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태규가 연기한 일회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인물이다. 일회는 빚을 피해 아내 효연, 아들 동호와 떠돌이 생활을 한다. 그는 사채업자들의 자동차와 비슷한 차종만 봐도 숨고, 아들의 대학 등록금으로 빚 갚을 생각만 하는 철없는 아빠다. 봉태규는 ‘고당도’에서 일회로 분해 섬세한 감정 연기를 펼쳤다. 주인공으로서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으며 가족 간의 달콤 떨떠름한 순간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고당도’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밸런스를 갖춘 영화다. 유머 있는 대사와 엉뚱한 상황을 보며 웃다가도, 어느 순간 가족의 누군가가 떠오르며 마음이 먹먹해진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봉태규는 “삶에 밀착한 연기를 보이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모니터를 보며 ‘더럽게 못생기게 나오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며 “비주얼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연기에만 집중한 작품”이라고 전했다.
“못생긴 얼굴 전혀 신경 안 썼어요”
2013년에 개봉한 ‘미나문방구’ 이후 첫 영화예요.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요.제가 아내와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어요(봉태규는 사진작가 하시시박과 2015년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처음 장인어른을 뵐 때 아내가 저를 영화배우로 소개했는데, 그간 배우로서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어요. 아내가 영화를 전공해서인지 장인, 장모님도 영화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시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찍으면 두 분을 꼭 시사회에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드디어 10년 만에 그 바람을 이뤘네요. 이 작품으로 이룰 건 다 이룬 것 같아요. 드디어 면이 선 거죠(웃음).
‘고당도’를 본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드라마 ‘펜트하우스’ ‘판도라 : 조작된 낙원’ 등에서 개성 있는 역할을 맡다 보니 이후 연기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고당도’가 그 변화의 시작점으로 적합할지, 어떤 연기를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요. 영화를 본 아내는 “고민이 무색하게 너무 좋은 결과가 나왔다”며 기뻐하더라고요. 아내의 응원이 큰 힘이 됐어요. 장인어른도 진지하게 영화를 관람해주셨고요. 장인어른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셨더라고요. “몰입도가 굉장히 높았다”며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해주셨어요.
스크린 복귀작으로 ‘고당도’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고당도’의 권용재 감독은 단편영화 ‘어느 날 아들이 새우가 되었다’에서 처음 만났어요. 당시 권 감독은 이 영화의 PD였는데, 현장을 파악해서 조율하고 예민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어가는 역할을 했죠. 그 모습을 보며 권 감독에 대한 믿음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이라면 연출도 잘하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런데 마지막 촬영 후 회식 자리에서 권 감독이 저를 찾아와 “장편영화를 준비 중인데 시나리오를 드려도 되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너무 좋다. 보내달라”고 대답했죠. 그 후 2개월 뒤인 2023년 추석에 ‘고당도’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그러곤 2시간 30분 만에 출연을 수락했어요. 가짜 장례식을 치른다는 설정이 너무 재밌었거든요. 장례라는 엄숙함을 블랙코미디로 연출한 점도 매력적이었고요. 이 작품이라면 대중에게 새로운 얼굴과 연기를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고등학생의 아버지 역할은 처음이라고요. 감정 이입이 어렵진 않던가요.
전혀요. 오히려 제가 연기한 ‘일회’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느꼈어요. 저는 20대 때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좋은 작품도 많이 하고 중심 배우로 활약했으니까요. 하지만 이후에 작품이 꼬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공백기가 찾아왔어요. 또 그 시기에 영화 제작 편수가 줄어들면서 제 이름도 자연스럽게 잊혔고요. 결혼 당시에도 생활이 녹록하진 못했어요. 매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했으니까요. 시나리오를 읽는데 그때 제 모습이 떠오르더라고요. 일회의 심정이 너무 이해가 됐죠. 그래서인지 연기할 때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일회라는 인물을 어떻게 표현하려 했나요.
일회 캐릭터를 연기할수록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저희가 3남매인데, 당시 부모님이 빚을 많이 져서 모두를 돌보지 못하셨어요. 그때 부모님은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바들바들 떨고 계셨던 것 같아요. 어떻게든 당시의 상황을 버텨내려고요.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자식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려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전의를 상실하고 무기력한 모습이었죠. 그걸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드라마 ‘펜트하우스’에서 연기한 철부지 이규진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예요.
‘펜트하우스’에서는 감정의 극한을 표현했어요. 무대 연기처럼 판을 휘젓는 연기를 했죠. 톤 자체가 화를 내면서 시작하거든요(웃음). 이에 반해 ‘고당도’는 힘을 뺀 연기가 주를 이뤄요. 삶에 밀착하다 못해 찐득찐득한 느낌이죠. 그래서 주근깨 분장을 하고 메이크업도 일절 하지 않았어요. 제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죠. 당시의 장면과 순간의 감정에만 몰입하고 싶어 모니터도 거의 안 봤어요.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감독님과 동료 배우들 덕분에 잘 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강말금 배우와의 케미는 어땠나요.
더할 나위 없었죠. 강말금 누나 덕분에 일회에 더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거든요. 말금 누나는 정확하고 섬세한 연기를 하는 배우예요. 장면을 파악하고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도 탁월하죠. 연기는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협업이자 앙상블이라고 생각해요. 가끔 배우들이 의견을 내야 할 때 말금 누나가 조율자의 역할을 해줬어요. 마지막 장례식 장면에서는 말금 누나와 깊고 진한 감정을 교류했던 것 같아요. 서로 공을 주고받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호흡이 잘 맞았거든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통하는 ‘앙상블’을 그 장면에서 실감했던 것 같아요. 리더로서 전체의 분위기와 톤을 조정해주고 팀워크도 단단하게 만들어줘서 너무 고마워요.


‘고당도’는 아버지의 부의금으로 일회(봉태규) 아들(정준범)의 의대 등록금을 마련하려는 가족의 가짜 장례 비즈니스를 그렸다.
새로운 도전이자 스스로를 확인하는 시간

영화 ‘고당도’ 포스터.
스크린 공백기만 12년이에요. 이 시간이 태규 씨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결혼, 육아 등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제작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배우로서의 공백기를 갖기도 했고요. 당시에는 정신적으로도 견뎌내기 힘들었어요. 주변에서는 “엄청난 주목을 받다 실패한 뒤 다시 일어나는 건 힘들다”고 이야기했죠. 하지만 다행히 시간은 흐르더라고요. 결과적으로 잘 버텨냈다고 생각해요.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간 느끼지 못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심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서두르지 않게 됐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연기의 방향에 대해 깊이 고민도 했고요. 마음이 더 단단해진 것 같아요.
연기를 할 때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나요.
예전에는 감정을 쏟아붓는 신을 찍으면 그 감정이 마음에 남아 괴로웠어요. 스스로 온오프가 명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연기와 일상을 구분하지 못했던 거죠. 그러다 연기를 온전히 직업으로 받아들이니 현장이 즐겁더라고요. 결혼하고 아이들이 생기면서 감정 컨트롤이 더 잘되는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면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요. 그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매일 경험하니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생긴 듯해요. 현장 도착해서 “선배님, 우셔야 해요” 하면 바로 눈물이 나요(웃음). 울고 나면 당시의 감정이 모두 소진돼 여운이 남지도 않고요. 지금은 아주 행복하게 현장을 즐기며 연기하고 있어요.
일상의 감정이 연기로도 이어지나요.
저에게 연기는 일상의 연장선이나 다름없어요. 일상에서의 삶의 태도가 성실해야 좋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일상에서 축적해놓은 좋은 감정과 영감이 연기로 이어진다고 믿어요. 그래서 매일 좋은 기분으로 밀도 있게 보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배우 이외에도 MC, DJ, 작가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저는 스스로를 연예인으로 규정해요. 제가 연기 활동을 왕성하게 할 때 사람들이 “봉태규는 연기만 해야 한다”고 했었어요(웃음). 하지만 2012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글을 썼고, 책 3권을 출간하며 상도 받았어요. 저는 대중에게 다양한 이미지를 끊임없이 보여줘야 하는 사람이에요. ‘말을 잘하는 사람’ ‘재미있는 사람’ ‘글을 잘 쓰는 사람’ 같은 평가도 예능, 라디오 등 여러 활동을 통해 얻게 됐고요. 그래서 지금 예능 ‘돌아온 방구석1열’ MC도, 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봉태규입니다’를 비롯해 SNS와 유튜브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저를 한 가지 직업에만 국한하고 싶지 않거든요. 다양한 활동과 경험이 연기에도 큰 도움이 되고요.
‘고당도’의 관람 포인트를 소개해준다면요.
‘영화적’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상상하지 못한 찰나를 화면에 펼쳐내는 종합예술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고당도’는 영화적인 콘텐츠라고 확신합니다. 신선함과 재미, 오락까지 동반하거든요. 무엇보다 ‘즐거움을 주는 영화’라는 점에서는 자신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고당도’와 같은 영화들이 예산이나 스케일에 구애받지 않고 꾸준히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고요.
차기작은 정해졌나요.
아직 공개할 순 없지만, 진짜 죽여주는 작품이에요(웃음). 독립 장편영화로 현재 촬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어요. 매년 한 작품씩 하는 게 목표인데, 2026년에는 이 영화로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봉태규 #고당도 #여성동아
사진제공 (주)트리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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