.

설레는 근조 시리즈. 아바타와 사용자의 피할 수 없는 이별을 근조의 형태로 담았다. ‘설레는근조_내적화환(Inner bloom)’, 78.5x124cm, 2022.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늘고 있어요. 오랫동안 즐겁게 그림을 그리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취미 미술은 크게 2가지로 나뉘는 것 같아요. 개인의 만족을 위한 그림과 SNS 인증을 위한 그림으로요. 드로잉, 채색 등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 있다면 집중적으로 연습하세요. ‘좋아요’ 수를 많이 받고 싶다면 정물화든 초상화든 한 분야에만 시간을 할애하시고요. 틈틈이 작업 과정과 완성품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 SNS에 인증도 하세요. 미술을 하나의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취미로 그림을 그릴 때는 새로운 스킬을 빨리 배우거나 작품을 많이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반복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게 포인트죠. 그러다 보면 실력도 자연스럽게 늘어 있을 겁니다.

‘사랑한다’와 같은 깊은 감정을 채팅을 통해 손쉽게 표현하는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표현했다.  ‘스릉흔드’, 24x35cm, 2022.

‘사랑한다’와 같은 깊은 감정을 채팅을 통해 손쉽게 표현하는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표현했다. ‘스릉흔드’, 24x35cm, 2022.

미술은 재료비가 만만치 않아요. 가성비 좋게 구입하는 팁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당근마켓을 적극 추천합니다. 다양한 미술 도구를 세트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거든요. 제가 가지고 있는 100년 된 벼루, 먹 가는 기계도 당근마켓에서 구입했어요. 못 써본 재료나 궁금한 도구가 있으면 당근마켓을 꼭 검색해봅니다.

게임의 판도에 따라 믿음이 불신으로 바뀌는 격정적인 감정을 묘사했다. ‘너를 믿지 않아(Trust issues)’, 124x78.5cm, 2023.

게임의 판도에 따라 믿음이 불신으로 바뀌는 격정적인 감정을 묘사했다. ‘너를 믿지 않아(Trust issues)’, 124x78.5cm, 2023.

도전해보고 싶은 작업이나 분야가 있다면요.

한 화면에 여러 명을 그려 넣는 규모가 큰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지금은 재료비 등의 현실적인 제약으로 한 화면에 인물 1명만 집중해서 그리고 있거든요. 또 공간을 물질로 채워보고 싶어요. 게임을 통해 만난 사람들을 식당 앞 풍선 인형처럼 크게 만들어서 빈 공간을 가득 메우는 거죠. 게임 속에서 만난 친구들이 진짜 살아 있는 것처럼 이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가상공간 #아바타 #게임 #태킴 #여성동아

사진 김도균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