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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 최고의 럭셔리가 된 이유

오한별 객원기자

2026. 05. 08

파편화된 정보와 도파민이 넘치는 요즘, 대중문화는 지식의 깊이를
가장 탐스러운 미학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사유하는 즐거움은 어떻게
이 시대의 새로운 사치가 됐을까.

고전문학에 대한 깊은 경의를 담아 탄생한 ‘디올 북 커버 컬렉션’(위).영국 작가 제이디 스미스를 캠페인 모델로 기용한 보테가베네타.

고전문학에 대한 깊은 경의를 담아 탄생한 ‘디올 북 커버 컬렉션’(위).영국 작가 제이디 스미스를 캠페인 모델로 기용한 보테가베네타.

지난 2024년 패션계와 SNS를 달궜던 ‘북 시크(Book Chic)’ 열풍을 기억하는가. 안경을 쓰고 두꺼운 고전 소설책을 한 손에 든 모습이 가장 세련된 스타일로 통용되던 이 트렌드는 팝 스타 두아 리파의 온라인 문학 살롱 ‘Service95’와 모델 카이아 거버의 북 클럽 ‘Library Science’, 미우미우의 ‘문학 클럽’을 통해 유행 그 이상의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이들의 행보는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쿨할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증명하며 대중문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해 들어 이러한 흐름은 시각적 스타일을 넘어 더 깊고 넓은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짧은 영상과 자극적인 밈이 열광받는 시대에 아이러니하게도 지식을 갈망하는 트렌드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패션 하우스들은 책을 소품으로 활용하는 단계를 지나 문학적 사유 자체를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 대표적으로 디올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에 의해 하우스의 상징인 ‘디올 북 커버 컬렉션’을 새롭게 재해석했다. 고전문학에 대한 깊은 경의를 담아 탄생한 이 가방은 19세기와 20세기 소설의 초판 표지를 정교한 자수로 구현해냈으며, 로고 대신 문학적 서사를 전면에 내세우며 ‘지식은 곧 권위’라는 메시지를 시각화했다.

코치는 실제 읽을 수 있는 페이지가 담긴 정교한 ‘미니 북 백참’ 시리즈를 선보였다. 배우 엘르 패닝이 가방에 달고 나온 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 미니 북은 지적 취향을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표식이 됐다. 보테가베네타 역시 영국 작가 제이디 스미스를 캠페인 모델로 기용하며 아름다움의 기준을 지적인 오라로 옮겨놓았다. 이는 명품이 더 이상 부의 과시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북 시크, 텍스트 힙 트렌드를 유행시킨 모델 카이아 거버(왼쪽)와 팝 스타 두아리파.

북 시크, 텍스트 힙 트렌드를 유행시킨 모델 카이아 거버(왼쪽)와 팝 스타 두아리파.

되풀이되는 고전, 시대의 결핍을 채워

최근 영화계가 이미 수없이 변주된 고전 서사를 다시금 소환하는 현상 역시 주목할 만하다. 19세기 고전 소설 ‘폭풍의 언덕’은 2011년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에 의해 한 차례 감각적으로 재해석된 데 이어, 2026년에는 마고 로비와 제이콥 엘로디 주연의 리메이크로 다시 한번 스크린에 올랐다. ‘오만과 편견’ 역시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됐음에도, 차세대 배우들을 앞세워 넷플릭스를 통해 새로운 영화로 다시 선보일 예정이다. 여기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원작으로 한 영화 ‘오디세이’를 제작하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메리 셸리의 1818년 소설을 각색한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이토록 익숙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리메이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휘발성 콘텐츠가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진리와 탄탄한 서사에 대한 대중의 갈증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인간 본연의 고뇌와 철학적 사유를 검증된 고전 텍스트를 통해 충족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2026년 마고 로비와 제이콥 엘로디 주연의 리메이크로 재탄생한 ‘폭풍의 언덕’(왼쪽)과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재해석한 ‘오디세이’.

2026년 마고 로비와 제이콥 엘로디 주연의 리메이크로 재탄생한 ‘폭풍의 언덕’(왼쪽)과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재해석한 ‘오디세이’.

지적인 대화로 입덕하는 세계

이러한 지적 열망은 유튜브와 팟캐스트라는 디지털 바다에서 정교한 취향의 형태로 변주되고 있는 분위기다. 최근 구독자 69만 명을 돌파한 토스의 유튜브 채널 ‘머니그라피’는 그 선두에 서 있다. ‘B주류경제학’ ‘B주류초대석’ 등 취향 기반 소비를 대화로 풀어내는 이들의 방식은, 지식이 더 이상 지루한 공부가 아닌 세상을 읽는 가장 힙한 창문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 채널은 누적 조회수 1억1500만 회를 기록했다.

전문적인 지식을 비디오 팟캐스트로 풀어내는 ‘보다’의 약진도 눈여겨볼 만하다. 역사, 과학, 철학 전문가들이 나누는 가공되지 않은 대화는 지적 몰입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특히 3시간에 달하는 ‘과학 ASMR’ 영상이 조회수 370만 회를 돌파한 현상은, 자극적인 숏폼의 홍수 속에서도 대중이 깊이 있는 탐구에 기꺼이 시간을 할애할 준비가 됐음을 시사한다.

출판계에서는 민음사TV가 독서의 지루한 이미지를 친근한 ‘덕질’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민음사TV는 매년 노벨문학상 발표 시즌에 맞춰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며, 해외문학팀 편집자들이 후보를 예측하고 수상 과정을 함께 지켜보는 콘텐츠를 선보인다. 특히 2024년 한강 작가 수상 당시, 현장의 반응과 함께 노벨문학상 관련 지식을 풀어낸 영상이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편집자들이 출연해 한 권의 책을 두고 자유롭게 사유를 나누는 단순한 구성임에도, ‘옥장판 대신 책을 파는 일타강사’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1 역사, 과학, 철학 등 전문 지식을 가공되지 않은 대화 형태의 비디오 팟캐스트로 풀어내는 유튜브 채널 ‘보다’. 2 취향 기반 소비를 다루며 지식을 힙한 문화로 정착시킨 토스의 ‘머니그라피. 3 패션계 거물들의 내면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탐구하는 팟캐스트 ‘패션 뉴로시스’.

1 역사, 과학, 철학 등 전문 지식을 가공되지 않은 대화 형태의 비디오 팟캐스트로 풀어내는 유튜브 채널 ‘보다’. 2 취향 기반 소비를 다루며 지식을 힙한 문화로 정착시킨 토스의 ‘머니그라피. 3 패션계 거물들의 내면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탐구하는 팟캐스트 ‘패션 뉴로시스’.

심리학과 패션을 결합한 벨라 프로이트의 팟캐스트 ‘패션 뉴로시스’도 화제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증손녀인 그는 조나단 앤더슨, 릭 오웬스 등 패션계 거물들의 내면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파고든다. ‘옷은 자아를 표현하는 언어’라는 프로이트의 철학은 패션을 단순 소비재가 아닌 깊은 사유의 대상으로 격상시켰다. 

최근 틱톡과 레딧을 휩쓴 ‘지독하게 박식한(Disgustingly Educated)’ 트렌드는 도파민에 절인 현대인의 뇌가 보내는 간절한 구조 신호다. 고도의 집중력과 긴 시간을 요하는 ‘몰입’이라는 영양분을 갈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지성이 최고의 사치로 추앙받는 이유는 찰나의 쾌락 대신 고독한 사유를 선택하는 행위 자체가 고차원적인 자기 통제의 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지성을 탐하는 이유는 도파민의 노예가 아닌 사유의 주인으로 살아가겠다는 변화가 아닐까.

#북시크 #문학클럽 #두아리파 #여성동아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출처 유튜브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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