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 미래에 관한 웃픈 우화, ‘미키 17’ 봉준호 감독
‘미키 17’은 제75회 베를린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갈라에 초청돼 월드 프리미어 시사회를 진행하는 등 개봉 전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다. 2월 28일 한국 개봉에 이어 3월 7일 북미에서 개봉해 주말 3일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영화의 오프닝 수익은 1910만 달러(약 277억4600만 원)다. 베이징 시사회를 거쳐 중국 전역에서 개봉돼 한한령 해제에 대한 기대감까지 북돋우는 등 전 세계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남기고 있다.
“계급투쟁 아닌, 미키의 성장영화로 봐주길”

‘미키17’ 포스터.
‘미키 17’의 한국 개봉을 앞두고 봉준호 감독을 만나 영화 제작 과정에서의 다양한 숨은 에피소드와 ‘기생충’ 수상 이후 근황 등을 들었다. 언제나 그랬듯 총 1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 동안 1분도 버릴 것 없이 자신의 창작 세계를 펼쳐내는 봉 감독의 입담은 흥미롭고 의미 있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전작 영화 ‘설국열차’ ‘기생충’ 등과 유사하게 ‘미키 17’에서도 계급 갈등이 주요 이슈로 등장한다. 봉 감독의 작품 속 거부할 수 없는 메인 테마라고 봐야 할까.
계급 문제라고 하니 거창하게 느껴진다. 주인공이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나. 일단 이 친구의 직업 자체가 죽는 일이다. 죽을 가능성이 높은 임무를 부여받고 죽기 좋은 현장에 투입된다. ‘미키 17’은 바꿔 말하면 앞서 16번 죽었다는 이야기다. 미키는 죽을 때마다 새롭게 프린트된다. 복제인간(클론)과 상당히 다르다. 프린트해서 서류 뽑듯 출력이 된다. 그 자체로 비인간적 아닌가. 극한 직업에, 극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 계층이라고 할까. 그래서 계급 문제도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영화가 계급투쟁을 다룬다거나 정치적 깃발을 들고 있지는 않다. ‘이 친구가 얼마나 불쌍한가’ 하는 측면에서 미키의 성장영화로 봐주시면 좋겠다.
온갖 고충을 겪고 비극을 맞는 기존 작품 속 주인공들과 달리 ‘미키 17’ 캐릭터에게는 좀 더 애정을 가진 느낌이 드는데.
돌이켜보니 그동안 내가 영화의 주인공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편이었더라. 현실의 쓰라린 모습을 풍자하고 보여주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한복판의 주인공들이 가혹한 상황에 내몰리는 경우가 많았던 거다. 직업이 죽는 것이니 미키를 둘러싼 상황도 가혹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극복하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미키라는 캐릭터가 착하고 ‘얼빵한’ 인물인데 로버트 패틴슨이 잘 소화해줬다. 측은하고 손해 보게 생긴 캐릭터인데, 사실 로버트 패틴슨 본인도 화를 못 내게 생기지 않았나. 그런 상태에서 미키 18이라는 똘끼 있는 친구가 나와 때려 부수기도 하니 좀 시원해진다. 또 여자 친구 나샤가 든든하게 옆에서 지켜주기에 이번 주인공은 파괴되지 않을 수 있었다. 내 영화 최초로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고 멜로영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엄연한 SF영화다.
봉준호 감독 필모그래피 속 최초 러브라인을 강조하는 모습이 재미있다. 원작과 차별화한 지점이 궁금한데.
독재자 마셜의 아내인 일파(토니 콜렛)는 원작 소설에는 없는 캐릭터다. 스티븐 연이 연기한 티모도 원작에서는 핫 스타처럼 나왔다. 스티븐 연의 연기로 미워할 수 없는 사기꾼 같은 인물로 탄생했다.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오고 싶었던 것은 미키와 나샤의 사랑 이야기 챕터였다. ‘미키가 나샤를 어떻게 지켜주는가’를 보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났다. 나샤가 마셜과 싸우는 장면에서 영국 시사회 때는 박수갈채가 나왔다. 아마 그 융단 폭격 같은 욕설 장면 때문에 R등급(청소년 관람 불가)을 받은 것 같다.
외계 생명체 크리퍼들의 시위 장면을 보면 마치 한국의 촛불 시위가 연상된다.
2021년에 시나리오를 썼고 한국의 대선 훨씬 전인 2022년 촬영했다. 크리퍼들이 왜 시위를 하는가 살펴보자. 크리퍼 집안의 이름이 다 ‘코’ 자 돌림이다(웃음). 결국 조코를 석방하라고 시위를 하는 거다. 인간 사회는 미키 한 명을 지목해 위험한 일을 이 한 명에게 몰아놓고 계속 죽게 한다. 그런데 반대편에서는 자신들의 생명체 하나를 구하려고 마마 크리퍼부터 모두가 모여 시위를 한다. 마셜이 추악하고 지질한 독재자라면 마마 크리퍼는 얼마나 훌륭한 리더인가. 동물 크리처를 등장시키는 것은 그들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한심한지를 재미있게 보여줄 수 있어서다.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케네스 마셜 사령관에 대해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연상시킨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는데.
한 영국 기자는 나에게 “봉 감독 집 뒷방에 (미래를 볼 수 있는) 크리스털 볼이 있냐”고 묻기도 했다(웃음). 이탈리아의 한 여기자는 독재자 무솔리니가 생각난다고도 했다. 마셜 캐릭터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은 건, (트럼프 대통령이 재임에 성공하기 전인) 2021년 시나리오를 다 쓰고 베니스영화제에 내가 심사위원을 하러 가면서 기분 좋게 시나리오 탈고 후 프로덕션에 넘겼다는 점이다. 제작 과정에선 옛날 한국과 미국의 정치인들 사진을 서로 많이 보여주면서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과거 개성 있고 재미있던 정치인들을 모델로 했다. 현역 정치인들이 아니다. 독재자들에게는 위험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대중을 휘어잡는 기묘한 애교나 귀여움을 지녔다. 마셜과 일파를 함께 둔 건 부부가 독재자일 때 효과가 더 극대화될 거라 봤기 때문이다. 부부 독재자가 일으키는 이상한 상승효과가 있지 않나. 처음 마크 러팔로에게 시나리오를 제안했을 때 그는 낯설어했다. 한 번도 악역을 해보지 않았다고 하더라. 내가 마크 러팔로에게 악역을 맡길 첫 기회가 왔다는 것이 신나고 영광스러웠다. 그리고 그가 너무 멋지게 잘해냈다.
“오스카상 수상 이후 캐스팅 쉬워졌을 뿐 달라진 것 없어”

세계 각국의 관객들은 미키 17’의 독재자 마셜 사령관에 대해 자신의 나라 정치인의 모습을 투영시킨다.
그녀에겐 소스가 문명의 리트머스 시험지인 거다. 일종의 허세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여러 행성에 다양한 원정대가 진출한다. 우주 식민지를 놓고 경쟁하는 느낌이 있다. 저녁을 함께 먹는 시퀀스에서 마셜의 대사에 ‘우리 식민지는 다르다. 고기도 리얼 고기이고 소스도 5~6가지가 깔린다’는 내용이 나온다. 미키 17은 작은 잘못을 저질러도 절반으로 줄어든 식량을 배식받는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마셜과 일파 부류들은 소스까지 중요시한다. 마치 ‘설국열차’ 속 앞 칸의 누군가 벌일 법한 행동 아닌가. 일파가 소스를 만드는 방을 보면 영화 전체의 룩과 다르다. 울긋불긋, 노랗고 화려한 컬러로 이뤄어졌다. 이들 부부가 어떤 사람들인지 단적으로 보여준 장치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2020년 영화 ‘기생충’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달성한 후 인생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캐스팅 단계가 수월했던 점 정도인 것 같다. 오스카상 수상 이후 생활 방식이 바뀐 건 없다. 다만 미국 배우들에게 내가 누구인지 전작을 설명할 필요도 없고 수월했다. 그래서 빠르게 캐스팅이 됐다. 작품을 제안할 때 설명하는 과정이 생략되더라. 다들 만나면 ‘기생충’ 이야기를 하고 자신들이 더 (내 작품을) 많이 봤다는 걸 강조했다. 로버트 패틴슨도 ‘살인의 추억’을 봤다는 걸 강조했다(웃음). 미키 17에게서 송강호 연기 느낌이 난다는 반응도 있었는데, 배우에게 ‘내 영화니까 이렇게 연기해야 한다’고 말한 건 없다. 한국적 연기 톤 이런 것도 강요하거나 부탁한 건 없다. 다만 그분들도 내 작품 톤을 대략 알지 않나. 미국에는 현장 편집이라는 개념이 없는데, 나와 작품을 하며 현장 편집의 맛을 알고 나니 토니 콜렛도 촬영 3주 지나서 “지난주 편집본을 볼 수 있겠니?” 하고 묻더라. SF영화에서 주인공 이마의 뾰루지를 터뜨리는 장면은 봉준호 영화라서 나오는 것 아닐까. 그런 것이 봉준호의 톤이었을 거라고 본다.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하는 미키17과 미키18. 모습은 똑같지만 성격이 다르다는 점도 관람 포인트 중 하나다.
BTS나 차범근, 김연아, 손흥민, 로제 같은 분들에게 ‘세계 제패를 했다’고 하면 맞는 소리겠지만 영화감독에게 어울리는 표현은 아닌 것 같다. 영화감독은 영화를 찍을 뿐, 이들처럼 기록을 경신하는 일을 하는 건 아니다. 나는 그냥 이상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기대되고 싶다. 어떤 환경이나 조건에 던져져도 이상한 톤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할리우드 관계자들도 내 작업물을 보면 이상하다고 하면서도 존중을 해주신다. ‘미키 17’도 따뜻하고 밝은 영화지만 이상한 구석도 많이 있다. 차기작은 ‘기생충’ 전부터 준비해온 애니메이션으로, 계속 준비 중이다. ‘어떤 상을 받았으니 다음에 이래야 해’라거나 ‘어떤 작품의 결과가 이러했으니 그다음에는 이렇게 해야 해’는 아닌 것 같다. 그저 진행돼오던 작업을 계속해나갈 따름이다. 영화가 아닌 시리즈 제안도 많이 받고 있는데, 내가 작품을 찍는 속도로 봤을 때는 도저히 (시리즈의) 속도를 만들어내기 어려울 것 같다. 아직까지 극장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조만간 한국 극장들이 다이내믹하게 작동될 거라고 낙관하고 있다. 곧 한국 영화로 찾아뵙겠다.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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