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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foodie

위키드와이프 이영지 대표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와인을 해석하다

EDITOR 이미주

2020. 04. 06

포도 품종과 산지를 의미하는 어려운 와인 라벨 대신 떡볶이 스파클링, 양념치킨 레드처럼 귀에 쏙쏙 박히는 작명으로 와인을 우리 일상에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이영지 대표와 와인 러버들의 성지 위키드와이프에 대하여.

일상 와인 편집숍, 위키드와이프

“짜장면에 먹을 건데 어울리는 와인 하나 추천해주세요.” 오후 2시,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 위치한 와인 편집숍 & 페어링 바 위키드와이프의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 손님이 들어오더니 이렇게 물었다. 이영지 대표는 익숙한 듯 스페인 카바와 독일 카비넷 등급 리슬링을 추천했다. ‘짜장면의 기름지고 미끌미끌한 맛을 깨끗하게 감싸주는’, ‘춘장의 달큰한 맛을 더 감칠맛 나게 하는 엷은 감미가 있는’ 식의 맛깔 나는 설명과 함께. 

보통의 와인숍에서 보기 힘든 생경한 풍경은 숍 안쪽 와인 진열장으로 이어진다. 와인마다 테이스팅 노트와 페어링 팁이 담긴 태그를 달고 있는데, 타닌이나 산도 같은 머리 찌근거리는 용어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맛볼 법한 근사한 메뉴는 찾을 수 없다. 대신 ‘구름 위를 산책하다 만들었을 듯한 갓 만든 진한 착즙주스의 맛’처럼 묘하게 이해되는 감성적인 맛 평가나 ‘맵고 칼칼한 한식 요리’ 같은 생활밀착형 페어링 팁이 주를 이룬다. 이영지 대표는 직선적이고 재미없는 테이스팅 노트에는 마음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유치한 형용사와 의성어, 심오한 문학작품이나 재즈 한 곡에 빗대어 와인을 표현할 때면 기분이 좋아져요. 마치 그 와인을 온전히 이해한 것 같거든요.” 와인 페어링 메뉴 역시 자신의 경험에 반추해 탕수육, 제육볶음밥, 떡볶이 등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로 제안한다. “서울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살면서 저의 일상 음식은 커리, 솜땀, 탕수육 같은 배달 음식이었어요. 퇴근 후 와인 바에 앉아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여유는 당연히 없었고요. 저와 같은 직장인을 위해 커리와인, 솜땀와인, 탕수육와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친숙한 음식에 새로운 인상을 부여하는, 한식 페어링 바

위키드와이프의 문을 열면 정면에 보이는 리셉션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와인숍이, 왼쪽에는 페어링 바가 자리한다. 2018년 겨울 와인숍으로 가로수길에 처음 문을 연 위키드와이프는 작년 가을 현재 위치로 가게를 이전하면서, 일상에서 편히 접하는 한식과 와인의 마리아주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와인숍에서 판매하는 와인의 페어링 영역이 배달 음식과 집밥을 근간으로 한다면, 페어링 바는 우엉만두, 발사믹소고기찜, 계절솥밥 등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와 한식 조리법에 약간의 서양적 터치를 가미한 메뉴가 주를 이룬다. 페어링 바 메뉴가 낯설지 않으면서도 새롭게 보이는 이유다. 

이영지 대표에게 보통의 와인 바에서 으레 추천하는 일반적인 페어링 공식은 별 의미가 없다. 와인도 그렇고 음식도 그렇고 특정 메뉴나 국가에 집착하지 않고 와인과 음식을 함께 먹을 때 완벽한 한 끼가 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맛의 조화만 따진다. 떡이 와인과 잘 어울린다는 것, 그리고 떡마다 어울리는 와인이 다르다는 것, 같은 소고기라도 부위와 조리법에 따라 맞는 와인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은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며 깨우친 진리다. “아무리 좋은 와인이라도 맞지 않는 음식과 함께 먹으면 분위기가 더 이상 즐거워지지 않아요. 커플은 싸우고,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서둘러 자리를 파하게 되죠.” 그래서 그는 와인 따로, 음식 따로 노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페어링 바를 찾은 손님들의 주문을 일일이 참견하고 보살핀다. 실제로 손님 대부분이 스태프의 설명을 듣고 메뉴를 변경한다. 

한식 페어링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일상에서 한식을 가장 많이 접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와인과 한식 메뉴 페어링을 시도한 것은 심영순 요리연구가에게 한식을 배우면서부터다. “일간지 기자 시절 선생님을 인터뷰하고 얻게 된 기회였지요. 선생님의 한식을 배우며 ‘먹다가 소리 지르는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태어나서 그토록 맛있는 밥과 반찬, 찌개는 처음이었거든요.” 기술적인 양념 레이어를 통해 한식이 다채로운 맛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과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와인

위키드와이프 이영지 대표. 위키드와이프는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영업하며, 와인숍은 오후 2시, 페어링 바는 오후 7시에 문을 연다.

위키드와이프 이영지 대표. 위키드와이프는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영업하며, 와인숍은 오후 2시, 페어링 바는 오후 7시에 문을 연다.

작은 소품 하나 허투루 쓰이지 않은 담백한 인테리어, 마음을 훔치는 와인 페어링 스토리텔링, 가벼우면서도 깊고 인스타그래머블하면서도 탄탄한 콘텐츠는 그저 허울 좋은 마케팅이겠거니 오해했다. 하지만 이영지 대표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공간을 구석구석 들여다볼수록 와인을 향한 그의 깊은 진심이 느껴졌다. 와인 전문지 에디터부터 유명 와인 수입사 직원, 월간지와 일간지의 푸드&와인 전문기자를 거치며 탄탄하게 쌓은 와인에 대한 내공 역시 만만치 않았다. 와인의 어떤 점이 그를 이토록 매료시켰을까. 

의외로 답변은 ‘그렇게 됐다’였다. 숙명인 것처럼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이뤄졌을 뿐.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가 와인에 눈을 떴고, 한국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이 백화점 와인 매장 아르바이트였다. 도장 깨기 하듯 백화점과 마트를 찾아다니며 한국에 수입되는 모든 와인을 섭렵했고, 공부 속도를 내고 싶어 국제 인증 와인 전문가 과정 WSET를 통해 와인을 배우고 책이 해질 때까지 외우고 또 외웠다. 와인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자연스럽게 일로 이어졌다. 와인 전문 잡지사에 입사해 그의 표현대로 ‘위대한 개츠비’ 시대를 살았다. “일주일에 7번 와인을 마셨고, 책상 앞에 앉아 샴페인 한잔을 따르며 업무를 시작했어요. 월급은 끔찍했지만 이 일을 하면서 마신 최고급 와인을 액수로 환산하면 그때의 노력과 투자가 전혀 아깝지 않아요.” 이후 와인 수입사의 홍보 담당자로 일하다가, 와인을 좀 더 거시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기 위해 라이프스타일 매거진과 일간지로 이직해 와인과 음식 기사를 썼다. 

와인 세계에 입문해 관련 콘텐츠를 만든 것까지가 인생 1막이라면, 소믈리에로서 자신의 와인 테이스트를 타인에게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현재의 삶이 인생 2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영지 대표가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을 때 그 2막이 훅 찾아왔다. 자신의 삶이 타인에 의해 혹사당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퇴사를 선언하고 10년 넘게 운영하던 블로그에 와인 수업을 공지한 것이 불씨가 됐다. “두 개의 세션이 15분 만에 마감되는 것을 보고 두 가지 생각을 했어요. 아, 먹고살 수 있겠구나. 그리고 누군가는 이토록 와인에 목말라 있구나.” 이후 프라이빗 와인 클래스를 지속하며 브랜드와 협업해 상품 기획, 기업 출강, 크고 작은 행사에 인플루언서로 참여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2년 후 신사동 가로수길에 20가지 남짓의 와인을 소개하는 와인숍을 열었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페어링 바를 겸비한 지금의 위키드와이프로 성장했다. 와인 매장 아르바이트를 했던 20대 중반부터 15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에디터, 홍보 담당자, 강사, 와인숍 대표까지 그가 어떤 명함을 갖고 있든 곁에는 언제나 와인이 있었다. 


직역하면 ‘악처’라는 뜻의 위키드와이프는 좋아하는 일을 위해 타협하지 않고 목적 있는 삶을 추구하는 서울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을 은유한다. 이 시대의 위키드와이프인 이영지 대표의 계획은 무엇일까. “직접 경험한 정보를 담은 와인카드로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해 키오스크를 통해 조금 더 쾌적하게 와인을 구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예요. 그리고 국내에서 온라인 주류 판매가 허용된다면 마켓컬리의 와인 버전을 만들어 모두가 와인과 음식을 조금 더 편하고 맛있게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현재 금·토요일 점심 시간에 위키드와이프에서 분식 페어링 런치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 프로젝트로 뉴욕에 분점을 내는 거예요.” 

마지막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쑥스러운 듯 엷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꿈은 그렇게 또 자연스럽게 현실이 될 것이다. 매장을 찾은 손님이 맛있게 와인을 마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현실적인 조언을 아까지 않는 그의 진심이 있는 한, 와인을 향한 그의 애정이 식지 않는 한 말이다.

이영지 대표 추천,한식 소스에 따른 와인 페어링 공식

한식 와인 페어링은 식재료보다 소스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한 이영지 대표. 그가 대표적인 한식 소스로 만든 메뉴에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했다. 특정 맛을 공격해 같이 날아오르거나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완벽한 세트가 되는 것이 페어링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덧붙였다. 아래에 소개하는 와인과 메뉴는 위키드와이프를 방문하면 직접 맛볼 수 있다.

1.고추장소스(명태초무침)
레드 스파클링, 프랑스 루아르 지역의 슈냉 블랑, 드라이한 로제와인 

한식 소스 중 가장 대중적인 맛인 고추장은 제육볶음, 양념치킨, 명태초무침, 순대볶음 등 다양한 메뉴에 적용할 수 있다. 이 경우 와인은 매운맛을 자극해 와인도 음식도 더 먹도록 유도하는 레드 스파클링(이탈리아 북부의 쓴맛과 단맛이 공존하는)이나 단맛과 신맛, 짠맛의 밸런스가 좋은 프랑스 루아르 지역의 슈냉 블랑, 약간의 신맛이 도드라져 매운맛을 상쇄시키는 드라이한 로제와인을 추천한다. 

2.기름소스(주꾸미와 냉이페스토)
이탈리아 오렌지와인 

냉이페스토는 올리브오일 대신 들기름을, 바질이나 브로콜리 대신 냉이를 사용한 한식 스타일 페스토로, 뭉근한 허브 향에 기름진 질감의 소스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음식에는 비슷한 허브 향이 나고 입안에 깨끗한 여운이 남는 이탈리아 오렌지와인을 추천한다. 들기름에 볶은 무나물이나 참나물에 곁들여도 잘 어울릴 만한 와인이다.

3. 된장소스(두부오이무침)
독일 리슬링, 프랑스 루아르 지역의 슈냉 블랑

된장은 가지에 발라 굽거나 오이와 두부를 으깨고 버무려 반찬처럼 먹거나 나물을 무칠 때 적용할 수 있는 소스로, 짠맛과 구수한 맛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 날카롭고 쨍한 와인을 매치하면 된장 맛이 쓰게 느껴질 수도 있다. 청포도가 잘 익어 단맛이 처음부터 느껴지는 독일의 리슬링, 프랑스 루아르 지역의 슈냉 블랑을 곁들이면 된장소스 반찬을 안주 삼아 와인 한 병을 손쉽게 비울 수 있을 것이다. 

4.간장식초소스(달래장샐러드)
날카롭고 군더더기 없는 화이트와인 

달래장은 간장소스에 식초를 결합해 짠맛과 신맛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반찬이다. 간장게장도 비슷한 맥락의 맛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음식에 레드 스파클링이나 달콤한 화이트와인을 매치하면 맛이 부딪칠 수 있다. 대신 날카롭고 쨍하고 군더더기 없는 화이트와인이 무척 잘 어울린다. 이때 신맛은 필수이며, 장식적인 꽃과 향수, 아로마가 있는 와인은 피하는 것이 좋다.

기획 최은초롱 기자 사진 김도균 디자인 최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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