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1940년대 후반).
한국 서양미술의 거장, 이쾌대.
좌우 갈등 속 사라질 뻔한 이름, 이쾌대
‘군상-4’(1948).
그는 1938년 도쿄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한 ‘운명’을 시작으로 3년 연속 입선했다. 1941년 한국적인 서양화를 그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이중섭, 김학준, 문학수 등과 함께 ‘조선 신미술가협회’를 만들었다. 서양화와 한국화 그 사이에서 답을 찾아내려는 고민이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이다. 한국 전통 복식을 하고 있는 인상적인 표정의 화가가 서양의 팔레트를 들고 있다. 한국화 붓을 들고 꼿꼿하게 서 있는 자태는 일제강점기 지식인과 예술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945년 광복 직후 민족 예술을 만들어보겠다는 그의 목표는 첨예한 정치 대립 속에 그 색이 바랜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그는 북한이 점령한 서울에 머물렀다가 북한군을 위한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이후 연합군에 붙잡혀 거제포로수용소에 갇혔다. 그는 포로 교환 때 월북을 선택해 오랜 기간 우리의 예술사에서 그의 이름이 사라지게 된다.
으레 많은 예술가가 그랬듯 이쾌대는 월북 이후 북한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숙청되고 밀려났으며, 그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고문을 당했고, 그의 이름은 금기시됐다. 대한민국과 북한 모두에서 그의 작품뿐 아니라 ‘이쾌대’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신가정’ 표지화 속 표현주의
‘신가정’ 1936년 9월호.
다시 1930년대로 돌아가 보자. 1936년 9월호 표지 그림의 모델은 이쾌대의 아내인 유갑봉 여사였으리라 추측한다. 언뜻 미완성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그림은 인물을 왼쪽 아래서 본 각도와 색의 표현이 인상적이다. 당시 일본을 통해 한국에 전해졌을 유럽 화풍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자유롭고 정제되지 않은, 그래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그의 붓 터치에서 동시대 독일에서 활동한 표현주의 작가의 느낌을 찾을 수 있다. 활동 초기엔 화풍이라고 할 것도 없이 한국화의 한 장르처럼 잔잔하게 묘사되던 이쾌대 그림 속 인물들은 점차 존재감을 가지고 개성을 드러내게 된다.
왼쪽부터 ‘무희의 휴식’(1937), ‘운명’(1938), ‘카드놀이하려는 부부’(1930년대). 이쾌대는 1930년대 자신의 아내 유갑봉을 모델로 여인상을 즐겨 그렸다.
20세기 초 등장한 독일의 표현주의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 독일 문화권에서 등장한 화풍이다. 자신의 내면이 가진 상처와 감정들을 드러내고,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쾌대는 이 여인과 주변의 분위기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그 역시 일제강점기 억압받는 조선인들의 삶을 알기에 여성의 모습을 마냥 밝지 않게 그린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한국 여성들의 대표적인 얼굴을 그리고자 한 그의 노력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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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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