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기 9단 ‘승부’ 이병헌
“어쩔 수 없지. 이건 승부니까.”‘연기의 신’으로 불리는 이병헌(55)이 올봄 스크린에서 또다시 승부수를 띄운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대체 불가한 배우로 손꼽혀온 그가 영화 ‘승부’에서 국수(國手) 조훈현 9단 역할을 맡아 한국 바둑계에 가장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알려진 이창호 9단과의 대결을 그려냈다. 영화는 스승과 제자로 시작해 숙명의 라이벌이 된 두 천재 기사의 대결을 몰입감 있게 펼쳐냈다는 평을 받는다.
1991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이병헌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는 자타 공인 글로벌 톱스타다. 2009년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해 ‘레드: 더 레전드’(2013)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2015)에 출연하며 명성을 쌓았다. 2012년에는 아시아 배우 최초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거리에 있는 차이니스 극장 앞에 손바닥 도장을 남겼다. 최근에는 글로벌 흥행 신기록을 세운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1편과 2편에 출연했으며, 6월 오픈 예정인 3편에도 출연하는 등 쉼 없는 필모그래피를 보여주고 있다.
이병헌의 ‘연기 9단’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승부’는 개봉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작품이다. 2021년 촬영을 마치고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할 예정이었으나, 2023년 2월에 이창호 역할을 맡은 유아인이 마약 투약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으며 좌초 위기를 맞았었다. 이병헌이 영화관에 띄운 승부수가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을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그에게 물었다.

우여곡절 끝에 빛 본 승부
영화 개봉까지 부침이 많았어요.어떤 영화든 개봉할 때마다 떨리는 건 마찬가지예요. 특히 이번 작품은 우여곡절 끝에 개봉하게 돼 행복하고 신나는 기분입니다. 스크린을 통해 관객을 만날 수 있게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실존 인물인 국수 조훈현 9단을 연기하셨는데요.
역사적인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건 항상 부담스럽죠. 특히 조훈현 국수님은 현역으로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조 국수님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가 연기했던 드라마 ‘올인’의 김인하 역할도 차민수 포커 플레이어를 모티프로 했는데, 신기하게 두 분이 절친 사이시더라고요. 두 분의 가장 결정적인 승부를 제가 연기했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게 쉽지 않은 작업일 것 같아요.
실존 인물을 연기하면 그에게 의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연기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실제로 당사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눈빛과 표정, 버릇 등을 흡수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조훈현 국수님께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데, 그런 부분을 관찰했다가 이번 작품에서 연기할 때 활용하곤 했어요. 한편으로는 상상력 안에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며 마음껏 연기할 수 있는 부분이 제한적이라 연기가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더라고요.
조훈현 국수를 따라 한 분장과 의상도 화제가 됐어요.
촬영장에서 연기하기 직전에도 자료 화면을 보며 따라 하려고 노력했어요. 특히 이창호 선생님과의 대국 때 화제가 됐던 ‘와기’라고 불리는 반쯤 누워서 생각에 잠겨 있는 자세를 사진과 흡사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죠. 외모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분장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제 원래 눈썹은 살색으로 지우고 위로 향하게 눈썹을 다시 그렸죠. 조 국수님께서 시사회 관람 후 “이병헌 배우 나오는데 난 줄 알았어”라고 말씀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다행이었죠.
가장 가까운 제자에게 패했을 때의 감정을 연기하면서 신경 쓴 부분은요.
이 영화의 핵심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첫째는 아무래도 당혹스러움이겠죠. 조 국수님께서도 “질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런 상상조차 못 한 감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 조 국수님이 패배 후 기자들의 질문에 “더 이상 (이창호에게) 가르칠 것이 없네요”라고 답하셨는데, 그런 대답이 자연스럽게 진심으로 나올 수 있을지도 고민했어요. 허탈함에 당황스러움이 더해진 복잡한 감정으로 여러 번 연기했는데도 만족스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께 계속 다시 한번 더 찍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유아인에게 트로피 뺏겼을 때 감정으로 연기
실제로 이런 패배감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바둑은 승패가 명확히 갈리지만 연기는 그렇지 않거든요. 함께하는 동료가 뛰어난 연기를 해야 저도 함께 빛이 나죠. 굳이 따지자면 시상식에서 비슷한 감정이 든 적이 있었어요. ‘승부’에서 이창호와의 대국에 지고 거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청룡영화상 시상식 후에 촬영했어요. 당시 유아인 씨와 제가 함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유아인 씨가 수상을 했지요. 그래서 감독님께 “제가 전날 느꼈던 감정처럼 연기하면 되나요”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웃음).
후배들에게 스승처럼 연기를 가르쳐준 적이 있나요.
상대 배우가 역할의 매력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면 저에게 숙제가 생기는 느낌이긴 해요. 그래서 리허설을 계속하면서 상대의 매력을 끌어올리려고 합니다. 영 느낌이 안 올라오면 ‘이렇게 해!’라고 시키는 대신 제가 한번 그 앞에서 시연해보기도 하고요. 지시하듯 말로만 하면 월권이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같이 성장해야 저도 상승효과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바둑에는 원래 관심이 있었나요.
바둑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어요. 영화 출연을 결정한 후 바둑판을 사서 바둑알을 놓는 연습을 했죠. 다른 바둑알을 건들지 않고 바둑알을 판에 제대로 놓도록 손짓이 능숙해져야 했기 때문이에요. 집에서 아들에게 오목을 가르쳐주고 같이 두면서 연습했어요. 아들이 없을 때는 아내가 상대를 해주었고요. 간혹 장인어른이 도와주실 때도 있었어요.
영화를 본 후 아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제가 출연한 작품이 대부분 청소년 관람 불가라 초등학생 아들이 영화를 많이 보진 못했어요. 2024년 피렌체 한국영화제에서 상영을 했을 때 함께 가서 처음으로 ‘광해’를 봤고, 올해 개봉 25주년을 맞아 재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를 그다음에 봤습니다. ‘승부’는 세 번째로 본 영화인데, 아들이 매긴 순위 1등이 바로 ‘승부’였어요.
영화를 본 아내 이민정 배우의 반응은 어땠나요.
영화를 보면서 몇 번을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렇게 슬프게 연기한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극 중 제가 창호한테 야단칠 때와 창호가 떠나갈 때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다 제 연기 때문은 아니었어요(웃음).
앞서 제작보고회에서 장인어른이 이 작품에 남다른 기대감을 갖고 있다고 말하셨는데요. 영화를 본 후 장인어른의 반응은 어땠나요.
장인어른이 워낙 바둑 팬이시고, 조 국수님과 이 국수님의 대국이 있었던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오셨잖아요. 당시 동네의 분위기나 옷차림 등 정성스러운 고증이 인상 깊은 영화라고 평해주셨어요. 하지만 제 연기 칭찬은 안 해주시더라고요(웃음).
바둑 룰을 모르면 보기 힘든 영화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감독님과 출연진도 바둑 규칙을 잘 몰라요. 바둑 자체가 중요한 영화라면 출연을 고민했을 거예요. 바둑보다는 인생을 그린 영화로, 사제지간의 드라마틱한 승부에 초점을 두고 있어요. 사람 사는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작품 선택 기준이 궁금해요.
첫째는 저한테 주는 재미죠. 대중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면 좋겠지만 일단 저를 만족시켜야 출연을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캐릭터보다는 스토리에 더 초점을 두는 편이에요. 캐릭터는 출연을 결정한 후 제가 만들어나가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는 조 국수님을 주제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며 ‘이게 어떻게 실화일까’ 하면서 감탄했죠. 이야기 자체에 끌려서 이 작품은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연기 9단 이병헌
연기 9단 이병헌도 승부에서 쓴맛을 본 적이 있나요.저는 원래 충무로에서 캐스팅하면 안 되는 배우로 유명했어요. 충무로 데뷔작 이후 연속 네 작품을 소위 말아먹었죠. 당시 충무로에서는, 세 작품이 다 흥행에 실패하면 연기하면 안 되는 배우로 불리곤 했어요. 그런데 운이 좋게 다섯 번째 영화에도 캐스팅이 됐고, 그 작품이 ‘내 마음의 풍금’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공동경비구역 JSA’ ‘번지 점프를 하다’ 같은 흥행작을 만났어요. 누구나 승부에서 작고 큰 패배를 겪는 것이 인생 아닐까요. 저는 사실 승부사 기질이 전혀 없어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도 별로 없어요. 승부욕이 불타올랐을 때는 고등학교 시절 팔씨름하던 순간밖에 없었죠(웃음).
영화 작업을 유독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극장이라는 공간을 너무 좋아해요. 어렸을 때부터 저를 계속 극장에 데려가셨던 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노출 콘크리트 냄새, 오징어와 땅콩 구운 냄새, 스크린 아래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장면들. 이 모든 게 극장에 대한 향수로 남아 있어요. 이런 극장을 떠올리면 심장이 다시 콩닥콩닥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올해 개봉을 앞둔 영화 ‘어쩔수가없다’로 박찬욱 감독과 다시 만나 기대를 모으고 있어요.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박찬욱 감독님과 다시 만나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전혀 어색하거나 적응해야 할 시간이 따로 필요 없더라고요. 다만 요구하시는 사항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굉장히 힘든 작업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작업 자체가 너무 재미있게 이루어져서 굉장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촬영했던 25년 전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박찬욱 감독을 ‘수정 사항’이라고 불렀어요. 어떤 연기를 하면 너무 좋았다고 말씀하시면서도 4~5가지 수정 사항을 주시거든요. 그 다양한 수정 사항을 생각하면서 연기를 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연기하는 데 꽤 애를 먹었습니다.
최근 ‘짠한형’과 ‘핑계고’ 등 웹 예능에도 출연해 화제가 됐어요.
작품 홍보를 위해 출연했는데, 다소 허탈해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계속 작품에 대한 이야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제 이야기도 많이 해야 하는데, 저를 너무 많이 보여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짠한형’과 ‘핑계고’에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연하다 보니 말한 내용이 많이 겹치지는 않았을까,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또 웹 예능에서는 술도 마시고 말도 편하게 하니까, 너무 조심스럽지 않았던 건 아닐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제가 아는 시스템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방송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한편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병헌 #승부 #여성동아
사진제공 (주)바이포엠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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