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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로 나락 보내는 ‘나락퀴즈쇼’

김경수(@인문학적개소리) 밈평론가

2024. 03. 13

논란을 유머로 승화시킨 인터넷 콘텐츠에 대하여.

요즘 ‘나락’이라는 단어의 인기가 심상찮다. 불교에서 지옥을 일컫는 나락은 재작년부터 인터넷 밈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밈은 아프리카TV 등 인터넷 방송 BJ가 시청자에게 트집 잡힐 발언을 하면, “나락행” “나락 갔다” 등 농담조의 댓글이 달리는 것에서 출발했다.

2020년 초반에는 “나락도 락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다양한 굿즈가 큰 사랑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 유튜브 ‘피식대학’의 간판 콘텐츠 ‘나락퀴즈쇼’가 방영되며 나락은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가 됐다.

피식대학의 ‘나락퀴즈쇼’는 마치 지옥에 온 듯한 시뻘건 배경의 스튜디오에서 진행된다. 관중은 없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MC 김민수가 연거푸 게스트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진 뒤 대답을 재촉한다. 예컨대 운동 유튜버 말왕에게 “다음 중 가장 싫어하는 운동을 고르시오!”라고 질문한 뒤 “①3.1 운동, ②흑인 민권 운동, ③노동자 인권 운동, ④ 여성 운동” 등으로 선지를 주는 식이다. 문제가 될 대답이 나오는 순간 카메라는 주위 사람의 탄식 어린 표정을 포착한다. MC는 게스트의 해명 기회를 박탈하고, 비슷한 패턴으로 여러 질문을 반복한다. 마지막으로 MC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수가 그 사람을 대변하지는 않습니다”라는 클로징 멘트를 하며 쇼를 끝낸다. 댓글에는 게스트가 한 대답만 모은 뒤, 그 발언이 마치 정치적 성향인 듯 포장한 농담이 베스트로 올라와 있다.

‘나락퀴즈쇼’는 시작할 때 “Cancel Culture: 유명인이나 공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논쟁이 될 만한 행동이나 발언을 했을 때,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대중의 공격을 받고 지위나 직업을 박탈하려는 캠페인의 대상이 되는 현상, 즉 나락”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삽입해 이 쇼가 캔슬 컬처를 풍자한 쇼라는 것을 알린다. ‘나락퀴즈쇼’의 풍자는 영리하다. 캔슬 컬처 자체보다 SNS에서 캔슬 컬처가 생기는 메커니즘을 캐리커처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 바이럴 계정에 업로드된 글에는 논란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요즘 논란이 되는 A.jpg’ 식이다. 정작 논쟁거리가 될 만한 내용이 없어 보여도 누군가 논쟁을 벌이고 있다면 호기심이 생긴다. 논란이 아닌 것도 논란이라고 부르는 순간 사건화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기사나 콘텐츠 제목에 논란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남의 집 싸움 구경이 가장 재밌는 법, ‘논란’이라는 제목을 지으면 곧장 조회수가 치솟기 때문이다. 조회수와 좋아요는 개인에게는 쾌감을, 광고 계정에는 돈을 안겨준다. 유명인을 둘러싼 논란도 대부분 조회수를 올리고자 유명인의 행동이나 발언을 원본 맥락과 상관없이 잘라내서 박제하는 방식으로 생산된다. 연예인은 사소한 실수라도 상식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곧장 논란거리가 된다. 해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최근 뉴진스의 민지에게 생긴 칼국수 논란도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일반인도 얼마든지 박제와 신상 털기로 나락에 갈 수 있다. SNS에서 24시간 뒤 사라지는 스토리만 올리는 이의 수가 점차 늘어나는 것은 자신이 과거에 업로드한 글로 인해 나락으로 갈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또 정치적 의견을 드러낸 순간 본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커지기도 했다. 본인과 정치적 의견이 다른 이에게 손절을 당할 각오도 해야 한다. 우리 시대는 나락이 일상화된, 만인에 의한 만인의 나락인 시대가 되었다.

MZ세대가 ‘나락퀴즈쇼’에 환호하는 것은 나락에 대한 공포 때문 아닐까. 이 쇼는 일부러 논쟁이 될 만한 대답을 겨냥해 질문을 던진 뒤, 억지로 답변해야 하는 분위기를 개그 코드로 삼는다. MC의 표정은 게스트의 대답을 논란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쌍심지를 켜고 있는 사회를 압축한다.

‘나락퀴즈쇼’의 게스트가 말왕이나 김계란, 충주맨처럼 얼굴이 알려진 연반인(연예인과 일반인 경계에 있는 유명인)이거나 인플루언서인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아이돌이나 영화배우가 나락으로 가면 그들이 출연한 광고나 영화에 수십억 원의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 그들의 책임이 막대하기에 웃을 수 없다. 반면 연반인과 인플루언서는 거대 자본과 거리가 멀지만 인기는 높다. 나락에 가더라도 연예인처럼 망할 일이 없다. 나락에 갈 만한 대답을 해도 그저 웃어넘길 수 있다. 이처럼 ‘나락퀴즈쇼’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숨구멍을 틔워주며, 나락에 가도 괜찮다는 위로를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

#피식대학 #나락퀴즈쇼 #여성동아

사진출처 유튜브 피식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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