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영에 대한 글을 써보려다 놀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1952년 그가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서울변호사회 소속으로 개업한 후 1979년까지 여성 변호사는 단 한 명이었다. 1977년 여성 변호사 강기원이 개업했지만 같은 해 이태영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1979년까지 자격정지 3년형을 받았다. 최초의 여성 법관은 1954년에 임관한 판사 황윤석이다. 황윤석이 1961년 사망한 후 12년간 여성 법관이 없다가 1973년에야 여성 법관 3명이 임관했다.
한국 법조계는 남성들로만 이뤄진 성채였다. 이태영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그의 삶을 보더라도 당시 여성들이 법조계에 진출하는 건 쉽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이태영이 웅변대회에서 했다는 말처럼, 아들을 낳으면 온 동네가 기뻐하고 딸을 낳으면 어머니가 울었던 시대였다. 여성이 사회 진출을 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여성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다.
전기작가 윤해윤이 쓴 ‘이태영’은 이태영의 남다른 삶의 경로를 추적하고 있다. 이태영은 1914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금광에서 일하며 국경지대를 찾아온 독립투사들을 후원했는데, 이태영이 태어나고 1년 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개화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신여성이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하며 세 아이를 키워냈다. 열두 살 터울의 오빠는 서울에서 공부했다. 어린 이태영에게 변호사를 권할 정도로 든든한 오빠였다.
이태영은 평양에 있는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에 입학했다. 1936년 이화여전을 졸업한 이태영은 평양에 있는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를 시작했다. 이태영의 삶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1936년 정일형과의 결혼이다.
정일형은 이태영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정일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2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재미 유학생회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했던 정일형은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일하다 평양에 개척교회를 일궜다. 그는 교회에서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일깨우기 위한 강연회를 열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됐다.
1937년 정일형은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특별 강연회를 주최했다. 정일형은 이 강연회로 인해 일본 경찰에 연행됐고, 이후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합류했다. 이태영은 교사 월급으로 살림을 꾸리고 출산과 육아를 감당해야 했다. 살아가는 건 점점 어려워졌다. 큰아이를 병으로 잃었다. 일본 경찰은 걸핏하면 정일형을 잡아들여 고문을 자행했다. 정일형은 1941년 일본으로 피신했다 돌아왔는데 일본 헌병에 다시 체포됐다. 심문과 고문으로 이어진 구금 상태는 2년이나 계속됐다. 이태영까지 붙잡혀 들어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 시절 이태영에게 당장 닥친 것은 생활 문제였다. 식대와 약값까지, 옥바라지에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다. 게다가 당시 서울에서 교사로 있던 이태영은 정일형이 감금된 평양경찰서를 오가야 했다. 누비이불이 잘 팔린다는 소리를 듣고 이불 장사를 시작했다. 직접 이불을 만들고 집집을 다니며 팔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편이 나아져 가게를 내고 집을 사기도 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남편 정일형은 풀려났다. 정일형은 이제 짊어진 보따리를 바꿔 메자고 했다. 이듬해 이태영은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네 아이의 어머니이자 시어머니와 남편이 있는 가정주부였다. 이태영은 1949년 졸업했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그리고 1952년 제2회 고등고시에 합격했다.
당시 이태영의 합격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여성으로 처음인 데다가 서른아홉 살의 가정주부였으니 사람들 관심을 크게 끌 만한 일이었다. 이태영은 판사를 지원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여자가 판사가 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거부했다. 남편 정일형이 야당의 국회의원이었다는 점도 판사 임용을 막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탄생했다. 이태영은 변호사 사무실을 집에다 차렸다. 문을 열자마자 남편의 외도, 가정폭력, 불합리한 이혼 등으로 고통받던 여성들이 골목까지 줄을 섰다. 이태영은 마치 4000여 년이나 자신 같은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버림받고 서러움 많은 여성들이 줄지어 몰려왔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여성들은 법에 대한 무지와 취약한 경제 상황뿐 아니라 불합리한 법 자체로 고통받고 있었다. 일본 법을 그대로 가져와 1959년까지 쓰였던 구(舊)민법은 남녀의 평등한 권리를 침해하는 조항이 많았다. 아내가 법률행위를 할 때도 남편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태영은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를 차렸다. 재능 기부를 받아 무료 상담을 진행했고, 우편 상담, 전화 상담, 잡지 상담은 물론 라디오 상담까지 진행했다. ‘목요가족법강좌’를 열어 여성들에게 법률을 가르쳤고, ‘어머니학교’ 등에서 부부·고부·부모자식 관계에 대한 교육을 했다.
남성들이 독점해온 영역에 처음으로 진출한 여성들은 참 대단하다. 이를 혼자 돌파해내기란 정말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오랫동안 남성들로만 채워진 법조계에 처음으로 진출한 것만으로도 이태영은 이 나라의 여성들에게 절대 작지 않은 용기와 힘을 안겨줬다.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 이태영은 부와 권력을 누리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태영은 달랐다. 이 땅의 여성들과 같이 잘 살기로 마음먹었다. 법률가답게 이태영은 제도적 변화를 향해 나아갔다. 법을 바꾸는 일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법전편찬위원회가 구성돼 1954년 민법 초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헌법은 분명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규정했지만 민법의 친족과 상속 편은 여성 차별적 규정을 싣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남편의 전처소생이나 혼인외의출생자는 아내의 자식이 되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했다. 남편 쪽 친족 범위가 더 넓었고, 자녀의 친권 행사자는 아버지가 우선이고 어머니는 그다음이었다. 상속을 보면 딸의 호주 상속 순위가 최하위고 결혼한 딸은 상속에서 제외됐다. 아내의 상속분은 호주보다 적은데, 결국 아들이 어머니나 딸보다 상속에서 더 우위에 있었다. 2023년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규정이다.
이태영은 1952년 시보 연수 중 민법안에서 호주제가 계승되고 남녀 차별적 규정들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여성단체들을 모아 ‘여성단체연합’을 만들고 1953년 법전편찬위원회에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후에도 관계 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각종 집회, 방송, 강연을 펼쳤다.
1957년 대표 발의 정일형 의원 외 33명의 이름으로 민법 수정안이 제출됐다. 1958년 개정된 가족법에 이 수정안의 일부가 반영됐다. 이태영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여성단체들과 가족법 개정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가정법원 설치 정도의 성과만 거뒀다.
1973년 61개의 여성단체가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를 결성하고 10개 항의 개정 요강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태영은 가족법 개정안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개정안을 같이 준비했다. 이 개정안은 1975년 국회에 제출됐고, 1977년 일부 개정이 이뤄졌다. 이처럼 가족법은 더디게 바뀌어갔다. 동성동본 금혼에서 1979년 1년간 한시적으로 혼인신고와 자녀 입적 신고가 허용됐다. 가족법에서 남녀 차별을 지탱하는 호주제는 그동안의 노력에도 끄떡없었다.
이태영이 여성운동에만 나선 것은 아니었다. 1971년 당시 야당인 신민당에 입당했다. 1972년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독재가 시작됐다. 1976년 3·1절을 기념해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에서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됐다. 정일형은 이 사건으로 기소돼 의원직을 상실했고, 이태영은 3년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3·1민주선언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이태영은 ‘여성백인회관’ 건립을 추진했다. 건물을 짓다 돈이 모자라면 재판 중에도 돈을 구하러 다녔다. 상담소가 셋방살이로 떠돌았기에 독립된 건물을 짓는 건 이태영의 오랜 꿈이었다. 상담소를 돕던 ‘10인 클럽’과 ‘17인 클럽’이 지원했다. 처음에는 2000만 원이 있으면 집을 지을 것 같았다. 그래서 100명이 20만 원씩 모을 계산이었다. 하지만 5년에 걸쳐 모금했는데 건물 지을 땅을 사는 데 그쳤다.
1975년 이태영은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 공헌 등의 업적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이었다. 1만 달러의 상금으로 일단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어 한국에서 100명, 미국에서 100명 등 1700여 명의 정성이 모였다. 이태영과 100명의 회원이 직접 공사장에 가서 벽돌을 날랐다. 마침내 6층 높이의 건물을 지어냈다. 건물을 완성한 결과도 주목할 만하지만 건물을 올린 과정은 정말 대단했다.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될 때까지 하고야 마는 끈기다.
가족법 개정을 위한 이태영의 노력은 1980년대에도 계속됐다. 1984년에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주관 아래 41개 여성단체 대표의 발기로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단체 연합’이 결성됐다. 이태영이 회장이었다. 하지만 개정은 무산됐다. 가족법 개정의 핵심에는 동성동본불혼제와 호주제가 있었다. 유림들이 격렬히 막아섰다. 1987년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광범위한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동성동본불혼제와 호주제는 여전히 폐지되지 않았다.
2005년 민법이 개정되어 호주제와 동성동본불혼제가 폐지됐다. 호주제는 남녀 차별이 뿌리박은 대표적인 틀이다. 동성동본불혼제 폐지로 6만여 쌍의 부부가 구제받았다. 이태영이 처음 여성법률상담소를 차린 지 무려 50년 가까이 지난 뒤다. 이태영만이 아니라 남녀평등을 위해 노력해온 많은 이의 꿈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누구보다 기뻐했을 이태영은 이 성취를 보지 못했다. 이태영은 1998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여성들에게 오랜 염원이었던 가족법 개정, 동성동본불혼제와 호주제 폐지는 이태영이 쌓아 올린 수많은 벽돌 위에 이루어진 일이다. 물론 이태영 혼자서만 쌓은 것은 아니다. 많은 이가 동참했다. 결혼 제도의 불합리함을 없애고, 배우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가정을 이루며, 아들딸이 차별받지 않고 가정 내 권리를 누리는 세상은 이태영과 그의 동료 및 후배들이 우리에게 주려 했던 선물이었다.
남녀평등의 집은 다 지어지지 않았다. 가정은 평등하지 않다. 2019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맞벌이 가구는 남편이 하루 평균 54분간, 여성은 3시간 7분간 가사 노동을 하고 있다. 아내만 취업한 외벌이 가구에서도 아내의 가사 노동 시간이 남편보다 37분 더 길다.
그렇다고 가정 밖이 평등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래 27년째 성별 임금격차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다보스포럼이 조사한 ‘성 격차 지수’에서는 146개 국가 중 105위에 그쳤다. 근로소득과 고위직 비율이 최하위권이었다. 남성이 100만 원의 임금을 받을 때 여성은 69만 원을 받고, 여성 10명 중 4명은 출산·육아 등으로 인해 경력 단절을 경험한다. 영국 시사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유리천장지수’(직장 내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평가하는 지표)에서는 11년째 최하위다.
남녀가 평등하게 살기 위해서는 제도 개혁과 문화 혁신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문화적 혁신을 수반하지 않는 제도 개혁은 공허하고, 제도적 뒷받침 없는 문화적 혁신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남녀평등을 위한 제도 개혁에서 이태영은 언제나 앞장서서 성취를 일궈냈다. 내가 다시 만나고 싶은 여성의 목록에서 이태영은 그 만남을 기다려온 인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는 남녀평등의 집이 다 지어질 것이다. 이태영의 삶을 돌아보며 갖게 되는 믿음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거다. 다 같이 한장 한장 벽돌을 날라서 지어야 할 것이다. 이미 바닥을 고르고 틀을 세워 올린 앞선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 위에 올리는 한장 한장의 벽돌이 근사한 건물을 만들 거라고 믿는다.
#이태영 #다시만난그녀들 #성지연 #여성동아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1970년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어른의 인생 수업’이 있다.
사진 뉴시스 동아DB
사진출처 나무처럼
한국 법조계는 남성들로만 이뤄진 성채였다. 이태영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그의 삶을 보더라도 당시 여성들이 법조계에 진출하는 건 쉽지 않았다. 어린 시절 이태영이 웅변대회에서 했다는 말처럼, 아들을 낳으면 온 동네가 기뻐하고 딸을 낳으면 어머니가 울었던 시대였다. 여성이 사회 진출을 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여성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다.
누비이불 팔며 생계 책임져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일형 의원, 이태영 변호사 부부(가운데)와 함께한 모습.
1982년 가정법률상담소를 찾은 태국여성변호사협회의 분야프라소프 회장 등이 이태영 소장(왼쪽)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정일형은 이태영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정일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2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재미 유학생회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했던 정일형은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일하다 평양에 개척교회를 일궜다. 그는 교회에서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일깨우기 위한 강연회를 열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됐다.
1937년 정일형은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의 특별 강연회를 주최했다. 정일형은 이 강연회로 인해 일본 경찰에 연행됐고, 이후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합류했다. 이태영은 교사 월급으로 살림을 꾸리고 출산과 육아를 감당해야 했다. 살아가는 건 점점 어려워졌다. 큰아이를 병으로 잃었다. 일본 경찰은 걸핏하면 정일형을 잡아들여 고문을 자행했다. 정일형은 1941년 일본으로 피신했다 돌아왔는데 일본 헌병에 다시 체포됐다. 심문과 고문으로 이어진 구금 상태는 2년이나 계속됐다. 이태영까지 붙잡혀 들어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 시절 이태영에게 당장 닥친 것은 생활 문제였다. 식대와 약값까지, 옥바라지에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다. 게다가 당시 서울에서 교사로 있던 이태영은 정일형이 감금된 평양경찰서를 오가야 했다. 누비이불이 잘 팔린다는 소리를 듣고 이불 장사를 시작했다. 직접 이불을 만들고 집집을 다니며 팔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편이 나아져 가게를 내고 집을 사기도 했다.
여성을 위한 최초의 법률 상담소
전기 작가 윤혜윤이 쓴 ‘이태영’.
당시 이태영의 합격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여성으로 처음인 데다가 서른아홉 살의 가정주부였으니 사람들 관심을 크게 끌 만한 일이었다. 이태영은 판사를 지원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여자가 판사가 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거부했다. 남편 정일형이 야당의 국회의원이었다는 점도 판사 임용을 막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탄생했다. 이태영은 변호사 사무실을 집에다 차렸다. 문을 열자마자 남편의 외도, 가정폭력, 불합리한 이혼 등으로 고통받던 여성들이 골목까지 줄을 섰다. 이태영은 마치 4000여 년이나 자신 같은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버림받고 서러움 많은 여성들이 줄지어 몰려왔다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여성들은 법에 대한 무지와 취약한 경제 상황뿐 아니라 불합리한 법 자체로 고통받고 있었다. 일본 법을 그대로 가져와 1959년까지 쓰였던 구(舊)민법은 남녀의 평등한 권리를 침해하는 조항이 많았다. 아내가 법률행위를 할 때도 남편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태영은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를 차렸다. 재능 기부를 받아 무료 상담을 진행했고, 우편 상담, 전화 상담, 잡지 상담은 물론 라디오 상담까지 진행했다. ‘목요가족법강좌’를 열어 여성들에게 법률을 가르쳤고, ‘어머니학교’ 등에서 부부·고부·부모자식 관계에 대한 교육을 했다.
남성들이 독점해온 영역에 처음으로 진출한 여성들은 참 대단하다. 이를 혼자 돌파해내기란 정말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오랫동안 남성들로만 채워진 법조계에 처음으로 진출한 것만으로도 이태영은 이 나라의 여성들에게 절대 작지 않은 용기와 힘을 안겨줬다.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 이태영은 부와 권력을 누리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태영은 달랐다. 이 땅의 여성들과 같이 잘 살기로 마음먹었다. 법률가답게 이태영은 제도적 변화를 향해 나아갔다. 법을 바꾸는 일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법전편찬위원회가 구성돼 1954년 민법 초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헌법은 분명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규정했지만 민법의 친족과 상속 편은 여성 차별적 규정을 싣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남편의 전처소생이나 혼인외의출생자는 아내의 자식이 되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했다. 남편 쪽 친족 범위가 더 넓었고, 자녀의 친권 행사자는 아버지가 우선이고 어머니는 그다음이었다. 상속을 보면 딸의 호주 상속 순위가 최하위고 결혼한 딸은 상속에서 제외됐다. 아내의 상속분은 호주보다 적은데, 결국 아들이 어머니나 딸보다 상속에서 더 우위에 있었다. 2023년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규정이다.
이태영은 1952년 시보 연수 중 민법안에서 호주제가 계승되고 남녀 차별적 규정들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했다. 그래서 여성단체들을 모아 ‘여성단체연합’을 만들고 1953년 법전편찬위원회에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후에도 관계 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각종 집회, 방송, 강연을 펼쳤다.
1957년 대표 발의 정일형 의원 외 33명의 이름으로 민법 수정안이 제출됐다. 1958년 개정된 가족법에 이 수정안의 일부가 반영됐다. 이태영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여성단체들과 가족법 개정을 위한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가정법원 설치 정도의 성과만 거뒀다.
1973년 61개의 여성단체가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를 결성하고 10개 항의 개정 요강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태영은 가족법 개정안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개정안을 같이 준비했다. 이 개정안은 1975년 국회에 제출됐고, 1977년 일부 개정이 이뤄졌다. 이처럼 가족법은 더디게 바뀌어갔다. 동성동본 금혼에서 1979년 1년간 한시적으로 혼인신고와 자녀 입적 신고가 허용됐다. 가족법에서 남녀 차별을 지탱하는 호주제는 그동안의 노력에도 끄떡없었다.
이태영이 여성운동에만 나선 것은 아니었다. 1971년 당시 야당인 신민당에 입당했다. 1972년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독재가 시작됐다. 1976년 3·1절을 기념해 명동성당에서 열린 미사에서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됐다. 정일형은 이 사건으로 기소돼 의원직을 상실했고, 이태영은 3년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3·1민주선언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이태영은 ‘여성백인회관’ 건립을 추진했다. 건물을 짓다 돈이 모자라면 재판 중에도 돈을 구하러 다녔다. 상담소가 셋방살이로 떠돌았기에 독립된 건물을 짓는 건 이태영의 오랜 꿈이었다. 상담소를 돕던 ‘10인 클럽’과 ‘17인 클럽’이 지원했다. 처음에는 2000만 원이 있으면 집을 지을 것 같았다. 그래서 100명이 20만 원씩 모을 계산이었다. 하지만 5년에 걸쳐 모금했는데 건물 지을 땅을 사는 데 그쳤다.
1975년 이태영은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 공헌 등의 업적이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이었다. 1만 달러의 상금으로 일단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어 한국에서 100명, 미국에서 100명 등 1700여 명의 정성이 모였다. 이태영과 100명의 회원이 직접 공사장에 가서 벽돌을 날랐다. 마침내 6층 높이의 건물을 지어냈다. 건물을 완성한 결과도 주목할 만하지만 건물을 올린 과정은 정말 대단했다.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될 때까지 하고야 마는 끈기다.
가족법 개정을 위한 이태영의 노력은 1980년대에도 계속됐다. 1984년에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주관 아래 41개 여성단체 대표의 발기로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여성단체 연합’이 결성됐다. 이태영이 회장이었다. 하지만 개정은 무산됐다. 가족법 개정의 핵심에는 동성동본불혼제와 호주제가 있었다. 유림들이 격렬히 막아섰다. 1987년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광범위한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동성동본불혼제와 호주제는 여전히 폐지되지 않았다.
2005년 민법이 개정되어 호주제와 동성동본불혼제가 폐지됐다. 호주제는 남녀 차별이 뿌리박은 대표적인 틀이다. 동성동본불혼제 폐지로 6만여 쌍의 부부가 구제받았다. 이태영이 처음 여성법률상담소를 차린 지 무려 50년 가까이 지난 뒤다. 이태영만이 아니라 남녀평등을 위해 노력해온 많은 이의 꿈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누구보다 기뻐했을 이태영은 이 성취를 보지 못했다. 이태영은 1998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여성들에게 오랜 염원이었던 가족법 개정, 동성동본불혼제와 호주제 폐지는 이태영이 쌓아 올린 수많은 벽돌 위에 이루어진 일이다. 물론 이태영 혼자서만 쌓은 것은 아니다. 많은 이가 동참했다. 결혼 제도의 불합리함을 없애고, 배우자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가정을 이루며, 아들딸이 차별받지 않고 가정 내 권리를 누리는 세상은 이태영과 그의 동료 및 후배들이 우리에게 주려 했던 선물이었다.
남녀평등이라는 집
1995년 가정법률상담소 소장으로 대를 잇게 된 사위 김흥한 변호사와 장모 이태영 변호사.
그렇다고 가정 밖이 평등한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래 27년째 성별 임금격차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다보스포럼이 조사한 ‘성 격차 지수’에서는 146개 국가 중 105위에 그쳤다. 근로소득과 고위직 비율이 최하위권이었다. 남성이 100만 원의 임금을 받을 때 여성은 69만 원을 받고, 여성 10명 중 4명은 출산·육아 등으로 인해 경력 단절을 경험한다. 영국 시사지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유리천장지수’(직장 내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평가하는 지표)에서는 11년째 최하위다.
남녀가 평등하게 살기 위해서는 제도 개혁과 문화 혁신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문화적 혁신을 수반하지 않는 제도 개혁은 공허하고, 제도적 뒷받침 없는 문화적 혁신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남녀평등을 위한 제도 개혁에서 이태영은 언제나 앞장서서 성취를 일궈냈다. 내가 다시 만나고 싶은 여성의 목록에서 이태영은 그 만남을 기다려온 인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는 남녀평등의 집이 다 지어질 것이다. 이태영의 삶을 돌아보며 갖게 되는 믿음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거다. 다 같이 한장 한장 벽돌을 날라서 지어야 할 것이다. 이미 바닥을 고르고 틀을 세워 올린 앞선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 위에 올리는 한장 한장의 벽돌이 근사한 건물을 만들 거라고 믿는다.
#이태영 #다시만난그녀들 #성지연 #여성동아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1970년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어른의 인생 수업’이 있다.
사진 뉴시스 동아DB
사진출처 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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