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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명품백 시제품 만들며 익힌 감각으로 물성 좋은 가방 만들어요”

피렌체 프로토피스트 출신 김새봄 마키니스트 대표

이혜진 객원기자

2025. 07. 29

프랑스 명품 브랜드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온 김새봄 대표. 손끝의 감각을 설계로 이어온 그가 한국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브랜드를 시작했다. 가죽 가방 ‘마키니스트’는 디자인보다 제작이 먼저인, 조금은 다른 철학을 가진 브랜드다.

서울시립대 인근 조용한 골목 안, 낮은 테이블 위에 전시된 가방이 눈길을 끈다. 단단한 가죽의 결, 절제된 봉제선, 손에 감기는 묵직한 촉감. 그 안에는 한 명의 제작자가 오랜 시간 몸으로 익혀온 감각이 담겨 있다.

김새봄 대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의 프로토타입(시제품)을 직접 만들어온 프로토티피스타(Prototipista) 출신이다. 피렌체의 가죽 공방에서 지방시, 버버리, 메종마르지엘라, 알렉산더맥퀸 등 세계적인 브랜드의 샘플을 제작하며 재료의 감촉을 읽는 손끝과 구조를 계산하는 눈을 동시에 길렀다. 한국인 최초로 그 자리에 오른 그는 이제 한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브랜드 ‘마키니스트(Macchinist)’를 운영 중이다.

마키니스트는 단순한 디자이너 브랜드가 아니다. 김 대표는 “디자인은 형태가 아니라 손맛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쓰임과 구조, 촉감까지 고려한 설계는 곧 그만의 언어이자 브랜드의 철학이다. 피렌체 장인의 손을 통해 배운 정밀한 감각과 제작자의 고집, 그리고 삶을 담는 오브제로서의 가방. 김 대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모든 것을 묶어낸다.

“라 마니에라 주스타(la maniera giusta),
너만의 방식으로 만들어”

이탈리아 장인이 건넨 한마디는 김 대표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김새봄 대표만의 방식으로 설계된 손맛이 느껴지는 가방 브랜드 마키니스트. 지금부터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가방’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유학을 떠난 계기가 궁금해요.



평범한 직장 생활에 큰 불만은 없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이 흘러도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감각이나 능력이 바래지지 않는 일을 고민하다 보니,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내는 일이 마음에 남더라고요.

결국 진지하게 고민하고 전세금과 퇴직금을 정리해 피렌체로 유학을 떠났어요. 떠나기 전부터 가죽에 대한 공부도 시작했고요. 사전 답사도 여러 번 하면서 꼼꼼히 유학을 준비했어요. 돌이켜보면 패션이나 유행을 잘 모르던 어릴 때부터 유독 가방이나 상자, 통처럼 ‘무언가를 담는 물건’에 끌렸던 것 같아요. 크기와 형태 안에 서사가 담기고, 쓰임에 따라 물건이 채워지는 구조가 참 좋았어요.

소풍을 가는 아이의 가방엔 도시락과 과자가, 모험을 떠나는 여행자의 가방엔 지도와 손전등이 들어 있잖아요. 저는 그런 ‘이동하는 작은 공간’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늘 흥미로웠어요. 삶의 방식, 취향, 목적이 고스란히 그 안에 담기니까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가방이라는 존재에 이끌렸고, 지금은 너무 좋아하던 걸 직접 만들 수 있게 된 것을 두고 “저는 성덕이 됐어요”라고 표현하고 싶네요(웃음).

피렌체 현지에서 취업까지 이어지게 된 과정도 들려주세요.

유학을 결심했을 때부터 저는 해답을 피렌체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명품 브랜드 제품도 여러 개 갖고 있었는데, 단순히 가죽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 브랜드에서만 느껴지는 묘한 ‘손맛’이 참 좋았거든요. 전 그 손맛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는 것인지 현지에 가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학교를 다니며 전통 방식의 가죽 가방 제작을 배우고, 패턴이나 구조, 기술적인 부분을 익혔지만 여전히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았어요. 저는 럭셔리 브랜드가 어떻게 물건을 만드는지, 현장의 제작 방식이 궁금했거든요. 그래서 결심했죠. ‘공장이라도 들어가 보자’고요. 취업할 곳을 알아보다 피렌체 가방 산업에서 프로토타입을 전문으로 만드는 회사를 알게 됐고, 운이 좋게도 이력서를 넣자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저는 ‘프로토티피스타’라는 이름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필요와 물성이 담긴 마키니스트 제오백

필요와 물성이 담긴 마키니스트 제오백

프로토티피스타라는 직무는 다소 생소한데요. 어떤 역할을 하는 직업인가요.

쉽게 말해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실제 가방으로 구현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디자이너가 머릿속에 그린 스케치를 가죽이라는 재료로 3차원 입체 형태로 처음 만들어내는 사람, 바로 그 ‘첫 번째 가방’을 만드는 일을 하죠. 프로토티피스타는 ‘프로토타입, 샘플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이해하시면 쉬워요.

프로토티피스타가 만든 첫 번째 가방은 ‘마스터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이후 생산될 모든 가방의 기준이 돼요. 한마디로 공장에서 나올 수백 개의 가방이 따라야 할 ‘기준 모델’을 만드는 거죠. 그렇다 보니 저의 작법이 그대로 양산 과정에 적용되기 때문에 부담감도 크지만, 그만큼 재미와 보람도 커요. 겉으로는 단순한 ‘샘플 제작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론 디자인의 해석부터 구조 설계, 기능, 생산 효율까지 모두 고려하는 종합적인 역할을 해요. 저는 이 일이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디자인을 완성하는 또 다른 감각의 제작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공방에서의 첫 경험은 어땠나요. 그곳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들려주세요.

수십 년을 일한 장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신입인 나에게 가방 하나를 온전히 만들어볼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원서를 냈었어요. 그래서인지 면접을 보는 순간만큼은 제가 가진 열정과 능력을 모두 보여주고 싶었죠. 보통 프로토티피스타 면접은 참여한 프로젝트나 기술을 뽐내면 되는데, 저는 제가 직접 만든 가방들과 그동안 쌓아온 생각들을 포트폴리오로 정리해서 준비했죠. 심지어 제가 만든 가방을 들고 가 대표에게 보여드리기도 했어요. 그 진심이 통했던 걸까요. 면접을 보고 난 후, 회사를 구경시켜줄 테니 한 번 들르라는 연락이 왔어요. 마침 바캉스 기간이라 그곳 직원들은 거의 없었고, 공방에는 대표와 저의 사수가 될 30년 경력의 장인 ‘비토’ 단 두 사람만 있었어요. 비토는 제 사수가 되어 칼을 쥐는 법부터 기초 하나하나를 가르쳐줬어요. 제가 궁금해하는 부분은 뭐든 차분히 설명해줬고,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여줬어요.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시간이 아니라 제 안에 잠들어 있던 ‘제작자의 감각’이 깨어나는 시간이었죠. 그 몇 달이 제 인생에서 가장 밀도 있게 성장한 시기였고, 비토가 회사를 떠나던 날 저는 엉엉 울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방 하나를 온전히 제작할 기회가 저에게 주어졌어요.

오랜 시간 프로토티피스타로 일하셨잖아요. ‘이제는 내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브랜드를 만든다는 건 단순히 가방을 제작하는 것을 넘어 디자인까지 스스로 하겠다는 결심이잖아요. 저 역시 그 결심이 쉽게 선 건 아니었어요. 결정적인 계기는 40년 경력의 베테랑 마우리치오라는 기술총괄과의 대화에서 비롯됐어요. 

어느 날 난이도 높은 가방을 다른 팀원과 함께 만들게 됐는데, 제작 방식에 대해 의견 차이가 생겼어요. 저는 경력이 많은 시니어 팀원의 방식이 도리어 비효율적이라고 느껴졌고, 그때 마우리치오에게 제 방식대로 밀고 나가도 될지 조심스레 물어봤어요. 그는 망설임 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찾아낸 ‘라 마니에라 주스타’, 그러니까 네 방식대로 너만의 옳은 길을 가”라고 말했어요. 그 말이 저에게는 하나의 전환점이 됐어요. 저는 늘 제 방식대로 만든다는 것에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날 마우리치오의 말로 인해 ‘이제 나만의 방식으로 해봐야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게 제 브랜드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됐어요.

가죽 가장자리를 얇게 깎는 과정

가죽 가장자리를 얇게 깎는 과정

재단사 티치아노와 김새봄 대표.

재단사 티치아노와 김새봄 대표.

‘마노’ 좋은 가방이 진짜 명품

마키니스트는 어떤 브랜드인가요.

‘마키니스트(Macchinist)’는 이탈리아어 마키니스타(macchinista)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재봉틀을 다루는 사람’, 즉 재봉사를 뜻하죠. 재봉틀은 이탈리아어로 마키나(macchina), 영어로는 머신(machine), 기계라는 뜻도 있어요. 저는 이 이름에 ‘현대적인 제작 방식과 장인정신은 공존할 수 있다’는 신념을 담았어요. 기계를 사용한다고 덜 정성스럽거나 덜 아름다운 건 아니잖아요. 마키니스트는 미적인 아름다움은 물론, 기술과 감각이 조화를 이루는 장인정신이 깃든 완성도 높은 가방을 만드는 브랜드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프로토티피스타가 직접 가방을 디자인할 때, 디자이너와는 무엇이 다르죠.

가장 큰 차이는 ‘손맛’이라고 할 수 있어요. 디자이너는 머릿속에 이상적인 형태를 그려내지만, 프로토티피스타는 그 디자인을 실제 가방으로 구현하면서 손에 닿는 순간까지를 고려해요. 업계에서는 이걸 ‘마노(mano)’라고 부르는데, 단순한 촉감이 아니라 형태와 질감, 무게, 탄성까지 아우르는 감각을 말해요.

가방의 손맛이라고 하면 흔히 가죽의 질감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더 복합적이에요. 어떤 보강재를 쓰느냐, 어디에 얼마나 쓰느냐, 접착제를 얼마나 바르느냐에 따라서도 손맛은 달라져요. 저는 디자이너이자 프로토티피스타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구현 가능한 손맛을 염두에 두고 가방을 설계해요. 사용성과 내구성, 아름다움 사이의 균형을 제가 직접 조율할 수 있는 거죠. 디자인만 하는 사람은 자칫 어느 한 요소에 치우칠 수 있는데, 저는 무겁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은, 형태가 아름다운 가방을 만들 수 있어요. 마키니스트의 가방이 겉보기엔 소박하지만 자세히 보면 빈틈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 균형에 있다고 생각해요.

제작 과정에서 한국과 이탈리아의 방식 차이로 인해 어려움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특히 공장과의 협업에서 시행착오도 있었을 텐데요.

정말 많았어요. 이탈리아에선 프로토티피스타가 가방의 작법을 세세히 설계하면 그걸 충실히 구현하려고 해요. 그런데 한국은 조금 달랐어요. 공장마다 자신들만의 제작 방식이 이미 정해져 있고, 외부에서 누군가 ‘이렇게 만들어달라’고 하면 불편해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제안이 아니라 간섭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랄까요. ‘네가 뭔데 나를 가르쳐?’라는 식의 반응을 들은 적도 있었어요. 

마키니스트는 여러 겹의 보강재를 사용하는데, 일반적인 공정보다는 복잡하고 수가 많아요. 그래서 제가 설계한 구조를 의뢰해도 막상 완성된 샘플을 뜯어보면 그대로 구현된 적이 드물었어요. 제작 방식을 이해받지 못하면 완성도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전량 폐기한 적도 있었죠. 결국 제작 방식에 공감하고 긴 호흡으로 함께할 수 있는 거래처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했어요. 지금은 그 과정을 설득으로 풀어나가면서 제 방식을 응원해주시는 파트너와 함께하고 있어요. 이제는 거꾸로 저에게 제작 아이디어를 제안해주시기도 해요. 

마키니스트를 통해 새로 시도해보고 싶은 방식이 있을까요.

제작 방식에 있어선 늘 새로운 시도를 염두에 두고 있어요. 아직은 작은 브랜드이기 때문에 가방에 집중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제가 직접 설계한 작법을 피렌체의 산업 클러스터 안에서 구현해보고 싶다는 목표가 있어요. 그곳은 정말 섬세한 제작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서 제가 떠올리는 디테일을 100% 실현할 수 있거든요.

국내에서도 가능한 건 최대한 시도하고 있지만, 피렌체에서만 구현 가능한 방식은 아직 아껴두고 있어요. 언젠가는 그곳에서 마키니스트 제품이 제작되기를 바라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에도 피렌체처럼 제작자가 중심이 되는 클러스터가 생겼으면 해요. 디자이너 중심이 아닌 ‘제작자’라는 이름이 당당하게 불릴 수 있는 환경이요. 우리에겐 아직 프로토티피스타처럼 제작자를 높여 부르는 말도 없는 상황이잖아요. 마키니스트는 그 변화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마키니스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고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싶다랄까요.

마키니스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필요’와 ‘물성’이에요. 가방은 단순히 예쁜 물건이 아니라 무언가를 담고 옮기는 도구이자 삶의 한 장면을 함께하는 물건이잖아요. 그래서 마키니스트는 장식에 치우치지 않고 실제로 쓰임이 좋은 가방을 만들고자 해요. 디자인뿐 아니라 손이 자주 닿는 부분의 내구성도 꼼꼼히 챙기고요.

가죽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어요. ‘에이징’이라고 하죠. 마키니스트 가방도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사용자의 손과 몸에 맞게 변해가길 바라요. 한번은 고객의 가방을 수선하면서 그간 가방이 많이 사랑받았다는 걸 느낀 적이 있었어요. 손때가 묻고, 마노(손맛)가 깊어진 그 가방은 다시 수리돼 오래 쓰일 수 있겠죠. 저는 그래서 ‘자주 손이 가는 가방이면서 오래 들 수도 있는 가방’을 만들고 싶어요. 자주 쓰여 그 사람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물건, 그것이 마키니스트가 추구하는 가방의 가치예요.

마지막으로, 브랜드가 어떤 이름으로 기억되길 바라나요.

마키니스트는 디자이너 백이라기보다는 ‘제작자의 가방’이에요. 저는 유행을 좇는 소비재로서의 가방이 아닌 실용성과 감각, 디테일을 두루 갖춘 가방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고객들이 마키니스트를 고민 없이 선택해도 될 만큼 믿을 수 있는 브랜드가 되길 바라요. 가방을 좋아해서 만드는 사람으로서, 마키니스트가 사용하는 사람에게 오래 남는 브랜드였으면 해요. 예쁜 가방 그 이상, 생활 속에서 자주 손이 가고 시간이 지나도 아쉬움 없이 다시 찾게 되는 브랜드로 말이죠. 그렇게 진심이 닿는 제작자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마키니스트 #프로토티피스타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사진 제공 김새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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